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도에서 돈과 무명을 섞어 봉납하는 것을 허락하다
다시 제도(諸道)에서 전·목(錢木)621) 을 반반씩으로 섞어 봉납(捧納)하게 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전화(錢貨)에 폐단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혁파(革罷)하려 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관부(官府)에 명하여 돈[錢]으로 봉납할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고 단지 민간(民間)에서 사사로이 쓰는 것만을 허락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장계(狀啓)를 올려 반은 돈으로 섞어서 봉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도 잇달아 ‘사사로이 쓰는 것만 허락하고 공적으로 쓰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장애되는 점이 많다’고 진달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이날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만약 전폐(錢幣)를 혁파한다면 의당 저폐(楮幣)를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저폐의 편부(便否)에 대해 하문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신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듣건대, 그 제도는 장지(壯紙) 한 장이면 여섯 조각을 낼 수 있고, 그 모양은 병조(兵曹)의 초료판(草料板)622) 과 같아서 백관(百官)들의 늠료(廩料)를 나누어 줄 적에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래 쓰면 해져서 떨어지고 찢어지기 때문에 떨어지는 대로 다시 만들어야 하므로 결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고,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이른바 조량목(助粮木)이라는 것은 바로 시장에서 쓰는 상목(常木)623) 인데, 신이 어릴 적에 본 바로는 길이나 너비가 너무 짧아서 세간에서 이른바 함산포(咸山布)라는 것과 같아서 오래 쓰면 거칠고 검게 되니, 이것은 사가(私家)에서 아침저녁으로 시장에서 쓰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다른 데에 쓸 수가 없습니다. 병진년624) 에 처음 소전(小錢)을 주조했는데 소전 네 푼이 대전(大錢) 한 푼의 값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폐(楮幣)와 조량목(助粮木)은 내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일단 돈을 사용한 뒤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점차 괴려(乖戾)되어가고 있으니, 이는 우물(尤物)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혁파한다면 다른 화폐(貨幣)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에서 헤아려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1면
- 【분류】재정(財政) / 금융(金融)
- [註 621]전·목(錢木) : 돈과 무명.
- [註 622]
초료판(草料板) : 공무로 출장하는 관원에게 연도(沿道)의 각 역참(驛站)에서 역마(驛馬)·식료(食料) 등을 공급하도록 명령하는 문서.- [註 623]
상목(常木) : 보통 무명.- [註 624]
병진년 : 1676 숙종 2년.○復許諸道錢木參半之捧。 先是, 上以錢貨有弊, 擬將革罷, 而廷議難之, 故命京外官府, 勿許捧錢, 而只許民間之私用矣。 至是, 黃海監司金始㷜, 因民願狀請參半捧錢。 左議政趙泰億、戶曹判書李台佐, 繼陳只許私用, 不許公用之多有窒礙, 故有是命。 是日, 台佐奏曰: "若罷錢幣, 則當用楮幣矣。" 上問楮幣便否, 泰億曰: "臣未及見之, 而聞其制度, 則壯紙一張, 可出六片, 其狀如兵曹草料板, 而用之於百官頒料。 若久用則弊裂, 故隨弊隨造, 決非久用之物矣。" 台佐曰: "所謂助糧木, 卽市上常木。 臣幼時見之, 則長廣甚短, 如世所謂咸山布, 而久用則麤黑, 此不過爲私家朝夕市上之用, 而不可他用。 丙辰年間, 始造小錢。 小錢四分爲大錢一分之價云," 上曰: "楮幣與助糧木, 予未及見, 而一自用錢之後, 人心世道, 日漸乖謬, 此可謂尤物。 罷錢則他幣不可不用, 當與廟堂, 商確以定。"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1면
- 【분류】재정(財政) / 금융(金融)
- [註 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