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원이 삼수(대급수·소급수·평지수)에 대하여 자세히 아뢰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가서 임인년584) 의 무옥(誣獄)을 소결(疏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이기익(李箕翊)·김유경(金有慶)·박사익(朴師益),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봉상(李鳳祥), 형조 참의(刑曹參議) 안중필(安重弼),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 집의(執義) 송필항(宋必恒), 응교(應敎) 신방(申昉), 장령(掌令) 이휘진(李彙晉)·김담(金墰), 지평(持平) 권적(權𥛚), 교리(校理) 홍현보(洪鉉輔)·서종섭(徐宗燮),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입시(入侍)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목호룡의 상변(上變)은 없는 사실을 꾸며서 만들지 않음이 없습니다. 정인중(鄭麟重)의 무리가 스스로 문인(文人)이라 일컬었으며, 목호룡도 또한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서로 교유하였는데, 목호룡은 실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심복(心腹)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모함하여 이이명(李頤命)과 그와 서로 친한 사람에게 미치도록 하였습니다. 정인중이 형가(荊軻)585) 에 대하여 읊은 시(詩) 같은 것은 바로 정인중이 젊었을 적에 지은 것으로 한때 전파되었었는데, 목호룡이 잡아당겨 형가와 섭정(聶政)586) 같은 사람을 구한다는 증거를 만들었으며, 이희지(李喜之)의 낙조시(落照詩)는 사물을 읊은 작품에 지나지 않는데도 목호룡이 부도(不道)의 말이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처음 공초 안에 이희지가 목호룡에게 둔갑(遁甲)하는 술수를 물은 것은 바로 목호룡을 처음 본 날이었으며, 계묘년587) 의 목호룡 초사에도 역시 이희지를 봉안역(奉安驛)에서 처음 보았는데 입에서 떨어지는 한 마디의 말도 국가에 화(禍)가 되는 말이 아님이 없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정인중 등이 목호룡에게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유(類)를 묻고, 김용택(金龍澤) 등이 백망(白望)을 대하여 세상에 유비(劉備)588) 같은 이가 없다는 말을 발설하여 각기 손바닥에다 글자를 쓰고, 이천기(李天紀)가 목호룡을 대하여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에 대한 말을 발설했다고 하였는데, 모두 초면(初面)에 서로 만나 보는 날의 묻고 대답한 내용입니다. 이희지 등이 이미 미치거나 본심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설사 불궤(不軌)의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바로 둔갑하는 술수와 나라에 화가 되는 말로 자객(刺客)을 찾아다니며 구하고, 유비(劉備)를 추대(推戴)하는 것과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 등의 말을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발설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럴 이치가 없습니다. 임인년 옥사(獄事)의 근원은 오로지 여기에 있었으니, 이밖의 지엽(枝葉)격인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모두 허망(虛妄)한 데로 돌아간 형상은 곧 이것에서도 아주 환하게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삼수(三手)’는 하나는 칼이고 하나는 약(藥)이며 하나는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고치는 것입니다. 칼에 대해서는 의금부에서 죄인의 죄상을 조사한 서류함 속에 비치하여 두었기 때문에 좌정(坐定)하여 국문할 때에 내보였는데 바로 자루가 부러진 쇠로 된 하나의 무딘 일반 칼이었으며, 요즈음 세상의 행객(行客)이 말 안장에 걸고 다니는 보통칼이었으므로 참여하여 앉아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며 웃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이것을 비수(匕首)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목호룡이 처음에는 두 척(尺)의 칼이라고 하였다가 그것을 찾아내어 보고서는 또 본래 한 척(尺)의 칼이라고 말하여 그의 말이 수시(隨時)로 변경되었으니, 더욱 웃을 만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이러한 등의 물건을 서로 빌리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인데, 이 일로 역적을 모의하였다고 한다면 세간(世間)에서 칼을 빌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다른 절박(節拍)589) 은 없었고 단지 한 자루의 칼을 찾아낸 것으로 장물(贓物)을 잡았다고 하면서 곧바로 김용택을 형벌하도록 청하는 단서로 삼았으니,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어찌 이와 같이 사리에 맞지 않는 역적 모의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의 허망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藥)에 대해서는 이헌(李瀗)의 초사에 이르기를, ‘이이명(李頤命)이 독약(毒藥)을 사가지고 와서 두 갈래로 나누어 주었는데, 한 파(派)는 서덕수(徐德修)에게, 한 파(派)는 이기지(李器之)·이천기(李天紀)의 무리였다.’고 하였으며, 서덕수의 초사에 이르기를, ‘은(銀) 3백 냥(兩)을 장세상(張世相)의 처소에 보냈는데, 장세상이 2백 냥으로 백망(白望)이 매수한 역관(譯官) 장씨 성(姓)을 가진 사람에게 샀다.’고 하였습니다. 서덕수가 이미 장씨 성의 역관에게서 샀다고 말하였다면 이는 정유년590) 에 사왔다고 하는 약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헌의 초사에서 이른바 이이명이 가지고 와서 두 갈래로 나누어 준 가운데 한 파(派)의 서덕수에게 주었다는 것은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김성절(金盛節)의 초사 안에, ‘정유년 사행(使行) 때 이기지 부자(父子)가 역관 장판사(張判事)란 자를 시켜 〈약을〉 사가지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사행에는 원래 장씨 성의 역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장 역관이 사가지고 온 약을 김 상궁(金尙宮)과 함께 모의하여 일차로 시험삼아 사용하였더니 곧바로 누런 물을 토해내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누런 물을 토해낸 것이 장 역관의 약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장씨 성을 가진 그런 사람은 원래 없었으며, 만약 이이명이 사가지고 온 약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591) 겨울에 있었고, 이이명의 사행은 신축년592) 봄에 되돌아 왔습니다. 김성절의 초사에 또 이르기를, ‘누런 물을 토해낸 뒤에 이기지의 무리가 약이 맹렬하게 독하지 않다고 여겨 다시 마땅히 은(銀)을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이기지가 그의 아비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갔다면 이것 또한 허망한 데로 돌아갔으며, 장씨 성의 역관은 이미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추문하니, 김성절이 또 홍순택(洪舜澤)을 지목하여 약을 사온 역관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순택이 정말로 약을 사온 사람이었으면 처음에는 어떻게 장씨 성의 사람으로 현저하게 고발하였다가 뒤에 변경시켜 홍씨라고 하였겠습니까? 포도청(捕盜廳)에서 또 홍순택의 종 업봉(業奉)을 찾아내어 잘 달래 가르쳐서 자복을 받았는데 종으로서 주인을 증거대는 것은 원래 법전(法典)에서 금지하는 바이니,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다른 것이야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홍순택은 끝내 자복하지 아니하고 죽었으며, 그의 숙부(叔父) 홍성주(洪聖疇)까지 엄중한 형신(刑訊)으로 조사하고 추문하였으나 끝내 자복을 받지 못하였으니, 홍순택이 약을 사가지고 왔다는 말도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약을 목호룡은 작기가 소합원(蘇合元) 같다고 하였으며, 정우관(鄭宇寬)은 크기가 콩알만하다고 하였고, 업봉(業奉)은 크기가 계란만 하나 조금 작다고 하였으며, 목호룡은 빛깔이 푸르다고 하였고, 이영(二英)은 누른 빛깔이라고 하였으며 업봉은 누렇고 검은 빛깔이라고 하였으니, 똑같은 약인데 그 모양과 빛깔이 어찌 이와 같이 각기 다르겠습니까? 약에 관한 일이 이제야 거짓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약을 사용한 한 조항은 이정식(李正植)의 초사 안에 ‘11월 무렵에 장세상이 말하기를, 「이소훈(李昭訓)이 독약(毒藥)을 마시고 바야흐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한다.」고 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소훈은 11월에 죽었습니다. 