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급의 복과를 등에 관한 헌납 채응복의 상소문
헌납(獻納)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번 정시(庭試)에 입격(入格)한 사람 윤급(尹汲)의 비봉(秘封) 가운데 나이와 주거지(住居地)를 쓰지 않아 마침내 빼어 버릴 것을 계청(啓請)하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전례(前例)를 원용(援用)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신은 억울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신이 예조(禮曹)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일찍이 신유년1410) 에 있었던 주항도(朱恒道)는 식년 회시(式年會試) 때의 비봉(秘封)에 성(姓)과 본관(本貫)과 나이를 쓰지 않았으므로 빼버렸다가 전시(殿試)를 지난 뒤에 유신(儒臣)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후일에 복과(復科)를 명하였습니다. 지금 윤급(尹汲)은 이미 과제(科第)에서 2등을 차지하였고 어수(御手)로 친히 개탁(開拆)을 거치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은 주항도에 비하면 조금 중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유년1411) 알성시(謁聖試)에서 이인소(李寅熽)가 비봉(秘封)에 직함(職銜)을 쓰지 않았으므로 시소(試所)에서 빼어 버릴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으니, 지금 이 윤급의 낙서(落書)는 이인소의 잘못 쓴 것과는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또 심준(沈埈)의 제자(題字)가 빠진 것이나 최수경(崔守慶)이 소인(小印)을 찍지 않은 것이 외면(外面)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또한 뒷날 폐단에 관계되는 바가 있겠지마는, 해가 오래 된 뒤에는 그래도 복과(復科)를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날 시소(試所)에서 고례(古例)의 근거를 몰라서가 아니라 갑작스런 순간에 능히 글을 꾸며 계품(啓稟)할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앞질러 먼저 빼어 버리도록 한 것이니 애석함을 견디겠습니까? 바라건대, 빨리 성명(聖明)께서는 숙종(肅宗)의 성대한 뜻을 우러러 본받으시고 한 사람의 지극히 원통함을 굽어 살피시어 다시 대신에게 물어보시고 처리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근년에는 8도(八道)에 거듭 흉년(凶年)이 들자 양민(良民)이 도둑이 되어 심지어는 일산을 펼쳐들고 불러대며 재물로써 사람을 죽여 쓰러뜨리는 자가 있으니, 여주(驪州)·양근(陽根) 등 고을이 더욱 그 해(害)를 입고 있습니다. 마땅히 별도로 위풍과 무력이 있는 원[倅]을 뽑아서 날렵하게 체포하는 임무를 맡겨 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은 3년의 자리를 변경하여 6년의 자리로 하였으므로 지금은 3년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습니다. 다스리는 이치를 환히 알고 재능과 기량(器量)이 넉넉하고 민첩한 자는 대체로 대부분 연한(年限)에 구애되거나 산관(散官)1412) 에 헛되이 늙고 있으니, 마땅히 옛날 제도를 따라 3년의 자리를 6년의 자리로 만든 자는 그전대로 뽑아 메우면 점차 옛날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요즘 장물(贓物)을 다스리는 법이 엄하지 못하므로, 비록 죄과에 범한 사람이 있더라도 권세 있는 연줄을 타서 청탁을 꾀하여 마침내 말끔히 벗어나게 되니,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앞으로는 일이 탐장(貪贓)에 관계되는데도 함부로 전결(田結)을 이용하는 자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신칙하여 영구히 기용(起用)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신(朝紳)1413) 가운데서 청렴하고 결백하여 존경할 만한 사람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널리 묻고 정밀하게 뽑아서 현저하고 포상(褒賞)을 가해야 하겠습니다. 고(故) 참판(參判) 신(臣) 이단석(李端錫)은 청백(淸白)하고 청렴하며 근신(謹愼)한 것이 그와 비교될 이가 드뭅니다. 