영조실록 14권, 영조 3년 11월 11일 계해 3번째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이광좌가 서울 안의 부역이 고르지 못한 것을 아뢰어 시정하기를 청하니 따르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서울 안에 방리(坊里)의 부역(夫役)이 고르지 않아서 부역에 나아가는 자가 심히 적으니, 방민(坊民)들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이정영(李正英)은 자신이 정경(正卿)이 되고서도 가속들을 보내어 좌경(座更)942) 에 들게 하여 지금까지 한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국가의 제도(制度)에 대군(大君)·왕자(王子)·대신(大臣)을 제외한 정경(正卿) 이하는 모두 번갈아 야경(夜警)을 돌게 되어 있는지라, 이제 다만 옛 제도를 거듭 밝힌다면 방민(坊民)들의 편벽된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조목(條目)을 엄중히 세우고 규식(規式)을 정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82면
-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
- [註 942]좌경(座更) : 야경(夜警)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