서덕수의 초사에는 ‘6월 무렵에 은 3백 냥을 장세상의 처소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독약을 구하도록 하여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시켜 음식에 타서 사용하게 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소훈이 6월에 죽었습니다. 6월과 11월은 이와 같이 서로 반대가 되며 더구나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계셨는데, 어떻게 동궁(東宮)의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허망한 것의 첫째입니다. 그리고 서덕수의 초사에는 ‘장세상을 시켜 은 2백 냥으로 독약을 구하도록 도모하였는데, 이 약은 장세상에게 구하도록 도모한 것이며 밖에서 보낸 것은 아닙니다.’ 하고, 정우관의 초사에는 ‘서덕수·김창도(金昌道)·이정식이 궤(樻) 가운데서 한 개의 봉(封)한 물건을 꺼내어 그로 하여금 장세상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약은 봉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틈을 기다려 장세상에게 전해 주었다고 하였으니, 이 약은 밖에서 보낸 것입니다. 두 사람의 초사가 이와 같이 서로 틀리니, 허망한 것의 둘째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약을 사용한 김 상궁(金尙宮)이 소훈(昭訓)의 이 궁인(李宮人)을 살해하였으나 끝내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 허망한 것의 셋째입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의 허망함은 알 수가 있으며, 이른바 평지수(平地手)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위조(僞造)하여 폐출(廢黜)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써 고발하였으나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은 지열(池烈)이었는데 자신이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뒤에는 백열(白烈)이가 되었고 백열이 자복하지 않고 죽으니, 그 뒤에 또 갑자기 궁성(宮城)의 호위(扈衛)하는 일을 꾸며내어 은연중 이것으로 폐출하는 일을 증거대려고 하면서 당시의 군흉(群凶)들이 청정(聽政)하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찬역(簒逆)하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으니, 그 뜻이 여러 신하들을 터무니없이 모함하는 데 두었을 뿐만 아닙니다. 궁성을 호위하는 것으로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것은, 생각건대 어찌 다분히 변명을 해야겠습니까마는, 김창도 등의 초사에 ‘애당초 소론(少論)을 쫓아내어 들어올 수 없게 하고 또 소장(疏章)을 거절하고 막아버리려는 계획이었다.’고 하니, 본래는 역적 모의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그 당시 국청(鞫廳)에서 기필코 역적 모의로 몰아넣으려 하니, 죄인들도 의향(意向)을 받들어 대부분 반역했다는 것으로 자복하여 이것으로 여러 대신들을 터무니없이 무함하려고 하였으니, 그 무리에게는 죽을 곳에서 도망갈 길을 찾는 계책이 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플 만합니다. 그 사이의 절차(節次)는 이삼(李森)이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 병사가 되었으며, 유취장(柳就章)은 중군(中軍)이 된 한 조항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삼이 충청 병사가 된 것은 실로 자신이 구한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은 온 조정에서 다 함께 아는 바인데, 이것이 역적 모의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말로 유취장을 중군으로 끌어다 함께 모의하려는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다면 당연히 유취장과 미리 계획을 도모하고 정녕코 서로 약속한 뒤에야 이삼을 내보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삼이 이미 나가고 유취장이 청촉(請囑)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유취장을 차임(差任)하였으며, 또 어찌 곧바로 유취장을 평안 병사의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하였겠습니까? 얽어서 배치한 계책이 정말 이와 같았겠습니까? 유취장의 초사 안에 12월 초5일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건명(李健命)의 집에 모여 호위하는 일을 모의하였다고 하였는데, 12월 초5일은 바로 이건명이 출강(出疆)593) 한 뒤였으니, 이것은 그 당시 국청에서도 허망함을 알고 다시 유취장에게 물으니 유취장이 즉시 그것은 속인 것이었음을 자복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단서를 들면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궁성 호위에 대한 한 가지 일이 이와 같이 거짓말로 돌아갔으니,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옥사(獄事)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삼수(三手)에 벗어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칼에 대한 일과 왕명을 위조(僞造)하는 일은 애당초부터 이미 귀착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저 무리들도 많은 지절(枝節)594) 들을 발생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유독 약에 대한 일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3년 동안 기필코 단련(鍛鍊)시키려고 하여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한 뒤에도 오히려 김씨 성(姓) 궁인(宮人)의 일을 버리지 않았으며, 전하께서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명백하게 하교(下敎)한 연후에야 비로소 정계(停啓)하였으니, 이 한 가지 사항도 마침내는 허망한 데로 돌아갔으며, 그사이 허다한 절막(節拍)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은(銀)을 모으는 한 가지 일은 저 무리들이 한 가지 큰 중요한 문제로 삼았기에 우선 신이 상세하게 아는 것으로 말하겠습니다. 우홍채(禹洪采)가 승복(承服)한 초사 가운데 황해도 병사가 성(城) 쌓을 물력(物力)을 얻으려고 청한 보장(報狀)595) 을 김성행(金省行)의 말로 그의 할아버지596) 에게 제급(題給)을 받았는데, 서목(書目)에는 조송(趙松)이 어느 곳에서 성첩(成貼)597) 하였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더욱 매우 맹랑(孟浪)합니다. 그 당시 신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대죄(待罪)598) 하였기에 이 일을 상세히 압니다. 최초로 물력을 얻으려고 청하였을 적에 대신(大臣)이 지급할 물력이 없다는 것으로 걱정하였는데, 신이 생각하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을 때에 황해 병영(黃海兵營)의 물력을 빌려다 썼으니 그 댓가로 서남(西南)에서 쌀 수천 석(石)을 환산하여 거두고 이 쌀로써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대신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신의 말대로 제급(題給)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물력이 이미 다 떨어졌다는 것으로 급히 보고하자 대신이 다시 신에게 물었는데, 신이 지금은 달리 지급할 재물이 없으니, 방제(防題)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고 하자 대신이 신의 말대로 방제목(防題木) 20동(同), 쌀 수백 석(石)을 비록 지급하려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나올 곳이 없었는데, 대신이 어떻게 제급을 허락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서목(書目)을 제송(題送)599) 할 때에는 반드시 당상관의 결재를 받아 여러 당상관에게 두루 보인 뒤에 돌려보내는 것은 비국(備局)의 규례(規例)입니다. 신이 어찌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사건만으로 관찰하건대, 그 허망됨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초사에 모두 은(銀)을 모아 국면(局面)을 바꾸려고 도모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대체로 국면을 바꾸려고 도모하는 것은 그 죄가 진실로 사형에 해당되지만, 이미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면 자신이 직접 도모한 외에 그 실정을 알고 고발하지 않은 경우는 당연히 사형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각 사람들이 이렇게 자복을 하면 혹시라도 살아날 방도가 있을 것으로 바라고 이에 여러 당상관의 의향을 받들어 더러는 사리에 맞지 않게 거짓으로 공초하였다가 승복(承服)한 뒤에 이르러서는 그 승복한 조건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일제히 모두 반역을 도모한 데 함께 참여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조율(照律)하였으니, 이와 같은 옥사(獄事)의 체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입니다.
