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진의 체직과 여수 순천의 분계한 폐단을 논의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세상의 도의(道義)가 어그러지고 어지러워진데다가 이세진(李世璡)의 일이 또 생겼습니다. 비록 다행히도 처분을 명쾌하게 하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유래한 바를 따져 본다면 대개 전하께서 원임 대신(原任大臣)에 있어서 정승 체직(遞職)을 너무 용이하게 하시어, 괴이한 귀신같은 무리가 망령되이 헤아리는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순천(順天)과 여수(麗水)의 분계(分界)가 편리한지 않은지를 하문(下問)하자, 홍치중이 말하기를,
"여수는 분읍(分邑)한 뒤에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미 설치했다가 도로 혁파하는 것이 비록 두서가 없는 것같기는 하지만, 사세가 진실로 혁파해야 한다면 없애는 것에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묻자, 모두들 말하기를,
"개혁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에 문부(文簿)가 호번(浩煩)하기 때문에 미처 조관(照管)하지 못하고서 분속(分屬)하도록 윤허했던 것인데, 여수 부사(麗水府使)에 대한 유서(諭書)를 지어 입계(入啓)함에 당해서야 비로소 뉘우치게 되었다. 마땅히 결단해야 하는데도 결단하지 못한 것은 우유 부단(優柔不斷)에 가까운 것이니, 여수를 도로 순천에 소속해야 한다."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고(故) 좌상(左相)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은 기묘년378) 의 명현(名賢)이었는데, 참혹한 처형(處刑)의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림(士林)들이 비통하게 여겼습니다. 듣건대 그의 자손들이 이번에 비로소 광주(廣州) 땅에서 묘산(墓山)을 찾아냈다고 하니, 마땅히 본도(本道)의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묘를 만들 물건을 주도록 하고,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후하게 돌보아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하게 여겼다. 삼사(三司)에서 앞서의 합계(合啓)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정지하도록 비답하고, 양사(兩司)에서 앞서의 합계한 일을 거듭 아뢰니, 시급히 그만두도록 비답하였으며, 사헌부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고, 사간원에서 앞서의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정관(貞觀)379) 시절의 정치는 날마다 민생들의 근심거리와 국가의 계책을 강구(講求)하기에 벗어나지 않았었는데, 오늘날의 빈대(賓對)380) 에서는 양사(兩司)에서 종일토록 논쟁하는 바가 다만 이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지나치게 붙잡아 주거나 하는 논의이고, 한 사람도 탐관 오리(貪官汚吏)를 논급(論及)하는 일이 없어 국가의 계책과 민생들의 근심거리는 서로가 잊어버리는 지경에 두고 있으니, 만일 이런 일을 청사(靑史)에 써 놓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게 되겠는가?"
하고, 이어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장령 이근(李根)이 아뢰기를,
"신이 전번에 여수(麗水)의 분현(分縣)에 관한 일로 상소를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었는데, 오늘의 경연(經筵)에서는 분현을 그르게 여기므로 필경에는 처분을 내리시어 드디어 도로 소속(所屬)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당초에 잘 살피지 않은 잘못이 현저해졌으니, 청컨대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도 말고 또한 퇴대(退待)하지도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02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註 378]기묘년 : 1519 중종 14년.
- [註 379]
정관(貞觀) : 당나라 태종의 연호(年號).- [註 380]
빈대(賓對) : 매월 여섯 차례씩 의정(議政)·대간(臺諫)·옥당(玉堂)들이 입시(入侍)하여 중요한 정무(政務)를 상주(上奏)하는 일. 차대(次對).○上引見大臣、備堂。 左議政洪致中曰: "世道乖亂, 李世璡事復出矣。 雖幸處分明快, 原其所由來, 則蓋以殿下, 於原任大臣遞相職太容易, 以致怪鬼輩妄揣矣。" 上曰: "然矣。" 上以順天、麗水分界便否下詢, 致中曰: "麗水分邑之後, 爲弊不些。 旣設旋革, 雖似顚倒, 事苟可罷, 不可以銷刻爲拘。" 復詢諸宰, 僉曰: "革之便。" 上曰: "頃因文簿浩煩, 未及照管, 許令分屬, 及麗水府使諭書製入, 始悔之矣。 當斷不斷, 近於優柔, 麗水還屬順天。" 致中曰: "故左相貞愍公 安瑭, 以己卯名賢, 酷被芟夷之禍, 士林悲之。 聞其子孫, 今始尋得墓山於廣州地。 宜令本道方伯, 給造墓物, 令賑廳, 施優恤之典矣。" 上可之。 三司申前合啓, 批亟停。 兩司申前合啓, 批亟停。 憲府申前啓, 批勿煩。 諫院申前啓, 上曰: "唐宗 貞觀之治, 不過日講民憂國計, 而今日賓對, 兩司之終日所爭, 只是太抑太扶之論, 而無一人論及貪官汚吏之事, 國計民憂, 置之相忘之域。 此事若書之靑史, 後之人以予爲何如主耶?" 因命勿煩。 掌令李根啓曰: "臣於向者, 以麗水分縣事, 陳疏蒙允, 今日筵中, 以分縣爲非, 畢竟處分遂至還屬。 臣之當初不審之失著矣, 請命遞斥臣職。" 批勿辭, 亦勿退待。
-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02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註 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