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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3권, 영조 1년 2월 25일 계사 1번째기사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세자 책봉을 미루다가 밤 4경에 신하를 불러 왕자 경의군을 왕세자로 삼다

명하여 왕자(王子) 경의군(敬義君)을 세워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이 때 왕자가 이미 7세였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여 중외(中外)에서 마음을 두었으므로 우윤(右尹) 심정보(沈廷輔)가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튿날 예조 판서 민진원이 입대(入對)하기를 구하여 책봉하기를 강력히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일찍이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일찍이 교유(敎喩)한 말에 진실로 나라를 위하여 깊이 염려한 것을 알 것이다.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마땅히 대신(大臣)이 오기를 기다려서 해야 한다."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일찍이 경자년300) 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건저(建儲)301) 하는 것을 급하게 여겼으나 신만이 유독 신중해야 한다고 여겨 말하기를, ‘이 일이 혹 차질(蹉跌)이 있게 되면 비단 여러 신하들에게 화(禍)가 있을 뿐 아니라 종사(宗社)가 위망(危亡)하는 것이 반드시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게 되니, 경솔히 발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대서(臺書)가 나오게 되어서는 신이 말하기를, ‘이미 말이 나온 후에는 화복(禍福)을 따지지 말고 죽을 힘을 다해 청해 오늘을 넘기지 말게 한 연후에야 나라가 보전된다.’라고 하여 대신들이 드디어 서로 이끌어 입대(入對)해 밤새껏 힘써 청해서 즉시 명호(名號)를 청했습니다. 종사가 오늘날까지 보전된 것은 그날 밤 힘이었으나 신의 신중하자는 말 때문에 지연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신의 죽을 죄입니다. 이 논의가 한번 나온 후인데 어찌 하루인들 조금이나마 늦추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시원스레 따르지 않았다. 이날 밤 4경에 갑자기 명하기를,

"2품(品) 이상 육조(六曹)의 장관과 양사(兩司)·옥당(玉堂)은 입시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를 세우는 일을 대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자고 한 것은 그 일을 소중히 여겨서였는데, 다시 생각하니 관계된 바가 중대하고 일의 체통이 자별하다. 지난번 조정 신하들이 강력히 청한 것은 전적으로 종사를 위한 계책에서 나왔는데, 그후 잇따라 생긴 논의가 점점 괴격(乖激)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에 이르러 생각하니, 차라리 말을 안하려고 한다. 근일의 세도(世道)로 보건대, 이미 말이 나온 후에 만약 다시 지연시키게 되면 혹 사단이 겹쳐 생길 염려가 없지 않다.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은 조금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미 두 분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했다."

하니, 예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이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 이조 참판 김재로(金在魯), 대사헌 신사철(申思喆), 대사간 이교악(李喬岳) 등이 소리를 같이 하여 찬양(贊揚)하니, 임금이 그 주달(奏達)을 옳게 여겼다. 승지 김상옥(金相玉)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경의군(敬義君)을 세자(世子)로 삼는다."

하였다. 민진원·김재로·이교악 등이 인하여 성의(聖意)의 피혐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으로 진계(陳啓)하기를,

"사사로운 뜻을 둔 것으로 참으로 사(私)이고, 남이 사(私)로 의심할까 두려워하는 것 역시 사입니다. ‘사(私)’란 한 글자를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연후에야 일마다 합당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전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이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7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註 30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301]
    건저(建儲) : 왕세자를 세우는 일.

○癸巳/命立王子敬義君, 爲王世子。 時, 王子已七齡, 岐嶷夙成, 中外屬心。 右尹沈廷輔, 上疏請之, 上不從。 翌日, 禮曹判書閔鎭遠求對, 力請冊封曰: "卽今國勢孤危, 第一先務, 莫過於早定國本。" 上曰: "向來早敎喩之言, 固知爲國深慮, 而國之重事, 當待大臣之來矣。" 鎭遠曰: "曾在庚子, 大臣諸臣, 皆以建儲爲急, 臣獨持重, 以爲: ‘此事, 一或蹉跌, 則不但諸臣之禍而已, 宗社危亡, 必在呼吸, 不可輕發。’ 及臺書出, 臣以爲: ‘旣發之後, 不計禍福, 舍死力請, 無踰今日, 然後國家可保也。’ 大臣遂相率入對, 達夜力請, 卽定名號。 宗社之保有今日, 其夜之力, 而以臣持重之言, 以致遷延, 此實臣之死罪也。 此論一發之後, 何可一日少緩乎?" 上終不快從。 是夜四更, 忽命二品以上、六曹長官、兩司、玉堂入侍。 上曰: "建儲事, 待大臣上來, 所以重其事也, 更思之, 關係重大, 事體自別。 向來廷臣之力請, 亶出爲宗社計, 而其後層生之論, 漸至乖激。 至今思之, 寧欲無言。 以近日世道觀之, 旣發之後, 若復遲疑, 或不無事端層生之慮。 事在應行, 不容少緩。 已仰稟兩慈聖矣。" 禮判閔鎭遠、吏判李宜顯、兵判洪致中、吏參金在魯、大司憲申思喆、大司諫李喬岳等, 同聲贊揚, 上可其奏。 命承旨金相玉書曰: "敬義君爲世子。" 鎭遠在魯喬岳, 仍以聖意避嫌之太過, 陳戒有曰: "有意爲私者, 固私也, 恐人疑之以私者, 亦私也。 一私字, 忘諸胸中, 然後事事得宜矣。" 上曰: "此言發前人所未發, 當留念矣。"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7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