그리고 신 등이 전후의 옥안(獄案)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고발한 사람의 말이 비록 대단하게 어긋나고 착오된 것이 있어도 하나도 목호룡에게는 힐책하여 묻지 않고 다만 고발당한 자에게만 핍박하며 묻는 것으로 일을 삼아, 오늘에 한 문목(問目)을 첨가하고 내일에 한 문목을 첨가하여 좌우에서 번갈아 신문한 것이 그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또 듣건대 형옥(刑獄)의 참혹하고 악독함은 차마 보지 못할 부분이 있었으며, 또 주장(朱杖)으로 좌우와 전후를 찌르고 때려 형신을 받아 죽은 사람의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창자가 겉으로 나오기도 하였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참혹하고 악독함이 이미 이와 같았다면 이 옥사에 말려든 자는 비록 입이 백개가 있더라도 그 누군들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3년 동안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서 살아나온 자가 거의 없고 죽은 자가 40인이나 많은 데 이르렀으니,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어찌 이와 같은 옥사가 있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이와 같은 것을 알고서 더러는 한재(旱災)로써 여러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더러는 노론(老論)을 모조리 처치하려는 계책이라고 하여 엄중히 배척하셨으니, 양 대신(兩大臣)이 화(禍)를 당하였을 적에 또한 도로 거두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선왕(先王)의 본심(本心)은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불쌍히 여겼음을 볼 수 있는데, 군흉(群凶)들이 극력 다투며 맞붙어 싸우느라 마침내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성덕(聖德)을 막아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 등이 모두 민진원(閔鎭遠)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대개(大槪)를 말하였는데,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뒤에 궁료(宮僚)를 인견(引見)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흉악한 말이 차마 듣지 못할 부분이 많았었다. 비록 필부(匹夫)라도 차마 더럽히고 욕되는 것을 그 몸에 더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내가 선조(先朝)에서 물려준 체통을 받고서 어떻게 차마 이런 더러운 이름을 당해야 하는가? 당론(黨論)이란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마는, 만고(萬古) 천하에 어찌 임인년600) 의 사건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만일 대행조(大行朝)의 지극한 인애와 융성한 덕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어떻게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목호룡의 변서(變書) 가운데 동궁(東宮)의 씻기 어려운 무함을 씻는다고 말하였는데, 실제로는 그가 씻기 어려운 이름으로써 나에게 더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단념하고 일찍이 상서(上書)한 적이 있었다. 역적 목호룡이 이미 나에게 음흉한 말로써 더하였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신하가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해야 옳은데, 다만 이 일단(一段)을 빼버리도록 청하였으니, 빼버린다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은 말이 되지마는, 실제로는 나를 암담(黯黮)한 가운데다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 계책이 더욱 교묘하므로, 만일 끝까지 추문하려고 하면 옥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단지 빼버리도록 청하였다고 하니, 그가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사책(史冊)의 내용일지라도 만일 이러한 말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인데, 나 자신이 도리어 이렇게 망측(罔測)한 무함을 당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김일경(金一鏡)의 신축년 상소도 목호룡의 변서(變書)와 마찬가지이다. 진신(搢紳)의 상소라고 하는 것은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단지 7인만으로 그쳤는데도 진신(搢紳)의 상소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들 가운데서도 어찌 그 흉악하고 참혹한 것을 아는 자가 없겠는가마는, 김일경의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김일경의 상소를 동궁을 위하는 상소라고 말한 자는 바로 요사스런 박상검(朴尙儉)이 교묘하게 못된 계책으로 농락하는 말이었으니, 이것이 내가 그의 죄를 대행조(大行朝)에 청하게 된 까닭이었다. 만일 대행왕(大行王)의 우애(友愛)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날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박상검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변서(變書)가 나와 한편의 조정 신하들을 모두 도륙(屠戮)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으니, 참혹하도다. 삼수(三手) 가운데 이른바 칼에 대해서는 어찌 이것을 반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추안(推案)을 열람하면서 칼을 주었다는 조목을 보고 이미 의심을 하였었는데, 이제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사람이 서로 칼로 선물하는 자가 많은데, 이것은 김용택(金龍澤)이 우연히 백망(白望)에게 칼을 준 것에 불과한데 목호룡이 이 일로 인해서 모아다 만든 것이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칼에 대한 말은 이미 터무니 없는 데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藥)으로 말한다면 사실과 틀리는 것이 매우 심하다. 이소훈(李昭訓)이 죽은 것은 원래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으니 허망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지열(池烈)에 이르러서는 선조(先朝)의 늙은 상궁(尙宮)이다. 그가 늙은 궁인(宮人)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기에 반역을 하였겠는가? 마침 목호룡의 아는 바가 되어 그것으로 인하여 증거를 삼았는데, 그가 어찌 감히 국상(國喪)을 틈타 왕명을 위조(僞造)하겠는가? 또 그 당시 이미 죽어 뼈만 남은 뒤에 아무리 반역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있겠는가? 궁성(宮城) 호위(扈衛)에 대한 말은 물의(物議)로 관찰하건대 이미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는데, 지금 또 들으니 더욱 그 허망됨을 알겠다. 거짓으로 고(告)하는 자가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망령되게 온전히 살기를 바라서 오로지 죄를 여러 신하들에게 돌리면서 스스로 벗어날 계책을 삼는 데 이르렀다면, 그 실정과 태도가 매우 가슴 아프다. 거짓으로 자복한 자는 거론(擧論)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한 가운데서도 그 정상(情狀)을 캐어보면 각자가 동일하지 않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박사익(朴師益)은 말하기를,
"거짓으로 고한 자는 죽을 곳에서 도망갈 곳을 찾아 다른 사람을 무함하고 해치게 하였으며, 거짓으로 자복한 자는 말이 비록 얕고 깊음의 같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大體)는 모진 고초를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문목(問目)의 사연(辭緣)을 지만(遲晩)한 것으로 승복(承服)하였다고 하면서 결안(結案)한 것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김용택(金龍澤)의 결안(結案)입니다. 그에 연좌되어 적몰(籍沒)된 경우는 모두 마땅히 도로 거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정인중(鄭麟重)·심상길(沈尙吉)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정인중(鄭麟重)은 손바닥에 ‘나라 국[國]’ 자를 썼는데, 이것이 어찌 반역이 되겠는가? 심상길(沈尙吉)은 김용택(金龍澤)과 잘못 교유(交遊)한 것으로 공초를 바쳤으니, 역시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다.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유경(金有慶)이 말하기를,
"조흡(趙洽)·김성절(金盛節)·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는 당연히 무고(誣告)로 논단(論斷)해야 합니다."
