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수정실록 3권, 경종 2년 2월 21일 병자 1번째기사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처사 김창흡의 졸기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字)는 자익(子益)인데,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지기(志氣)가 탁월하여 옛 가시(歌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경(詩經)》 3백 편에서부터 아래로 성당(盛唐)011) 의 이백(李白)·두보(杜甫)와 송(宋)나라·명(明)나라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절중(折中)하지 않은 것이 없어 우뚝하게 가시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가화(家禍)012) 를 당하고서부터 상복(喪服)을 벗었어도 거적자리에서 자면서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는데, 갑술년013) 에 신복(伸復)되자 비로소 상식(常食)을 회복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외침(外寢)에서 거처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성리학(性理學)을 즐겨 읽어서 만년(晩年)에 다시 깊고도 높은 조예(造詣)를 이룩했다. 설악산(雪嶽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신(筵臣)의 말에, ‘그의 높은 풍도(風度)와 절조(節操)는 넉넉히 나약(懦弱)한 사람에게 뜻을 확립시키고, 재리(財利)를 탐내는 자의 마음을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있었다. 숙종(肅宗)이 임조(臨朝)하여 오랫동안 차탄(嗟歎)하던 끝에 여러 차례 집의·진선으로 승천(陞遷)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동교(東郊)에서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품질(品秩)을 정경(正卿)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고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2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