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참의 김조택이 윤지술을 배식하는 절목에 대하여 논하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지술(尹志述)을 배식(配食)하는 절목에 대해서는 예조에서 바야흐로 품계(稟啓)하려던 중입니다. 신이 숙묘(肅廟)계해년684) 에 특별히 내린 비망기를 상고해 보았더니,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당을 성균관(成均館) 곁에 세울 것을 명하셨습니다. 인하여 고금(古今)에 같이 제사지낼 수 있는 사람을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시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의논을 올려 찬동(贊同)하였고, 고(故)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은 동양(董養) 1인을 상고해 내어 임금의 요청에 답하였으니, 이것이 사현사(四賢祠)를 창설하게 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때 계성묘(啓聖廟)의 역사(役事)가 있었기 때문에 가을을 기다려 창설하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그 후에 국가에 일이 많아서 그럭저럭 폐각(廢閣)되었습니다. 경자년685) 의 대상(大喪) 때에 이 일은 이미 성지(聖誌)에 실렸으나 사당은 사실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윤지술이 속히 거행하라고 상소를 올려 청한 이유입니다. 성고(聖考)께서 사기(士氣)를 배양하시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마침내 윤지술과 같은 자가 나온 것이었고, 천만고(千萬古)에 민멸(泯滅)되지 않을 강상(綱常)을 세울 수 있었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전하께서도 그 공효(攻效)를 누리고 계십니다. 불행히 공역(工役)이 아직 끝나지 아니하여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는데, 저 군흉(群凶)들은 성고(聖考)의 처분에 대해서 반드시 머리부터 번복시킨 후에야 그만두려고 하였고, 윤지술에 대해서는 반드시 구살(構殺)한 후에야 그만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4년 동안에 다른 까닭 없이 그 역사를 폐지하여 사현이 아직도 향사(享祀)되지 못하였으니, 윤지술의 배식도 장차 지체될 것입니다. 마땅히 기일을 정하여 역사를 완성시키게 해서 성고(聖考)의 유의(遺意)를 허사로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전하의 성명(成命)도 폐각(廢閣)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조정의 사화(士禍)는 한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태학생(太學生) 중에 수립한 것이 사현과 같은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원하건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고사(古事)를 상고하고 공의(公議)를 채집하여 함께 배향할 만한 자가 있으면 한결같이 종사(從祀)할 수 있도록 하소서. 지난날 성교(聖敎)에, ‘윤지술에 대해서는 관학(館學)의 상소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전교하셨고, 임창(任敞)에 대해서는 윤지술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라고 전교하셨지만, 배식하라는 한 조항은 없었습니다. 관학의 상소는 신원(伸冤)·사제(賜祭)·배식(配食) 세 가지 일을 아울러 청하였는데, 사제 한 조항은 대신들이 미처 제기하여 품의(稟議)하지 못하였으나, 저 두 유생은 그 수립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그 억울함이 어떠하였습니까? 성상께서는 특별히 충의를 세우고 정절을 표창하는 방도를 진념하셔서 이런 신원(伸冤)하고 증직(贈職)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또한 일체로 사제(賜祭)하여 구천(九泉)에 있는 혼령을 위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태학(太學)의 옆에 사당을 세우라고 하신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이 이미 있었는데 아직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심히 슬프다. 함께 제사지낼 만한 사람을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어본 후에 예조로 하여금 선조(先朝)의 하교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임창(任敞)의 일 역시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02면
- 【분류】정론(政論) / 사상(思想) / 교육(敎育)
○禮曹參議金祖澤上疏。 略曰:
尹志述配食一節, 臣曹方將稟啓矣。 臣考肅廟癸亥, 特下備忘, 命立何蕃、陳東、歐陽澈祠於成均之傍。 仍命古今可同祀者, 議大臣, 先正臣宋時烈, 仰贊獻議, 故相臣金壽興, 考出董養一人, 以答上求。 此四賢祠, 所以創也。 以時有啓聖廟役, 有待秋之敎, 其後國家多事, 因循廢閣。 及庚子大喪, 此事旣載聖誌, 而祠實未成, 此志述所以疏請卽速擧行者也。 聖考之培養士氣若是, 故畢竟如志述者出, 而能樹千萬古不泯之綱常, 至于今日, 殿下亦食其效矣。 不幸工役未訖, 時事大變, 彼群凶, 於聖考處分, 必欲從頭翻覆而後已, 於志述, 必欲搆殺而後已。 四年之間, 無他端而廢其役, 四賢尙未入享, 則志述配食, 亦將遷就。 宜令刻期完役, 毋使聖考遺意歸虛, 殿下成命廢閣。 我朝士禍, 非止一二, 太學生有樹立如四賢者, 必有之。 願命儒臣, 考古事採公議, 如有可同享者, 得以一體從祀焉。 頃日聖敎, 於尹志述, 則以依館學疏施行爲敎, 於任敞, 則與志述一體施行, 但無配食一款矣。 館學疏, 旣竝請伸冤、賜祭、配食三事, 而賜祭一款, 大臣未及提稟。 彼兩生者, 其樹立何如, 其冤酷何如? 聖上特軫樹忠表節之道, 有此伸冤贈職之命, 亦宜一體賜祭, 以慰九地之魂。
批曰: "立祠太學之傍, 已有先朝成命, 尙今不行, 心甚慨然。 可以同祀之人, 問于大臣儒臣後, 令禮曹, 依先朝下敎擧行。 任敞事, 亦問于大臣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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