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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4권, 영조 3년 11월 11일 계해 2번째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대신과 비변 당상과 양역·전화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다시 양역(良役)과 전화(錢貨)의 폐단에 관해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호포(戶布)와 인구세(人口稅)를 시행할 수 없음을 힘써 진달하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조문명(趙文命)은 말하기를,

"호포의 법이 왕도(王道)의 정사(政事)에 가까운 듯하나, 그 실은 왕도의 정사가 아닙니다. 고려(高麗) 말엽에 시작되었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특명(特命)으로 혁파하였으니, 이제 전하께서 비록 시행하고자 하시더라도 또한 시행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전폐(錢弊)의 시급함을 구제하려면 주전(鑄錢)을 더하는 것이 가장 양책인데, 이제 전폐의 문제로써 전화를 혁파한다면 저화(楮貨)의 폐단이 또한 어찌 돈과 다르겠습니까?"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 감영에서 명을 받들고 있을 때에 장계를 올려 호포(戶布)의 폐단을 논할 일이 있었는데, 그 후에 주상께서 장계를 상고해 보시고 하교하시기를, ‘호포와 구전(口錢)이 거의 균역(均役)의 방도가 될 줄로 알았으므로 저번에 언급(言及)하였던 것인데 병조 참판의 진달한 바가 좌상(左相)의 장계와 그 언론이 서로 부합(符合)하는지라 이제야 비로소 환하게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호포는 곧 고려 말엽에 시행하였던 정사(政事)인데 태종조(太宗朝)에 혁파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만약 과연 폐단이 없었다면 어찌 혁파하였겠습니까?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합니다. 전폐(錢弊)가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이미 돈을 혁파하지도 못하고 또 주전(鑄錢)을 더하지도 못한다면 그 가운데에서 더 시급한 폐단을 구제한 연후에야 목전(目前)의 급박한 문제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는 말하기를,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는 바는 부민(富民)들의 채무(債務)이니 이는 특히 갑절의 이식(利息)뿐이 아닙니다. 봄에 1냥의 값에 해당한 곡식을 주고 가을에 1냥 5전을 받는데, 가을의 1냥 5전을 곡식으로 계산한다면 거의 3, 4배(倍)나 되는지라, 가난한 백성들의 탕패(蕩敗)가 오로지 이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이 폐단을 엄금하고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이요, 【정식에 의하면 돈 1냥에 대한 1개월의 이자가 2푼을 넘지 못하며, 10개월에 이르러 2전(錢)이 되면 이에서 더 받지 못한다. 곡식 10두(斗)에 대한 1개월의 이자가 5승(升)을 넘지 못하며 10개월에 이르러 5두를 채우면 그치고 비록 10년이 지나더라도 또한 더 받지 못한다. 공채(公債)에 있어서는 전·곡(錢穀)의 이자가 모두 10분의 1에 그친다고 되어 있다.】 사사로이 주고 갑절의 이자를 받는 자는 형배(刑配)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정식(定式)을 팔도(八道)에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모두 한가로운 말들이고, 인재를 가려 구임(久任)941) 시키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여섯 차례 체임(遞任)시켰는데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극례(權克禮)가 청대(請對)하여 진달하므로 이에 죄적(罪籍) 중의 이원익(李元翼)을 기용(起用)하여 차송(差送)하매 드디어 안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명종조(明宗朝)에는 상주 목사(常州牧使)의 적재(適材)를 얻기가 어려우므로 심지어는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수의(收議)케 하였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수령(守令)을 선택함에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각사 낭관(各司郞官)을 구임(久任)하는 법을 거듭 엄중히 하여 효과(効果)가 있는 자는 상(賞)을 주고 효과가 없는 자는 논책(論責)하게 하였으며, 또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는 2주년(週年) 이내에는 승천(陞遷)을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문신(文臣)으로서 삼사(三司)에 기한을 채우지 않고 이수(移授)하는 자는 계청하여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구임(久任)의 절목(節目)이 이미 이루어지자 【호조(戶曹)의 정랑(正郞)·좌랑(佐郞) 2원(員)은 30삭(朔)이요, 그 나머지는 6삭을 준(準)한다. 병조(兵曹)의 정랑·좌랑 2원은 30삭이요, 형조(刑曹)의 정랑·좌랑 각 1원은 15삭이며, 그 나머지는 6삭을 준한다. 공조(工曹)의 정랑·좌랑 가운데 1원은 12삭이요, 한성부(漢城府)의 판관(判官)·주부(主簿) 가운데 1원은 15삭이며, 그 나머지는 6삭을 준한다. 금부 도사(禁府都事)와 감찰(監察)은 전례에 의하여 6삭을 준하였고, 장례원(掌隷院)·사의(司儀)·사평(司評) 가운데 1원은 15삭이요, 그 나머지는 전례에 의하여 6삭을 준한다. 성균관(成均館)의 장무관(掌務官) 1원은 15삭이요, 사복시(司僕寺)의 첨정(僉正)·판관(判官)은 30삭이요, 군자감(軍資監)의 판관(判官)·주부(主簿) 가운데 1원은 12삭이며, 광흥창(廣興倉)의 주부 1원은 12삭이요, 장악원(掌樂院) 관원에서 음률(音律)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입계(入啓)하여 30삭으로 한정(限定)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금부(義禁府)와 사헌부(司憲府)는 6삭(朔)으로 준(準)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2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금융(金融)

