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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권, 영조 즉위년 9월 21일 신유 2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선왕조의 작호와 왕자의 봉작, 부부인의 늠록 등에 관해 이광좌 등과 논함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이 공제(公除) 기간이 이미 지났다 하여 사친(私親)을 존봉(尊奉)하는 예(禮)를 청하며 말하기를,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으며, 인조(仁祖) 때에는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추숭(追崇)한 뒤에도 인빈(仁嬪)은 다만 평소의 작호(爵號)만 썼습니다. 그리고 대행왕(大行王) 때에 이르러서는 선왕조(先王朝)의 작호를 쓸 수가 없으므로 별도로 명호(名號)를 만들었으나, 이를 전례로 삼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선왕조의 작호에다가 ‘대(大)’자를 첨가하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머니는 아들의 귀(貴)한 것을 따라 귀(貴)해진다고 선유(先儒)가 이를 논하였으나, 맹무백(孟武伯)이 효(孝)를 물었을 적에 공자(孔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나의 사친(私親)은 평소에 소심하고 신중하였으므로 반드시 선왕(先王)이 내린 작호(爵號)를 마음으로 편하게 여길 것이니, 나도 소심하고 신중한 것으로 사친에게 보답하여 인빈의 고사(故事)에 견주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은 매양 이러한 의리(義理)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변하지 않았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환하게 밝히셨으니, 그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복(感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워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고 묘역(墓域)을 넓히고 수호인(守護人)을 두는 것은 한결같이 인빈(仁嬪)의 전례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사당은 내가 불초(不肖)함으로 인하여 3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데다가 나라에 대장(大葬)이 있으니 인산(因山) 후에 백성의 힘이 조금 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또다시 상석(象石)을 증설(增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석은 굳이 증설할 필요가 없다.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인흥군(仁興君)의 어머니인 정빈(靜嬪)의 묘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고 하니, 나 또한 사친(私親)의 묘에 신도비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돌을 채취하려면 아마도 백성을 괴롭힐 것 같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값을 후하게 치르고 매수(買收)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왕자(王子)로 있을 적에, 지금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있는 이진망(李眞望)이 사부(師傅)였었다. 《소학(小學)》을 강독(講讀)하다가, ‘친척(親戚)이 이미 죽으면 비록 효도하고자 한들 누구에게 효도를 할 것이며, 나이 늙은 다음에는 비록 공경을 하고자 한들 누구에게 공경하겠는가?’라고 한 곳에 이르러 이진망이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지금 나의 마음도 그렇다."

하고, 마침내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왕자(王子)는 6세가 되면 봉작(封爵)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봉호는 반드시 안으로부터 정해서 내리는 것이되, 교양(敎養)을 제때에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단정한 선비를 골라서 사부(師傅)로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말하기를, ‘짐(朕)의 아들이 어찌 감히 선제(先帝)의 아들과 같겠는가?’ 하였는데, 6세에 봉작(封爵)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여러 종실(宗室)은 반드시 15세가 되어야 봉작하니, 그 나이가 되기를 기다려서 사부를 두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자,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지금 왕자 한 사람뿐이니, 한나라 명제의 일과는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어릴 때에 교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공력(功力)이 갑절이나 들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1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지나치게 겸손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양(禮讓)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겸손함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 일은 겸손한 것이 아니다. 3년만 기다리게 되면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에 있어 두 가지가 다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또 말하기를,

"부부인(府夫人)은 본래 늠록(廩祿)이 없으므로 왕명(王命)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듣건대, 부부인이 시골에 있다고 하는데, 서울 집으로 모셔올 적에 연도(沿途)의 지공(支供)을 전례를 참고하여 시행하는 일을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시고, 월름(月廩) 또한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전례를 상고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禮曹判書李眞儉, 以公除已過, 請尊奉私親之禮曰: "宣祖朝, 尊德興君爲大院君, 郡夫人爲府大夫人。 仁祖朝, 追崇元宗大王後, 仁嬪只用平日爵號。 至於大行朝事, 旣不得用先朝爵號, 故別立名號, 似不可援例也。" 上以問右議政李光佐光佐請就先朝爵號, 加以大字, 上曰: "母以子貴, 先儒論之, 然孟武伯問孝, 孔子曰: ‘無違私親。’ 平日小心謹愼, 必安於先朝爵號。 予以小心謹愼, 報私親, 得比於仁嬪故事可矣。" 光佐曰: "自古帝王, 每於此等義理, 不能明辨, 而今殿下洞然昭析, 此群下所以感服也。 然建祠官享, 增墓道置守戶, 當一依仁嬪例也。" 上曰: "諾。 祠宇因予不肖, 過三年未建。 然今歲飢民困, 國有大葬, 可待因山後民力稍紓也。" 光佐復請增設象石, 上曰: "象石, 不必增設, 聞宣祖仁興君靜嬪墓, 有神道碑。 予亦欲樹神道碑於私親墓, 然伐石恐煩民力, 可令有司, 厚其價買之也。" 已而復曰: "予之爲王子也, 令江華留守李眞望, 爲師傅。 講《小學》, 讀至, ‘親戚旣沒, 雖欲孝, 誰爲孝, 年旣耆艾, 雖欲悌, 誰爲悌?’ 眞望爲之涕泣。 今予之心, 亦然也。" 仍嗚咽不成聲。 光佐又言: "王子已六歲, 封爵, 例也。 封號, 必自內定下, 而敎養不可不及時。 宜令該曹, 擇端人正士, 爲之師傅。" 上曰: " 明帝云: ‘朕之子安敢與先帝子等乎?’ 六歲封爵, 予豈敢乎? 諸宗室, 必至十五歲封爵, 待是年置師傅未晩也。" 光佐曰: "殿下今有王子一人, 與 事不同。 況蒙養失時, 則功必倍之。" 上命待十歲。 諸臣皆曰: "殿下何謙讓太過?" 上曰: "孔子云: ‘能以禮讓, 於爲國乎, 何有?’ 欲求爲國, 舍謙讓何以哉? 況此事非謙讓也。 差待三年之後, 情文兩宜也。" 光佐又言: "府夫人本無廩祿, 有旨乃給。 聞府夫人在鄕云, 奉來京第時, 沿途支供, 考例擧行事, 分付道臣, 月廩, 亦依例擧行。" 命考例以入。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0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