하였다.
김민택(金民澤)·이천기(李天紀)에 이르러서는 석방하도록 명하고, 백망(白望)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으니,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장세상(張世相)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장세상은 죽은 뒤에 승복(承服)했다는 말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졸(羅卒)을 추문(推問)한 뒤에 처분(處分)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지열(池烈)·이영(二英)에 이르러 모두 석방하도록 하고, 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호위(扈衛)에 대한 일은 제가 스스로 부도(不道)한 말을 했으면 무고한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형률로 주벌하는 것은 그 자신에 그치고 연좌(緣坐)된 자는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덕수(徐德修)에 이르러 임금이 초사(招辭)를 거짓으로 하여 무고(誣告)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단지 그에 연좌된 자들만 석방하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은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했는데, 고발당한 사람에게 초사를 받은 뒤에 대질(對質)을 시키지 않고 석방하여 보내고 정우관은 잇따라 형신(刑訊)하여 거짓 자복을 받았으니 무고로 논할 수 없습니다. 김일관(金一寬)은 다만 말하기를, ‘창문의 틈으로 이기지(李器之)가 김성행(金省行)을 책망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은 사람이 반역을 도모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고로써 결단할 수 없으니, 정우관(鄭宇寬)과 일체로 석방하게 하고 연좌되어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진(沈搢)이 승복한 것은 그가 공초한 바가 아닌데 죽은 뒤에 형률을 집행하였으며, 이헌(李瀗)은 김성절(金盛節)로 인하여 교통(交通)한 일을 들은 것에 불과하니 무고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정우관(鄭宇寬)과 똑같이 논죄하고 유취장(柳就章)은 무고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극복(金克復)의 죽음은 가장 원통합니다. 그의 초사에 다만 이우황(李宇恒)이 임금의 환후(患候)를 걱정하고 대신(大臣)의 말을 염려한 것으로 묻는 데 따라 대답한 것을 난언(亂言)이라고 하면서 형(刑)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우항의 초사에는 ‘김창도(金昌道)는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가 조송(趙松)을 시켜 장세상(張世相)에게 은(銀)을 주었다.’고 하였다.’ 하고, 목호룡(睦虎龍)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601) 가 은(銀)을 모아 장세상에게 주었다.’고 하니, 말이 이미 서로 어긋나며, 국청(鞫廳)에서 이우항은 병(病)이 위중한 죄인이라고 하여 잡아오는 무렵에 형(刑)의 집행을 정지하도록 계청(啓請)하였었는데, 겨우 하루가 지나 죄인을 미처 잡아오지도 않고 갑자기 지만(遲晩)으로 초사를 받았다고 일컫고 이내 물고(物故)한 계문(啓聞)을 들여보냈으니, 이른바 지만(遲晩)은 분명히 장차 죽이려 할 때에 억지로 받아낸 것입니다."
하니, 김극복(金克復)에게는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을 돌려주도록 하고, 이우항(李宇恒)은 나졸(羅卒)을 끝까지 추문하기를 기다린 후에 복관(復官)시키도록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명좌(李明佐)·우홍채(禹洪采)·양익표(梁益標)·김창언(金昌彦)은 모두 거짓으로 자복하였으니, 무고(誣告)한 사례에 있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모두 석방하고 연좌(緣坐)된 사람의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은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김민택(金民澤)·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와 그 나머지 직명(職名)이 있는 자로 조송(趙松)을 제외하고 모두 복관(復官)시키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홍순택(洪舜澤)의 죽음은 나라 사람들이 더욱 가련하게 여깁니다. 단지 사행(使行)으로 함께 갔다는 것 때문에 곤장을 맞아 죽는 데 이르렀으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윤각(尹慤)이 은(銀)을 내었다는 말은 조흡(趙洽)의 무고(誣告)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각(尹慤)과 유성추(柳星樞)는 그 당시 옥사를 다스린 대신의 말로 보더라도 그 원통함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수민(李壽民)은 선조(先朝)에서 오래 섬긴 장수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귀양가서 죽었으니 복관(復官)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조흡(趙洽)을 무고(誣告)로 논단(論斷)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인년602) 의 옥사(獄事)는 이미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재해(災害)에 빠뜨린 것을 알았으니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목호룡(睦虎龍)을 단록(單錄)한 것이라 하더라도 녹훈(錄勳)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로 보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옥안(獄案)이 번복되었으니, 훈적에서 삭제하는 것은 다음 차례의 일이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회맹제(會盟祭) 때 자급(資級)을 올려 준 사람도 도로 거두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른바 토역과(討逆科)603) 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명분과 실상이 있으니 이미 그 훈적에서 삭제하였으면 그 실상이 없는 것인데, 그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고,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이미 훈적에서 삭제한 뒤의 토역과는 바로 〈가죽이 다 해진 데〉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역시 틀림없이 전혀 옥사(獄事)의 곡절을 모르는 자가 있을 터이니, 모두 삭제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공자(孔子)의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파방(罷榜)604) 하도록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훌륭하니, 과거를 삭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원 등과 대신(臺臣)이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의 단련(鍛鍊)한 죄를 명백히 바로잡기를 청하니, 임금이 삭출(削黜)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만약 반좌(反坐)의 형률을 적용한다면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도 가볍지만, 그 가운데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간 사람을 어찌 심하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휘진(李彙晉)이 말하기를,
"무옥(誣獄)을 단련(鍛鍊)하고 성상을 무함한 사람을 엄폐하여 두는 것은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괴수가 아니고 앉아서 지시하고 사주한 자가 진짜 괴수입니다."
하고, 권적(權𥛚)은 말하기를,
"비록 말감(末減)605) 한다 하더라도 변방에 귀양 보내는 것에 해당합니다."
