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8권, 영조 1년 11월 24일 무오 1번째기사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서중급과 홍치중이 북쪽 변방에 지략있는 인재를 보내도록 아뢰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서종급(徐宗伋)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성첩(城堞)이 비록 견고(堅固)하더라도 만약 병란(兵亂)이 있게 되면 형세가 반드시 흙이 무너지듯 할 것이니, 인화(人和)가 실제로 오늘의 급무(急務)입니다."
하고, 지경연(知經筵)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육진(六鎭)1446) 을 설치(設置)하였는데, 영고탑(寧古塔)에는 어염(魚鹽)의 이익이 없으므로, 육진이 아니었다면 충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육진(六鎭)은 반드시 지키기 어려운 근심이 있지마는,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영상(領相)은 오로지 국사(國事)를 관장(管掌)하고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은 각각 서북 체찰사(西北體察使)를 겸임(兼任)하고 있는데, 지략(知略)이 있는 자를 잘 뽑아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오늘의 제일에 힘써야 될 일입니다. 지리(地利)가 비록 인화(人和)만은 못하다고 하지마는 또한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으니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66면
-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 [註 1446]육진(六鎭) : 조선조 세종(世宗) 때에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지금의 함경북도 북변(北邊)을 개척하여 설치한 여섯 진(鎭). 곧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鍾城)·회령(會寧)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