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부자 등을 탄핵한 지평 한계진의 상소문
지평(持平) 한계진(韓啓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의 여러 적(賊)이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하고 충현(忠賢)을 참벌(斬伐)한 것은 저궁(儲宮)을 세워 대리(代理)한다는 일을 역적(逆賊)으로 여기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피차(彼此)의 충신(忠臣)·역적(逆賊)의 구분은 또한 이 한 조항에 있습니다. 옛날 우리 인종 대왕(仁宗大王)께서 사복(嗣服)1450) 하시던 처음에 병환이 있어 오래도록 정사 보살피는 것을 비워두어야 했기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 마땅히 일찍이 대군(大君)을 세워 세제(世弟)로 책봉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그 말을 이언적(李彦迪)의 행장(行狀)에 특별히 썼던 것입니다. 더구나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병환이 이미 오래된데다가 사속(嗣屬)의 희망이 끊긴 것은 국인(國人)이 다 아는 바였으니, 저궁(儲宮)을 세울 계책을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송(宋)나라 효종(孝宗)은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국사(國事)에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자 주자(朱子)가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성려(聖慮)의 깊은 것을 볼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선대왕께서는 병환으로 버티기가 어려워 심지어 ‘측근의 신하로서 해야 옳을 것인가, 세제(世弟)로 해야 옳을 것인가?’라고까지 하셨으니, 대리(代理)의 시키는 일을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그런데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역신(逆臣)이 된다고 한 이유는 어찌 변서(變書)나 흉소(凶疏)와 교문(敎文)을 대신 찬술(撰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5적(五賊)은 도리어 공(功)으로 삼아 고관(高官)·미작(美爵)으로 그 권세를 펼치고 단서 철권(丹書鐵券)으로 그 공훈(功勳)을 기록하였으며, 김일경과 목호룡이 뜻을 얻은 뒤에는 전하께서 두 차례나 합문(閤門)에 나가려고 하시다가 무한한 모욕을 받으시고 한 떼의 착한 무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음에 나가게 되었으니, 모두가 전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충민공(忠愍公) 신(臣) 이건명(李健命)에 이르러서는 유독 사신(使臣) 일을 준청(準請)받은 것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여 형(刑)을 받던 날에 구경한 사람이 친척처럼 슬퍼했고, 이내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검은 안개가 땅을 덮는 이변(異變)이 있었으며, 마침내 두 아들까지 목숨을 같이하여 함께 길옆에 묻혀있어 잇달은 세 무덤을 보고 길가는 사람이 우는 얼굴을 가렸으며, 조성복(趙聖復)의 죽음에 이르러 더욱 저 무리의 정상(情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비(妖婢)가 경폐(徑斃)1451) 하게 되자 인심(人心)이 함께 분개하였는데, 그 멸구(滅口)를 다행으로 여겨 안문(按問)하지 않았습니다.
조성집(趙聖集)은 그 아우가 극형(極刑)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자진(自盡)1452) 하게 하였으니, 그 정상이 슬프기만 합니다. 이미 그 아우를 죽이고 또 그 형을 죽였으니, 그 마음을 추구(推究)하여 본다면 전하에게 반역(叛逆)하는 자는 그들이 사랑하는 바요 전하에게 충성하는 자는 그들이 미워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려 주며 단서(丹書)1453) 에 이름을 깨끗이 지워버렸은 즉, 저 몸소 살육(殺戮)을 행한 사람이 편안히 앉아서 배부르게 먹고 있다면, 황천(黃泉)의 원기(冤氣)는 더욱 뭉쳐질 것이요 신(神)과 사람의 울분(鬱憤)은 더욱 격렬하여질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과단성(果斷性) 있는 정치를 행하여 왕법(王法)을 시원스럽게 바로잡으소서.