하고, 송필항(宋必恒)은 말하기를,
"4대신(四大臣)을 없는 죄를 씌워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 가운데 감히 말하지 못할 지위에 무함이 미친 것은 끝내 역적 목호룡에게 끝까지 캐어 추문하지 아니하고 단지 무함하며 핍박한 말만 빼버리도록 청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는 것입니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덕전(韓德全)은 말하기를,
"기사년606) 의 옥사(獄事)는 임인년607) 의 옥사에 비교하면 조금 차별이 나겠지만, 숙종(肅宗)께서 바로 역적 민암(閔黯)을 가두고 옥사를 다스린 사람을 차례로 논죄(論罪)하였는데 더구나 이 옥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한 것이 가볍고 헐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3년 동안 옥사를 다스린 신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귀양 보내는 것이 비록 악(惡)을 징계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상(氣象)이 어찌 매우 슬프지 않겠는가? 그 중에 더욱 몹시 마음 아픈 것은 정국(庭鞫)608) 에서 본부(本府)609) 로 옮겨서 설치한 것은 대체로 마음대로 단련(鍛鍊)하려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다. 정국(庭鞫)할 때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은 모두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본부(本府)로 옮긴 뒤의 여러 신하들은 임인년 겨울을 기한하여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린 신하를 이미 변방으로 귀양 보냈으니 위관(委官)610) 은 비록 벌써 죽었다 하더라도 추탈(追奪)611) 을 시행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관(委官)을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죽은 사람에게 추탈(追奪)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김담(金墰)은 말하기를,
"선인문(宣仁門)612) 으로 몰래 들어갈 때에 이미 흉악한 마음이 있었는데 추탈(追奪)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옛날부터 사화(士禍)를 만든 자로 김안로(金安老) 같은 이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형(死刑)을 내렸고, 남곤(南袞)·심정(沈貞)은 모두 추탈(追奪)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무리들의 죄는 다만 사화(士禍)를 일으켰을 뿐만이 아니잖습니까?"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조금전의 하교(下敎) 가운데 목호룡(睦虎龍)이 전하에게 누명(累名)을 씌웠는데도 토주(討誅)를 청하지 아니하고 ‘추문하지 말라’는 두 글자로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고 했다는 것은, 이것은 인신(人臣)의 어떠한 죄악인데 그래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있어 자신의 일이 되기 때문에 죄를 다스리고 싶지 않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처분(處分)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난번에 간흉(奸凶)이 터무니 없는 사실을 꾸미고 단련(鍛鍊)하여 대신(大臣)을 주살(誅殺)하였기 때문에 시비(是非)를 밝히려는 것이지, 유봉휘(柳鳳輝)의 상소에 대하여 노여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유중무(柳重茂)의 죄상(罪狀)은 결코 석방하여 내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중무는 다른 죄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임인년에 옥사를 다스린 것으로 귀양 보내는 가운데 들어 있다."
하였다. 이교악(李喬岳)은 말하기를,
"임인년의 정국(庭鞫)을 본부(本府)로 옮겨 설치하였을 때에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을 이미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셨는데, 국문(鞫問)에 참여한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릴 때에 위관(委官)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이 주장하였는데,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곁에서 구경만 하였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문랑(問郞)613) 은 완의(完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승지(承旨)와 대관(臺官)은 완의(完議)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체(一體)로 먼 곳에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치중(洪致中)이 소결(疏決)하는 차례를 낭독하기를,
