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임 이조 판서 권상유의 졸기
원임(原任)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졸(卒)하였다. 권상유의 자(字)는 유도(有道)인데, 안동(安東) 사람이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숙종(肅宗)을 섬겼는데,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가 되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조(皇朝)의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상산(象山) 육씨(陸氏)009) 의 학문을 금절(禁絶)시킨 것이 좋지 않은 것을 아니었습니다만, 몸소 행하는 실상이 없었기 때문에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뒤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의 무리가 서로 뒤를 이어 일어남에 따라 양지(良知)·양능(良能)에 대한 이야기가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어찌 개연(慨然)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주자(朱子)와 육씨(陸氏)에 대한 변설(辯說)을 극력 진달하였다. 또 말하기를,
"윤휴(尹鑴)가 주자(朱子)를 무시하여 비난하고 이언(異言)이 봉기(蜂起)했는데, 박세당(朴世堂)이란 자는 《사변록(思辯錄)》을 지어 주자(朱子)를 배척하였으니, 매우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숙종이 곧 《사변록》을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권상유에게 명하여 변설(辯說)을 짓게 하자 권상유가 조목조목 논박하고 구절구절 분석하였는데, 의리가 명백하였다.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그를 위하여 탄식하기를,
"유도(有道)의 학식은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권상유는 청렴 강직하고 재능과 지혜가 있었으므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경종(景宗) 원년(1721)에 김일경(金一鏡)이 은밀히 환자(宦者)인 박상검(朴尙儉)과 교결하여 충헌공(忠獻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을 살해하여 종국(宗國)이 장차 망하게 되자, 권상유가 걱정과 울분으로 음식을 전폐(全廢)하였다. 오랜 뒤에 아들들에게 경계시켜 공거(貢車)010) 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는데, 나이 69세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98면
- 【분류】인물(人物)
○丁卯/原任吏曹判書權尙游卒。 尙游字有道, 安東人也。 登第事肅宗, 入弘文館爲應敎, 爲上言曰: "皇朝世宗皇帝, 禁絶象山 陸氏之學者, 非不善也, 而未有躬行之實, 故不得爲堯、舜之君。 其後白沙 陳獻章、陽明 王守仁之徒, 相繼而起, 而良知、良能之說, 澶漫天下, 寧不慨然?" 因極陳朱、陸之辯。 又言: "自尹鑴詆侮朱子, 異言蜂起, 有朴世堂者, 著《思辯錄》, 以斥朱子, 甚可痛也。" 肅宗乃燒《思辯錄》, 命尙游, 作爲辯, 尙游條駁句析, 義理明白。 文簡公 金昌協爲之歎曰: "有道學識不可及也。" 尙游㾾直有材諝, 由平安道觀察使, 擢判戶曹, 改吏曹兼守禦使。 景宗元年, 金一鏡陰結宦者朴尙儉, 殺忠獻公 金昌集、忠文公 李頤命、忠翼公 趙泰采、忠愍公 李健命, 宗國將亡, 尙游憂憤不食。 久之戒諸子, 毋赴貢擧。 已而以疾卒于家, 年六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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