아! 오늘날 난적(亂賊)의 방자한 행동은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윤선거가 포로(捕虜)가 되어 구차하게 모면하였으니 실절(失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적신(賊臣) 윤휴(尹鑴)와 서로 좋아하였으니 악인(惡人)에게 아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쳤다 하고, 윤휴에게 절교(絶交)하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윤휴에게 절교하였다고 하였으니, 심술(心術)의 바르지 못한 것을 더욱 도피(逃避)할 수가 없습니다. 사직소(辭職疏)에 인용한 강화도(江華島) 사건에 이르러서도 무엇이 효종(孝宗)에게 관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곧 말하기를, ‘오늘은 말할 수 있지만 다른 날은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다.’고 하면서 은연중 더러운 자신을 효종의 처신(處身)한 의리에 겨누면서 억지로 남의 입을 다물게 하면서도 스스로 효종을 속이고 핍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것은 묘문(墓文)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묘문(墓文)이 자기 마음에 만족하지 않은 것은 스승을 배반할 단서가 되지 못하니, 끝에 가서는 곧 만고 흉역(萬古凶逆)의 죄목(罪目)을 모아 아버지처럼 섬겨야 하는 데에다 능멸(凌蔑)하였는데도 도리어 그 형세가 자립(自立)할 수 없었던 까닭에 오히려 문인(門人)과 함장(函丈)1454) 의 칭호는 폐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이 소란을 일으키고 조정의 의논이 서로 나누어지게 되자, 평일에 선정(先正)에게 죄를 얻은 자와 무릇 시기를 틈타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고슴도치 털같이 일어나고 고기 비늘처럼 모여서 윤증을 추대하여 괴수(魁首)로 삼았으니, 한 번 옮겨지고 두 번 옮겨지면 사단(事端)이 잇따라 일어나고, 한쪽이 나아가고 한쪽이 물러가면 원수와 원망이 더욱 깊어지다가 조태구(趙泰耉)의 무리들이 저궁(儲宮)을 세우는 일에 이의(異議)를 하고 대리(代理)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게 되었으니, 그 근본을 구명(究明)한다면 어찌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의 한 짓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숙종(肅宗)께서 그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한 것은 천감(天鑑)이 매우 밝았던 것이고 성려(聖慮)가 심원(深遠)하였던 것인데, 저들의 흉악한 무리는 숙종의 유교(遺敎)를 안중(眼中)에 두지 않고서 숙종께서 처분(處分)하신 것을 마음대로 고쳐가며 그들에게 관작을 회복시키고도 조금도 의문을 가짐이 없었으니, 성상(聖上)께서 계술(繼述)하시는 도리에 있어 어찌 마땅히 구습(舊習)에 따라 행하면서 고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윤선거 부자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명하여 유학(儒學)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보위(保衛)하게 하소서.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은 곧 명의(名義)의 죄인(罪人)이요 유학의 난적(亂賊)입니다. 남구만은 갑술년1455) 경화(更化)1456) 할 때를 당하여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복위(復位)시키는 것으로 기뻐하고 〈장 희빈(張禧嬪)을〉강위(降位)시키는 것을 슬퍼하는 오늘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어찌 기사년1457) 여러 신하들의 마음과 다르겠습니까?’라는 등의 말로써 함부로 진달(陳達)하였는데, 당일 성고(聖考)의 처분이 공명 정대(公明正大)하여 팔방(八方)의 신민(臣民)들이 고무(鼓舞)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는 유독 슬프게 여겼으며, 기사년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국모(國母)가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남구만은 스스로 그 마음에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남구만은 문득 혼자 국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지완에 이르러서는 본래 무의(無義)·무식(無識)한 사람으로서 정유년1458) 의 한 통의 상소에 마음이 다 드러났으니, 조정 신하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고 남의 집안과 나라에 재앙을 끼칠 뜻이 소명(昭明)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고(聖考)께서 백수 대신(白首大臣)으로서 조정을 괴란(壞亂)시킨다고 하교하셨으니, 그 깊이 미워하고 몹시 거절하신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석정은 국량(局量)이 작은 사람으로서 이에 감히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할 계획을 하여 《유편(類編)》이란 한 권의 책을 찬성(撰成)하고는 자사(子思)의 장구(章句)를 변란(變亂)시키고 주자(朱子)의 훈고(訓詁)를 개역(改易)시켜 놓았으니, 그가 경전(經傳)을 훼손(毁損)시키고 성인(聖人)을 무욕(誣辱)한 죄가 과연 어떠합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과 한둘의 동덕(同德)한 신하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가지고 토적 복수(討賊復讐)의 계책을 강구(講究)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천심(天心)이 돕지 않아 대업(大業)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최석정이 곧 감히 쓸데없는 말은 시행될 수 없다며 배척하고 고상한 논리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며 헐뜯었으니, 아! 어떻게 그 말의 패리(悖理)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저 세 사람은 살아서 이미 성고(聖考)에게 죄를 얻었는데, 죽어서 도리어 묘정(廟庭)에 배식(配食)되었으니, 도리(道理)로써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속히 개정(改正)하는 법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陳達)한 일은 끌어대어 비유한 것이 명백하니 시비(是非)를 결정하는데 통쾌하다고 할 수가 있겠으나, 윤선거(尹宣擧)의 일이나 두 신하를 배향(配享)하는 일은 이미 전일의 비지(批旨)에 유시(諭示)하였는데, 그대가 또 한 명의 신하를 논하였으니,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66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교육(敎育)
- [註 1450]사복(嗣服) : 즉위(即位).