"박희진(朴熙晉)·박장윤(朴長潤)·이제(李濟)·양성규(梁聖揆)·윤연(尹㝚)·이광도(李廣道)·이경열(李景說)·김시엽(金始燁)·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여선장(呂善長)·윤유(尹游)·이승원(李承源)·이사상(李師尙)·신윤정(申潤廷)·하윤원(河潤遠)·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윤취상(尹就商)·이중술(李重述)·신경제(申慶濟)·이공윤(李公胤)·이거원(李巨源)·이진순(李眞淳)·권익관(權益寬)은 모두 그대로 두고, 김수천(金壽天)·학손(鶴孫)·박후응(朴厚應)·황보겸(皇甫謙)·이지규(李志逵)·황상정(黃尙鼎)·이명룡(李命龍)·서윤흥(徐允興)·홍성주(洪聖疇)·문덕린(文德麟)·홍언도(洪彦度)·김시정(金時鼎)·이경(李坰)·오명준(吳命峻)·이봉명(李鳳鳴)은 모두 석방한다."
하였는데, 이지규(李志逵)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지규는 젊어서 올바른 행위로 칭찬을 받았으며, 80년 동안 굶주림을 참아가며 글을 읽은 어진 선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시기를 당하여 이와 같은 일을 힘써 하였으니, 기절(氣節)을 높게 여길 만하다."
하고, 이에 서용(敍用)하여 관질(官秩)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형조(刑曹)의 죄인 가운데 박지혁(朴趾赫)은 석방하게 하고, 허벽(許壁)과 최탁(崔鐸)은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이의연(李義淵)의 아들 이기금(李岐金)의 일에 이르러 민진원이 원통함을 씻어 주도록 청하고, 권적(權𥛚)도 잇따라 청하니, 이기금을 석방하고 적몰한 가산을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불쌍히 여기는 은전을 가하도록 청하니, 안중필(安重弼)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죄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데, 어찌 유독 이의연(李義淵)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疏)의 내용이 끝까지 온화한 마음이 부족하였다."
하자, 김담(金墰)은 말하기를,
"초야(草野)에 있는 〈인사(人士)의〉 말은 거만합니다. 설령 말이 온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어찌 죄로 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사람들은 모두 대행조(大行朝)를 핍박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벌을 시행하게 되었었으나, 어찌 갑자기 죽는 데 이르게 될 줄을 헤아렸겠는가? 생각하니 불쌍하게 여길 만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엾이 여기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90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584]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585]
형가(荊軻) : 전국 시대의 자객 이름.- [註 586]
섭정(聶政) : 전국 시대의 자객 이름.- [註 587]
계묘년 : 1723 경종 3년.- [註 588]
유비(劉備) : 촉한(蜀漢)의 소열 황제(昭烈皇帝).- [註 589]
절박(節拍) : 끝을 막음.- [註 590]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591]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註 59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593]
출강(出疆) : 왕명을 받아 사신으로 외국에 감.- [註 594]
지절(枝節) : 곡절(曲節)이 많은 사단(事端)의 비유.- [註 595]
보장(報狀) : 보고장(報告狀).- [註 596]
그의 할아버지 : 김창집.- [註 597]
성첩(成貼) : 문서에 관인을 찍음.- [註 598]
대죄(待罪) : 관리가 그 관직에 있는 것을 겸손하여 이르는 말.- [註 599]
제송(題送) : 어떤 사건에 대하여 지령문(指令文)을 써 보냄.- [註 60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601]
이 지사(李知事) : 이우항.- [註 602]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603]
토역과(討逆科) : 역적을 토주(討誅)한 뒤 특별히 보이는 과거(科擧).- [註 604]
파방(罷榜) :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는 일.- [註 605]
말감(末減) : 형벌을 감하여 죄의 등급을 가볍게 하여 주던 것.- [註 60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607]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608]
정국(庭鞫) : 대궐 안에서 죄인을 신문하는 일.- [註 609]
본부(本府) : 의금부.- [註 610]
위관(委官) :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의 의정 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장.- [註 611]
추탈(追奪) : 죽은 뒤에 그 사람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 [註 612]
선인문(宣仁門) : 창경궁의 동문.- [註 613]
