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백성의 부역이 중복되는 폐단과 홍치중에 관한 이근의 상소문
지평(持平) 이근(李根)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먼저 ‘어진사람을 임용하려거든 의심하지 말고, 간사한 사람을 제거하려거든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이미 제적(諸賊)의 죄역(罪逆)이 도망하기 어려운 것을 아시면서도 반드시 용서해 주려고 하시는 것은 이름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이며, 정유(庭籲)1172) 하는 일을 미워하고 냉대(冷待)하면서도 삼사(三司)에 맡기는 것도 또한 이름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순천부(順天府) 여수(麗水)의 백성은 부역(賦役)을 거듭 부담하는 원망이 있으니, 대개 여수현(麗水縣)은 일찍이 수영(水營)의 설치로 인하여 처음에는 혁파(革罷)되었다가 그 뒤에 수영이 옮겨 설치되므로 다시 읍(邑)을 설치하지 못하고 그대로 순천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천에서는 이를 ‘속읍(屬邑)’ 이라 하고 수영에서는 이를 ‘구진(舊鎭)’ 이라 하여 많은 폐단이 함께 발생함으로 백성이 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곧 속히 품처(稟處)하여 여수의 백성이 부역을 거듭 부담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여야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흥양(興陽)에서는 종[奴]이 주인(主人)을 죽인 변고가 있었는데, 본고을의 원은 배반한 종의 뇌물을 몰래 받아 먹고 순영(巡營)에 속여서 보고하여 고한(辜限)1173) 이 이미 지난 것으로 핑계를 대어 강상(綱常)을 해친 자로 하여금 마침내 삼척(三尺)의 법에서 도망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고한(辜限)’ 이 어찌 종이 주인을 죽인 변고에 적용되겠습니까? 그때에 감사(監司)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수령(守令)을 잡아다 신문(訊問)하여 죄를 정하며, 빨리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관원을 정하여 명백하게 조사해 죄를 바로잡아서 윤상(倫常)을 바르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아간(亞諫)1174) 이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을 논척(論斥)할 때에 이진유(李眞儒)의 손을 잡고 이별했다느니, 역적 유봉휘(柳鳳輝)를 관용(寬容) 비호(庇護)하였다고 말한 것은 이미 전하여진 말에서 나온 것으로써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또 홍치중이 수립(樹立)한 바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근년에 조중우(趙重遇)가 흉소(凶疏)를 올렸을 때에 홍치중은 도승지(都承旨)로서 먼저 계사(啓辭)에 참여했고, 올봄에 부소(赴召)1175) 한 뒤로 연석(筵席)에서 주대(奏對)하는 것이나 국문(鞫問)하는 옥사(獄事)에서 죄상을 의논함에 있어 일찍이 일호(一毫)도 악역(惡逆)을 변명 비호(庇護)한 뜻이 있지 않았는데, 아간이 작은 결점을 샅샅이 찾아내어 그 중요한 부문을 숨기려고 한 것은 신(臣)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대간(臺諫)에 들어가던 처음에 먼저 탐리(貪吏) 두세 사람을 논핵하였으나, 성명(聖明)께서 마침내 한결같이 윤허를 아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백성을 해치면서 자신을 살찌게 한 형상은 남쪽에서 온 사람으로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말을 하고 있으니, 신이 어찌 사사로운 미움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곧 모두 체임(遞任)하여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요즈음의 일을 ‘이름 내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위와 아래의 심정과 뜻이 성실(誠實)하지 못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흥양(興陽)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수읍(數邑) 수령(守令)의 일에 내가 윤허를 아낀 것은 사실 자세히 살피는 데에 연유한 것이며, 그 가운데 이희담(李喜聃)은 일찍이 계방(桂坊)1176) 을 지냈으므로 내가 그의 사람됨을 대략은 아는데 그를 대단히 교활한 사람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여수(麗水)를 다시 현(縣)으로 삼고, 청컨대 수사(水使)로 하여금 겸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44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 [註 1172]정유(庭籲) : 궐정(闕庭)에서 호소함.
- [註 1173]
고한(辜限) : 보고 기한(保辜欺限)의 준말. 보고(保辜)는 남을 상해(傷害)한 사람에게 대하여 맞은 사람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처벌(處罰)을 보류하는 기간.- [註 1174]
○辛未/持平李根, 應旨上疏, 首以任賢勿貳, 去邪勿疑爲言, 又言:
殿下旣知諸賊罪逆之難逭, 而必欲容貸者, 好名也, 厭薄庭籲之擧, 而使之付諸三司者, 亦好名也。
又曰:
順天府 麗水之民, 有疊役之怨。 蓋麗水縣, 曾因水營之設, 始爲革罷, 厥後水營移設, 而不復設邑, 仍屬順天。 順天則謂之屬邑, 水營則謂之舊鎭, 百弊俱生, 民不奠居。 宜令廟堂, 卽速稟處, 以除麗民疊役呼冤之弊。
又言:
興陽有奴弑主之變, 而本官潛受叛奴貨賄, 瞞報巡營, 稱以辜限已過, 致令綱常之賊, 竟逭三尺之典。 所謂辜限, 豈可用於奴弑主之變哉? 其時監司從重推考, 守令拿問定罪, 亟令本道, 別定剛明官, 明覈正罪, 以正倫常焉。
又言:
亞諫之論斥兵判洪致中也, 以摻別眞儒, 容護賊輝爲辭, 而旣出傳說, 不可準信。 且致中所樹立, 亦不無可言者。 頃年趙重遇之投進凶疏也, 致中以都承旨, 首參啓辭, 今春赴召之後, 筵席奏對, 鞫獄議讞, 未嘗有一毫營護惡逆之意, 則亞諫之吹覓小疵, 欲掩其大關節者, 臣未知何意也。
又言:
臣於入臺之初, 首論貪吏數三人, 而聖明終靳一兪。 其人等蠧民肥己之狀, 南來之人, 有口皆言, 則臣豈有私惡而然哉? 伏願卽幷遞罷焉。
批曰: "應旨進言, 深用嘉尙。 近日事, 謂之好名, 上下情志之不孚, 一至此哉? 興陽事, 依施。 數邑守令事, 予之靳允, 實由詳審, 而其中李喜聃, 曾經桂坊, 予略知其爲人。 目之巨猾, 不亦過乎? 可以議處者, 令廟堂稟處。" 後, 廟堂覆奏, 以麗水復爲縣, 請使水使兼之, 上允之。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44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 [註 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