- [註 1451]
경폐(徑斃) :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는 것.- [註 1452]
자진(自盡) : 스스로 제목숨을 끊음.- [註 1453]
단서(丹書) : 죄인의 죄명(罪名)과 성명을 주서(朱書)해 놓은 문서.- [註 1454]
함장(函丈) : 스승.- [註 1455]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1456]
○持平韓啓震上疏。 略曰:
向來諸賊之謀危宗社, 斬伐忠賢, 不過以建儲代理爲逆, 而彼此忠逆之分, 亦在此一款。 昔我仁宗大王, 嗣服之初有疾, 久曠視事。 先正臣李彦迪, 謂當早建大君, 封爲世弟, 而先正臣李滉, 特書其言於彦迪行狀, 則況先大王疾患已久, 嗣(屬)〔續〕 之斷望, 國人之所共知, 則建儲之策, 烏可已也? 宋 孝宗命太子, 參決國事, 朱子上封事, 以爲可見聖慮之深, 則況先大王疾患難强, 至以左右可乎世弟可乎爲敎, 則代理之擧, 烏可已也? 鏡、虎之所以爲逆者, 豈非以變書、凶疏及代撰敎文耶? 彼五賊, 反以爲功, 高官美爵, 以張其勢, 丹書鐵券, 以策其勳。 鏡、虎得志之後, 殿下欲出閤至再, 受誣衊無限, 一隊善類, 駢首就戮。 莫非爲殿下死者, 而至於忠愍公臣李健命, 獨以使事之準請, 被禍尤酷。 受刑之日, 觀者如悲親戚, 而因有白氣亘霄, 黑霧蔽地之異, 卒至二子幷命, 共埋道傍, 纍纍三塚, 行路掩涕。 至於趙聖復之死, 尤可見彼輩之情狀矣。 妖婢之徑斃, 人心之同憤, 而幸其滅口, 不爲按問。 趙聖集之不忍其弟之受極刑, 使之自盡, 其情慼矣, 而旣殺其弟, 又殺其兄。 究其心腸, 則逆於殿下者, 渠輩之所愛也, 忠於殿下者, 渠輩之所惡也。 今旣復爵賜祭, 洗名丹書, 則彼身行殺戮之人, 安坐飽食, 泉壤之冤氣愈結, 神人之憤鬱愈激。 伏願廓揮乾斷, 夬正王法焉。 嗚呼! 今日亂賊之肆行, 莫非尹宣擧父子之故也。 宣擧之爲奴苟免, 可謂失身, 交懽賊鑴, 可謂黨惡, 不悔過而自謂悔過, 不絶鑴而自謂絶鑴, 心術之不正, 益無所逃。 至於辭疏所引江都事, 何干於孝廟, 而乃曰: "今日則可言, 他日則不敢出口", 隱然以滓穢之身, 比同於孝廟之處義, 要以箝制人口, 而自不覺誣逼孝廟之歸。 若夫拯之背師, 出於墓文, 而墓文之不滿意, 不足爲背師之端, 則末乃集萬古凶逆之目, 加之於父事之地, 而顧其勢不足以自立, 故猶不廢門人函丈之稱。 及夫趙持謙、韓泰東之起鬧, 朝論携貳, 則平日得罪於先正者, 與夫乘時射利之輩, 蝟集鱗萃, 而推拯而爲之魁, 一轉再轉, 事端層生, 一進一退, 讎怨益深, 至於泰耉輩之異議於建儲, 力沮於代理而極矣。 推原其本, 則何莫非宣擧父子之所爲乎? 肅廟之追奪其官爵, 天鑑孔昭, 聖慮深遠, 而彼群凶輩, 不有肅廟之遺敎, 擅改肅廟之處分, 復其官爵, 無少持疑。 在聖上繼述之道, 豈宜因循而莫之改乎? 伏願亟命追奪宣擧父子之官爵, 以扶斯文, 以衛世道焉。 廟庭配享, 事體至重, 而南九萬、尹趾完、崔鍚鼎, 乃名義之罪人, 斯文之亂賊也。 九萬當甲戌更化, 乃以復位爲欣, 降位爲慼, 今日諸臣之心, 何以異於己巳諸臣之心等語, 肆然陳達。 當日聖考處分明正, 八方臣民, 莫不皷舞, 而渠獨以爲慼。 己巳諸臣, 皆無母之人, 而九萬自謂其心無異, 則九萬便一無母之人也。 至於趾完, 本以無義、無識之人, 丁酉一疏, 心腸盡露, 網打搢紳, 禍人家國之意, 昭不可掩。 故聖考以白首大臣, 壞亂朝廷爲敎, 則其深惡痛絶之意, 可見也。 錫鼎則以斗筲之器, 乃敢爲欺世盜名之計, 撰成《類編》一書, 變亂子思之章句, 改易朱子之訓詁, 其毁經誣聖之罪, 果如何哉? 且伏念昔我孝宗大王曁一二同德之臣, 秉《春秋》之義, 講討復之策, 不幸天心不助, 大業未究, 而鍚鼎乃敢斥之以空言無施, 詆之以高論無成。 噫! 何其言之悖理至此耶? 彼三人者, 生旣得罪於聖考, 死反配食於廟庭, 揆以道理, 寧有是乎? 伏願聖明, 亟命有司, 遄擧釐正之典焉。
批曰: "首陳之事, 引喩明白, 可謂決是非之洞快, 而尹宣擧事及配享兩臣事, 已諭於前日批旨, 而爾之又論一臣, 予以爲過矣。"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66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교육(敎育)
- [註 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