문랑(問郞) : 조선조 때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 주는 일을 맡아 보던 임시 벼슬. 문사 낭청(文事郞廳).○上御時敏堂, 疏決壬寅誣獄。 右議政閔鎭遠、判義禁洪致中、同義禁李箕翊ㆍ金有慶ㆍ朴師益、刑曹參判李鳳祥、參議安重弼、承旨李喬岳、執義宋必恒、應敎申昉、掌令李彙晋ㆍ金墰、持平權𥛚、校理洪鉉輔ㆍ徐宗燮、正言韓德全入侍。 鎭遠曰: "虎龍上變, 無非空中粧撰。 鄭麟重輩, 自稱文人, 虎龍亦以文學得名故相交, 而虎龍實鏡賊心腹也。 必欲構陷, 以及於李頣命及其相親之人。 如麟重詠荊軻詩, 卽麟重少時作, 傳播一時者, 而虎龍攬作求荊、聶之證, 如喜之落照詩, 不過詠物之作, 而虎龍以爲不道之說。 若此者, 不可勝道。 且虎龍初招內, 李喜之問虎龍以遁甲之術者, 卽初見虎龍之日也, 而癸卯虎龍招亦曰, 初見喜之於奉安驛, 則片言脫口, 無非禍國之語。 又鄭麟重等問虎龍以荊軻、聶政者類, 金龍澤等對白望, 發世無劉備之語, 各書掌中字, 李天紀對虎龍發大、小急手之語, 皆初面相見之日, 問答說話。 喜之等旣非病風喪心之人, 則設有不軌之心, 乃以遁甲之術, 禍國之語, 訪求刺客, 推戴劉備及大、小急手等說, 遽發於初見之人, 萬無其理。 壬獄根柢, 專在於是, 則此外枝葉千言萬語, 盡歸虛妄之狀, 卽此判然無疑。 所謂三手, 一則劍也, 一則藥也, 一則乘喪矯詔也。 劍則置在禁府推案櫃中, 故鞫坐時出見之, 卽一柄折鐵澁之常劍, 近世行客掛鞍之凡刀也, 參坐諸人見之, 莫不駭笑。 以此謂之匕首, 萬不近似。 且虎龍初以爲二尺劍, 及其搜得而見之, 則又曰本是一尺劍。 其言之隨時變幻, 尤可笑。 凡人以此等物相借, 自是例事。 以此謂之謀逆, 則世間無借劍之事矣。 其時無他節拍, 而只以一劍搜得, 謂之贓物被捉, 直爲龍澤請刑之端。 古今天下, 安有如此齟齬之逆謀乎? 所謂大急手之虛妄, 可知也。
藥則李瀗招曰: ‘李頣命買得毒藥持來, 兩岐分給, 一泒則德修也, 一泒則器之、天紀輩也。’ 徐德修招曰: ‘以銀三百兩, 送世相處, 世相以二百兩, 買得於白望所買之譯官張姓’ 云。 德修旣曰買得於張姓譯官, 則是指丁酉買來云云之藥也。 然則瀗招所謂頣命持來, 兩岐分給中, 一泒德修者, 歸虛矣。 金盛節招內, ‘丁酉年使行時, 器之父子, 使譯官張判事者, 買得持來’ 云, 其行元無張姓譯官。 又張譯買來之藥, 與金尙宮同謀, 一次試用, 旋卽吐出黃水云。 若曰黃水吐出, 由於張譯之藥, 則張姓元無其人; 若曰由於李頣命買來之藥, 則黃水吐出, 在於庚子冬, 而頣命使行, 辛丑春回還。 盛節招又曰: ‘黃水吐出後, 器之輩以爲藥不猛毒, 更當聚銀買得他藥’ 云, 而其時器之隨其父赴燕, 則此亦歸虛, 張譯旣無其人, 故以此更推, 則盛節又指洪舜澤, 爲買藥譯官。 舜澤, 果是買藥之人, 則初何以張姓人現告, 而後變爲洪耶? 捕廳又覓出舜澤之奴業奉, 敎誘取服, 而以奴證主, 元是法典所禁。 此猶如此, 他尙何說? 舜澤終不服而死, 竝與其叔聖疇, 嚴刑究問, 而終不能取服, 則舜澤買藥之說, 亦歸虛矣。 且其藥, 虎龍則以爲小如蘇合元, 宇寬則以爲大如大豆, 業奉則以爲大如鷄卵而差小, 虎龍則以爲色靑, 二英則以爲黃色, 業奉則以爲黃黑色。 同是一藥, 則其刑色何如是各異耶? 藥事於是乎落空矣。 其所謂用藥一款, 李正植招內, ‘十一月間世相曰: 「昭訓飮毒藥, 方欲絶命」 云。’ 是昭訓十一月死也。 德修招則六月間, 以銀三百兩, 送世相處, 使之圖得毒藥, 使東宮廚房內人李氏, 和飮食用之云, 是昭訓六月死也。 六月、十一月, 如是相反, 而況辛丑六月, 殿下方在潛邸, 豈有東宮廚房乎? 虛妄一也。 德修招, 則使世相, 以銀二百兩圖得毒藥。 是藥自世相圖得, 非自外送之也。 宇寬招, 則德修、昌道、正植, 於樻中, 出一封物, 使渠傳給世相云, 是藥封, 故渠持入闕中, 待其無人, 傳給世相云。 是藥自外送之也。 兩招如是相左, 虛妄二也。 所謂用藥之金尙宮, 殺昭訓之李宮人, 終未有其人, 則虛妄三也。 所謂小急手之虛妄, 可知也。 至於所謂平地手, 初則以乘喪矯詔, 爲廢黜之事發告, 而此事主張之人, 是爲池烈, 而身死已久, 則後爲白烈。 白烈不服而死, 則其後又忽粧出宮城扈衛事, 隱然欲以是證廢黜事, 而當時群凶, 以聽政一事, 驅之簒逆之科, 其意不但在構陷諸臣而已。 其以宮城扈衛, 爲謀逆之事者, 顧何足多辨, 而昌道等之招, 初以爲驅逐少論, 使不得入, 且欲拒塞疏章之計云, 本不關於謀逆, 而其時鞫廳, 必欲驅之於逆謀, 則罪人等, 承望風旨, 多以逆納款, 欲以此構陷諸大臣, 而爲渠輩死中求生之計, 誠可痛也。 其間節次, 則不過以李森出爲忠兵, 柳就章爲中軍一款而已。 森之爲忠兵, 實出於自求。 此則通朝所共知, 此何關於逆謀乎? 況果欲引就章於中軍, 以爲同謀之地, 則當與就章, 預爲謀計, 丁寧相約而後, 乃出森, 何待森旣出, 就章請囑而後, 始差就章, 又何以旋擬就章於平兵首望乎? 綢繆布置之謀, 果如此乎? 就章招內, 十二月初五日, 諸大臣會于李健命家, 謀爲扈衛事云, 而十二月初五日, 卽健命出疆之後也。 此則其時鞫廳, 亦知其虛妄, 更問就章, 則就章卽服其誣罔。 擧此一端, 他可推知。 宮城扈衛一事, 又如是落空, 則所謂平地手者, 虛妄可知也。 此獄肯綮, 不出乎三手, 而其中劍事、矯詔事, 自初已無着落, 故渠輩亦不能生出許多枝節, 而獨以藥事, 始終三年, 必欲鍛鍊, 至殿下嗣服之後, 猶不捨金姓宮人事, 而殿下以實無其人, 明白下敎, 然後始爲停啓。 此一款, 畢竟亦爲歸虛, 則其間許多節拍, 無非虛妄。而其中聚銀一事, 渠輩以爲一大關捩。 姑以臣所詳知者言之, 禹洪采承服招中, 黃兵築城物力請得之報狀, 以金省行言, 得題於其祖, 而書目, 則未知趙松成貼於何處云者, 尤極孟浪。 其時臣待罪有司堂上, 詳知此事。 最初請得物力也, 大臣以無可給之物憂之, 臣以爲北漢築城時, 貸用黃兵物力, 其代作米數千石於西南, 以此米給之爲可云, 大臣稱善, 依臣言許題。 其後又以物力已盡告急, 大臣復問於臣, 臣以爲今則無他可給之財, 防題之外, 無他策。 大臣依臣言, 防題木二十同、米數百石。 雖欲給之, 實無出處, 大臣何以許題? 況書目題送時, 必受押於堂上, 遍示諸堂上而後回送者, 備局規例也。 臣豈有不知不聞之理乎? 只以此事觀之, 其虛妄若是, 則他又可知矣。 且各人之招, 皆以聚銀圖換局面爲言, 夫圖換局面, 其罪固當死, 而旣非謀逆, 則身親爲之者外, 若其告情不知者, 則宜不至於死, 故各人冀其以此承款, 或有可生之道, 於是, 承望諸堂之風旨, 或爲胡亂之誣招, 及其承服之後, 則不問其承服條件之如何, 一倂以同參謀逆, 結案照律, 似此獄體, 前古所無。
且臣等細究前後獄案, 則告者之言, 雖有大段違錯, 一不詰問於虎龍, 惟以迫問被告者爲事, 今日添一問目, 明日添一問目, 左右迭問, 不一其端, 而且聞刑獄之慘毒, 有不忍視。 又以朱杖, 衝撞左右前後, 刑死之人, 脅骨皆折, 腸子露出。 治獄之慘毒, 旣如是, 則入于此獄者, 雖有百喙, 其誰脫出乎? 是以, 三年爲獄, 生出者無幾, 死者至四十人之多, 古今天下, 安有如許獄事乎? 先王知其如是, 或以旱災命放諸囚, 或以盡打老論之計嚴斥之, 兩大臣之被禍也, 亦降還收之命。 可見先王本心, 愍惻於多人之枉死, 而群凶力爭角戰, 終使好生之聖德, 壅遏而不行, 可勝痛哉?" 上曰: "諸臣之意如何?" 判義禁洪致中等, 皆如鎭遠言。 上曰: "今日備忘, 已言大槪, 而虎龍上變後, 有引見宮僚事矣。 其後凶言, 多不忍聞。 雖匹夫, 猶不忍以汚辱加於其身。 況予受先朝遺體, 其何忍當此汚衊之名乎? 黨論何代無之, 而萬古天下, 豈有如壬寅事者? 如非大行朝至仁盛德, 今日廷臣, 豈有得全者? 虎賊變書中, 乃曰洗東宮難洗之誣, 而實則渠以難洗之名, 加之於予也。 其時予則自畫, 曾有上書矣。 賊虎旣加予以陰凶之言, 則按獄之臣, 請治可也, 而只以拔去此一段爲請。 拔去云者, 外爲好言, 而實欲置予於黯黮中也。 其計尤巧。 如欲究問, 則獄事不成, 故只請拔去, 其可忍此哉? 雖史冊上, 如有此說, 則予不欲見, 豈意於予身, 反受此罔測之誣乎? 鏡之辛丑疏, 與變書一也。 