  • [註 941]
    구임(久任) : 한 관직(官職)에 오랫동안 근무하던 제도. 대개 일정한 기간이 되면 체임(遞任)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특수한 관직에 한하여 구임시켰음.

○上引見大臣、備堂, 復以良役、錢貨之弊, 下詢于諸臣。 領議政李光佐, 力陳戶布、口錢之不可行, 兵曹參判趙文命曰: "戶布之法, 似近乎王者之政, 而其實非王政也。 創自麗末, 至太宗朝, 特命罷之。 今殿下雖欲行之, 亦有行不得處。 錢幣救急, 莫如加鑄。 今以錢幣而罷錢, 則楮貨之弊, 亦何異於錢乎?" 左議政趙泰億曰: "臣待罪嶺藩時, 嘗有狀啓, 論戶布之弊。" 上取覽狀啓, 敎曰: "戶布、口錢, 庶爲均役之道, 故頃日言及, 而兵參所陳, 與左相狀啓, 其言相符, 今乃曉然。 戶布乃麗末之政, 太宗朝, 罷而不行。 若果無弊, 則豈罷之乎? 欲法, 當法祖宗。 錢幣已極, 旣不罷錢, 又不加鑄, 則就其中救其極弊, 然後可紓目前之急。" 光佐曰: "民之所大苦者, 富民之債, 非特甲利而已。 春以一兩之價給穀, 而秋捧一兩半, 秋之一兩半, 計穀則幾三四倍。 貧民蕩敗, 專由於此。 今宜嚴禁其弊, 永爲定式, 【定式曰: 錢一兩一朔之利, 無過二分, 至十朔滿二錢則止, 雖十年不得加捧。 穀十斗一朔之利, 無過五升, 至十朔滿五斗則止, 雖十年, 亦不得加捧。 公債則錢穀之利, 俱止於什一。】 私與甲利者, 宜刑配也。" 上從之, 命以定式, 頒布八路。 光佐又曰: "千言萬語, 皆是閑說。 擇人久任, 實爲當今之先務也。 宣廟朝, 安州六易倅而不得人。 吏判權克禮, 請對陳達, 乃以罪籍中李元翼, 起廢差送, 遂大治。 明宗朝, 尙州難其人, 至令大臣收議。 祖宗朝愼擇守令如此。" 上稱善。 申嚴各司郞官久任之法, 有效者論賞, 無效者論責, 又命文、蔭、武守令, 二周年內不許陞遷。 【文臣三司未準限而移除者, 啓請擬望。】 從領議政李光佐之言也。 久任節目旣成。 【戶曹正郞、佐郞二員三十朔, 其餘準六朔。 兵曹正郞、佐郞二員三十朔, 刑曹正郞、佐郞各一員十五朔, 其餘準六朔。 工曹正郞、佐郞中一員十二朔, 漢城府判官、主簿中一員十五朔, 其餘準六朔, 禁府都事、監察依前準六朔。 掌隷院司儀、司評中一員十五朔, 其餘依前準六朔。 成均館掌務官一員十五朔, 司僕僉正、判官三十朔, 軍資判官、主簿中一員十二朔, 廣興主簿一員十二朔, 掌樂院官員如得知音律人入啓, 限三十朔。】 上曰: "禁府、憲府, 則不必準六朔矣。"


  •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2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금융(金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