의당 특별히 포상과 증직(贈職)을 더하여 주시고 그 봉사(奉祀)하는 손자를 수록(收錄)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武臣)이 변지(邊地)의 원[倅]으로 가는 것을 싫어서 기피(忌避)하는 것이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삼수(三水)의 한 고을은 여름부터 겨울까지 교체(交遞)됨이 매우 많았고 한 사람도 부임해 가려는 자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어버이의 나이가 이미 많았거나 독자(獨子)로 형제(兄弟)가 없는 자 외에 체임(遞任)을 도모하고 부임하지 않는 자는 일체 법전(法典)에 의거(依據)하여 정배(定配)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분관(分館)할 때에 홍득후(洪得厚)가 승문원(承文院)에서 누락(漏落)을 당하였는데, 마땅히 승문원의 규례로써 조용(調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인년1414) 위훈(僞勳)으로 진하(陳賀)할 때에 유독 미말 음관(微末蔭官)으로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 참여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심지어는 삭탈(削奪)의 형률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높여서 권장(勸奬)을 가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급(尹汲)이 이미 높은 과제(科第)에 뽑혔다가 개탁(開拆)하기에 이르러 빼어 버림을 당하였으니, 내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이인소(李寅熽)와 지금 윤급의 일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니, 이인소의 규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복과(復科)시키고, 무신(武臣)의 원을 뽑아보내는 일과 장리(贓吏)를 징계(懲戒)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을 포상(褒賞)하는 일은 별도로 전조(銓曹)에 신칙할 것이며, 이단석(李端錫)의 손자는 녹용(錄用)하도록 하고, 삼수(三水)에 대한 일로 이후에 싫어하고 기피(忌避)하는 자는 청하는 바에 따라 시행(施行)할 것이며, 홍득후(洪得厚)의 일이나 상소 말미에 높여서 서용(敍用)하자는 일은 모두 따라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63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1410]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1411]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1412]
○獻納蔡膺福上疏, 略曰:
今番庭試入格人尹汲秘封中,不書年歲居本, 終至啓請拔去。 此雖出於援例, 而臣則以爲冤枉也。 臣取考禮曹謄錄, 曾在辛酉, 朱恒道以式年會試秘封, 不書姓貫年歲, 見拔, 而過殿試後, 因儒臣疏請, 追命復科。 今者尹汲, 旣居第二, 至經御手之親拆, 其視恒道, 不啻較重矣。 又於癸酉謁聖, 李寅熽秘封, 不書職銜, 試所請拔去, 而特命仍存。 今此尹汲之落書與寅熽之誤書, 似無間矣。 且沈埈之題字落書, 崔守慶之不踏小印, 係是外面之表著, 亦有後弊之所關, 而年久後猶許復科。 伊日試所, 非不知古例之可據, 而倉卒之間, 不能措辭啓稟, 致此徑先拔去, 可勝惜哉? 亟願聖明, 仰體肅廟之盛意, 俯察一人之至冤, 更詢于大臣而處之焉。
又曰:
比年以來, 八路荐飢, 良民爲盜, 至有張蓋呼唱, 殺越于貨者, 驪州、楊根等邑, 尤被其害。 宜別擇有風力武倅, 畀以勦捕之任。
又曰:
守令三年之窠, 變爲六年之窠, 今則三年之窠, 餘存者無幾。 曉達治理, 才具贍敏者, 率多見拘於年限, 虛老於散局。 宜遵舊制, 三年窠之爲六年窠者, 依前塡差, 漸次復舊也。
又曰:
近來贓法不嚴, 雖有犯科之人, 夤緣圖囑, 終歸淸脫。 臣謂從今以往, 事係貪贓, 而濫用田結者, 申飭兩銓, 永勿檢擧焉。
又曰:
朝紳中廉白可尙者, 令廟堂, 博訪精抄, 願加褒賞。 故參判臣李端錫, 淸白廉謹, 罕有其比。 宜特加褒贈, 收錄其奉祀之孫。
又曰:
武臣之厭避邊倅, 爲一痼弊。 三水一邑, 自夏至冬, 遞易甚多, 無一人往赴者。 臣謂親年已過, 獨子無兄弟者外, 圖遞不赴者, 一倂依法典定配。
又曰:
向日分館時, 洪得厚見漏於槐院。 宜以槐院例調用也。
又曰:
"壬寅僞勳陳賀也, 獨有微末蔭官之自守不參者, 至被削奪之律。 臣謂令該曹, 特加崇奬也。
批曰: "尹汲旣選高第, 至拆見拔, 予甚惜之。 今觀爾疏, 李寅熽與今尹汲事, 無異, 依寅熽例, 特爲復科。 武倅差遣事, 懲贓吏褒廉白事, 另飭銓曹, 李端錫之孫, 令錄用。 三水事, 日後厭避者, 依所請施行, 洪得厚事, 疏末崇用事, 竝依施。"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63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