搢紳疏云者, 滿朝同參之謂也, 只止七人, 而謂之搢紳疏何也? 彼中亦豈無知其凶慘者, 怵於鏡之威勢, 無一人言者。 以鏡疏謂之爲東宮疏者, 卽妖儉幻弄之說也。 此予之所以請其罪於大行朝者也。 如非大行王友愛, 則何能有今日? 儉事不成, 變書乃出, 一邊廷臣, 盡欲屠戮而後已, 慘矣! 三手中所謂劍者, 豈可以此謂之逆乎? 頃閱推案, 見贈劍條, 固已疑之, 今聞大臣之言, 誠可笑也。 人之相贈以劍者多矣。 此不過龍澤, 偶以劍贈白望, 而虎龍, 因以湊成者也。 以此言之, 劍之一說, 已落空矣。 以藥言之, 爽實尤甚。 昭訓之死, 元無可疑之端, 虛妄極矣。 至於池烈, 先朝老尙宮也。 渠以老宮人, 有何希冀, 而乃爲逆耶? 適爲虎所知, 因以爲證, 渠安敢乘喪矯詔耶? 且其時, 已死旣骨之後, 雖欲爲逆, 得乎? 宮城扈衛之說, 以物議觀之, 已知其誣, 今又聞之, 益知其妄矣。 至若誣告者, 承望風旨, 妄希生全, 專欲歸罪於諸臣, 以爲自脫之計, 其情態絶痛。 誣服者, 勿爲擧論, 可也。" 鎭遠曰: "誣服之中, 原其情狀, 各自不同, 亦不可一槪論矣。" 朴師益曰: "誣告者, 死中求生, 陷害他人也。 誣服者, 言雖有淺深之不同, 要不勝毒楚而然也。" 上曰: "以問目辭緣遲晩, 謂之承服而結案者, 天下安有是耶?" 鎭遠曰: "此所謂金龍澤結案也。 其緣坐籍沒, 皆當還收矣。" 許之。 至鄭麟重、沈尙吉, 上曰: "麟重掌中書國字, 是豈爲逆? 尙吉以誤交龍澤納招, 亦非誣告也。 皆放。 金有慶曰: "趙洽、金盛節、李正植、金昌道, 則當以誣告論斷矣。" 至金民澤、李天紀, 命放, 至白望, 上曰: "尤無可論, 放之可也。" 至張世相, 鎭遠曰: "世相, 死後承服之說, 人言藉藉矣。" 上曰: "推問羅卒後, 當處分矣。" 至池烈、二英, 皆放, 至李正植、金昌道, 上曰: "扈衛事, 渠自爲不道言, 當置誣告中, 而律, 誅止其身, 緣坐者放之。" 至徐德修, 上以招辭誕妄, 難免誣告, 只放其緣坐。 鎭遠曰: "鄭宇寬, 獄中告變, 而被告人捧招後, 不爲對質而放送, 宇寬則連刑取誣服, 不可以誣告論矣。 金一寬只曰: ‘從窓隙聞李器之責金省行之言’ 云矣。" 上曰: "所聞者, 非謀逆之言云爾, 則不可以誣告斷之, 與鄭宇寬, 一體放, 緣坐給籍産。" 鎭遠曰: "沈榗承? 禲 非渠所供, 而死後行刑, 李瀗不過因盛節, 得聞交通之事云, 不可以誣告論矣。" 命與宇寬同論, 柳就章以誣告施行。 鎭遠曰: "金克復之死最冤。 其招只以李宇恒憂上候慮大臣之言, 隨問隨答, 謂之亂言而行刑。 李宇恒招, 以金昌道言: ‘李器之使趙松, 給銀於世相’, 虎龍言: ‘李知事聚銀給世相’, 言旣相左。 鞫廳以宇恒病重, 罪人拿來間, 停刑啓請, 而纔過一日, 罪人未及拿來, 而猝稱遲晩取招, 仍入物故啓。 所謂遲晩, 明是勒捧於將死時也。" 命給克復籍産, 宇恒, 待究問羅卒, 然後復官。 鎭遠曰: "李明佐、禹洪采、梁益標、金昌彦, 皆誣服, 似不在誣告例矣。" 命竝放, 緣坐還籍産。 鎭遠請金民澤、白時耉、李尙 、金時泰, 其餘有職名者, 趙松外皆復官, 從之。 鎭遠曰: "洪舜澤之死, 國人尤憐之。 只以使行同往之故, 至於杖斃, 宜有恤典。" 從之。 鎭遠曰: "尹慤出銀之說, 趙洽之誣告也。" 上曰: "尹慤、柳星樞, 雖以其時按獄大臣之言見之, 可知其冤矣。" 致中曰: "李壽民, 以先朝舊將, 竄死絶域, 宜復官, 趙洽, 以誣告論斷。" 許之。 鎭遠曰: "壬寅獄事, 旣知其構誣陷害, 則不可不削勳。 雖以虎龍單錄, 不成錄勳貌樣, 亦不可仍存也。" 上曰: "旣翻案, 則削勳, 次第事也。" 鎭遠曰: "會盟祭加資人, 亦當還收矣。" 竝從之。 鎭遠曰: "所謂討逆科, 不可不削。 凡事必有名實。 旣削其勳, 無其實而存其科可乎?" 致中曰: "旣已削勳之後, 討逆科, 是毛將焉傅者也。" 上曰: "其中亦必有全不知獄事曲折者, 盡削似過矣。" 彙晋引孔子必也正名之語, 力請罷榜, 上曰: "臺臣正名之言好矣。 削科可矣。" 鎭遠等及臺臣, 請明正按獄諸臣鍛鍊之罪, 上命削黜曰: "若用反全之律, 遠竄亦輕, 而其中風靡之人, 何足深責乎?" 彙晋曰: "鍛鍊誣獄, 掩置聖誣, 與賊鏡無異。" 昉曰: "賊鏡非魁, 坐而指嗾者, 眞魁也。" 𥛚曰: "雖末減, 當投畀矣。" 必恒曰: "不但搆殺四大臣, 虎賊變書中, 誣及不敢言之地者, 終不究問於虎賊, 只請拔其誣逼之語, 蓋欲置之黯黮之科, 寧不痛心乎?" 德全曰: "己巳之獄, 比壬寅差間, 而肅廟卽囚黯賊, 按獄人次第論罪。 況此獄乎?" 上曰: "削黜非不知輕歇, 而三年按獄之臣, 不知其幾。 竄配雖不足以懲惡, 而氣象豈不愁慘乎? 但其中尤有切痛者。 自庭鞫移設本府, 蓋欲任意鍛鍊, 其意益爲凶慘。 庭鞫時, 按獄諸臣, 竝極邊遠竄, 移本府後諸臣, 限壬寅冬幷削黜。" 鎭遠曰: "按獄之臣, 旣竄邊, 則委官雖已死, 宜施追奪矣。" 上曰: "委官豈曰無罪, 而死者追奪, 似過矣。" 墰曰: "宣仁門潛入時, 已有凶心, 追奪烏可已乎?" 昉曰: "自古爲士禍者, 如金安老, 生存故賜死, 南袞、沈貞, 皆追奪。 況此輩之罪, 不但起士禍而已也。" 鎭遠曰: "俄者下者中, 虎龍以累名加之殿下, 而不爲請討, 以勿問二字, 欲置黯黮之科云者, 是人臣何等罪惡, 而尙可容貸乎?" 上曰: "在予爲自己事, 故不欲治之矣。" 又曰: "今日處分, 非有他意, 向來奸凶, 構誣鍛鍊, 誅殺大臣, 故欲明是非也。 非有致怒於鳳輝疏也。" 鎭遠曰: "柳重茂罪狀, 決不可放送。" 上曰: "重茂不待他罪, 以壬寅按獄, 入於竄配中矣。" 喬岳曰: "壬寅庭鞫, 移設本府時, 按獄諸臣, 旣命遠竄, 則參鞫承旨、臺官, 何以爲之耶?" 上曰: "按獄之時, 委官禁堂主張矣, 承旨、臺官, 傍觀而已乎?" 鎭遠曰: "問郞不參完議, 而承旨、臺官, 則同參完議矣。" 上曰: "一體遠竄。" 判義禁洪致中讀疏決秩: "朴熙晋、朴長潤、李濟、梁聖揆、尹㝚、李廣道、李景說、金始燁、趙翼命、趙鎭禧、李顯章、權益淳、呂善長、尹游、李承源、李師尙、申潤廷、河潤遠、朴弼夢、李眞儒、李明誼、鄭楷、尹聖時、徐宗厦、尹就商、李重述、申慶濟、李公胤、李巨源、李眞淳、權益寬竝仍, 金壽天、鶴孫、朴厚應、皇甫謙、李志逵、黃尙鼎、李命龍、徐允興、洪聖疇、文德麟、洪彦度、金時鼎、李坰、吳命峻、李鳳鳴幷放。" 至李志逵事, 鎭遠曰: "志逵, 少以行誼稱, 八十之年, 忍飢讀書, 賢士也。" 上曰: "當其時, 能辦如此事, 氣節可尙。" 仍命敍用, 使復官秩。 刑曹罪人中朴趾赫放, 許璧、崔鐸仍。 至李義淵子岐金事, 鎭遠請伸冤, 𥛚繼之, 命放歧金, 還給籍産。 鎭遠請加恤典, 重弼曰: "向來殺戮無辜之非先王本意, 國人皆言之, 奚獨義淵哉?" 上曰: "疏語終欠蘊藉矣。" 墰曰: "草野之言, 倨傲。 設令言不蘊藉, 此豈爲罪乎?" 上曰: "向時人, 皆謂逼於大行朝, 故不得已施刑, 豈料遽至徑斃耶? 思之可矜。 令該曹恤典擧行。"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90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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