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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수정실록 2권, 경종 1년 12월 22일 무인 2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환관 박상검과 문유도·궁인 석렬과 필정이 왕세제를 살해하려 하다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청휘문(淸暉門)을 폐쇄하고 왕세제(王世弟)를 살해하려고 하므로, 왕대비(王大妃)가 박상검의 간악함을 적발하고 그 도당인 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필정(必貞)까지 모두 하옥(下獄)시켜 국문하였다. 이때 박상검이 안팎으로 서로 결탁하여 왕세제를 해치려고 도모하여 대궐 안에 여우가 있다고 핑계하고 기정(機穽)189) 을 설치한 뒤 청휘문을 폐쇄하였는데, 청휘문은 바로 왕세제가 문침(問寢)하는 길이다. 이에 양궁(兩宮)이 저격(阻隔)되어 위기가 더욱 급박하였다. 이날 밤 왕세제가 입직(入直)한 궁관(宮官) 김동필(金東弼)·권익관(權益寬)과 익위사(翊衞司)의 관원 홍우현(洪禹賢)·이세환(李世瑍)을 불렀다. 왕세자가 궁관에게 말하기를,

"한두 명의 환관이 나를 제거하려고 하므로, 자성(慈聖)께서 나로 하여금 대조(大朝)께 입고(入告)하도록 하였다. 내가 체읍(涕泣)하면서 대조께 청하였더니, 처음에는 잡아다가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셨다가 곧바로 또 환수하셨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마는 이미 일어난 이후에는 임금 곁의 악당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겠기에 다시 진달하였더니, 쾌히 윤종(允從)해 주시어 마음에 몹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물러나 나의 거처에 돌아와 보니, 앞에 내린 분부를 곧바로 환수하였고,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다. 내가 장차 합문(閤門)을 나가 석고 대죄(席藁待罪)하여 사위(辭位)하려 하는데,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나의 거취(去就)를 알게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일조 일석의 사고가 아니며, 점차 쌓여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이미 주상 앞에 고한 이후에는 비록 잡아다 추고하라는 분부를 회수하였더라도 저들의 무리가 마땅히 쭈그려 엎드려 대죄(待罪)하여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의기양양하게 금중(禁中)에 출입하고 있다. 오늘에 있어서는 문안(問安)·시선(視膳)까지도 이 무리들로 인하여 저지되었으니, 내가 만일 이 지위를 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 무리들의 독수(毒手)를 만나게 될 것이므로, 지위를 피하여 대죄(待罪)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곡(哭)하여 혼전(魂殿)을 하직하고 이내 사제(私第)로 나가야 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것은 성상의 하교를 받들지 못하였으니 감히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동필·권익관 등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대조께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미안한 하교가 있다 하더라도 다만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과 효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따름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내(大內)로부터 명백하게 진청(陳請)해서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지 마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양전(兩殿)께서 몸이 편안하지 않으시므로, 깊은 밤중에 수선스럽게 할 수가 없으니, 조금 기다려 내일쯤 가서 조정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제가 듣지 않고 사위소(辭位疏)의 초본(草本)을 꺼내보였다. 김동필·권익관 등이 앞서와 같이 진달하기를 여러 천마디의 말을 하고, 또 말하기를,

"신 등은 마땅히 물러가 사부(師傅)·빈객(賓客)과 외정(外廷)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여 죄인(罪人)을 성토하기를 청할 것입니다. 그들이 법에 의해 처단된 뒤에는 저하께서 어찌 불안한 단서가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제가 비로소 내일 사부(師傅)와 여려 궁료(宮僚)와 서로 만나서 이에 자기의 뜻을 시행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그 이튿날 기묘(己卯)에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李肇),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단(沈檀), 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태항(朴泰恒), 훈련 대장(訓鍊大將) 윤취상(尹就商), 승지(承旨) 이정신(李正臣)·유중무(柳重茂)·박휘등(朴彙登), 대사간(大司諫) 양성규(梁聖揆),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 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윤성시(尹聖時), 교리(校理) 윤연(尹㝚)·윤순(尹淳), 정언(正言) 서종하(徐宗廈) 등이 이태좌(李台佐)·조태억(趙泰億)·이인복(李仁復)·심탱(沈樘)·심공(沈珙) 등과 더불어 진수당(進修堂)에 같이 입대(入對)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어제 밤에 동궁(東宮)께서 궁료(宮僚)에 하령(下令)하시기를, ‘한두 명의 환관(宦官)이 중간에서 나쁜 짓을 처음 시작하여 문안(問安)과 시선(視膳)까지도 저지되었다. 그러므로 체읍(涕泣)하며 진달(陳達)하였더니, 처음에는 잡아다가 추고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곧바로 환수(還收)하였고,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렸다. 장차 합문(閤門)을 나가 진소(陳疏)하고 대죄(待罪)하여 사위(辭位)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모르긴 하지만 무슨 연고로 인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또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잡아다 추고하라는 분부를 중단시키신 것입니까? 옛사람은 환관을 가노(家奴)에 비하였습니다. 시험삼아 사가(私家)로써 말한다면, 복례(僕隷)의 말을 듣고 믿어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가정이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한 명의 가동(家僮)만을 사랑하여, 곧바로 엄하게 국문해서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최석항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효우(孝友)로써 근본을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으로는 다만 전하와 춘궁(春宮)만이 계실 뿐입니다.

새로 저사(儲嗣)를 세워서 국본(國本)이 아주 정해졌는데, 한두 명의 환관이 감히 이간질하여 춘궁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춘궁의 마음이 불안하다면 선대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어찌 몹시 서러워하지 않겠으며, 자전(慈殿)의 자애로운 생각도 또한 어찌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의 기틀이 호흡(呼吸)에 닥쳐 있으니, 청컨대 조속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하게 신문한 뒤 실정을 알아내어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하소서."

하고, 여러 신하들도 차례대로 극력 청하였다. 심단은 말하기를,

"세제(世弟)께서 ‘내 몸을 제거하려 한다.’는 하교까지 있으셨으니, 이 무리들은 바로 대역(大逆)입니다. 신은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으며 마땅히 조속히 방형(邦刑)을 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심단의 말을 옳게 여겼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도 또한 합사(合辭)하여 계청(啓請)하기를,

"엄명(嚴明)하게 구핵(究覈)하여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사형(死刑)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나아가 번갈아 청하기를 또 각각 여러 천백 마디를 하였다. 윤순은 말하기를,

"한(漢)·당(唐)·황명(皇明)의 멸망은 모두 환시(宦寺)들이 국병(國柄)을 마음대로 쓴 것에 연유하였으나, 우리 조정의 제도는 궁실(宮室)의 사이를 쇄소(灑掃)하는 임무에 대비하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이러한 일이 환첩(宦妾)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몸에 이르러서 이러한 막대한 변고가 있으니 앞으로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화란의 싹을 단절하고 조종(祖宗)의 성덕(盛德)을 소술(紹述)하지 않으십니까? 일전에 세 명의 환관을 찬배(竄配)시킨 것은 어떤 일로 연좌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상께서 그들을 병축(迸逐)하면서 조금도 난처하게 여기지 않으셨는데, 지금 두 환관의 죄역(罪逆)은 세 명의 환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전하의 처분이 저들에게는 통쾌하게 내려지고 이들에게는 시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조태구는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소 동기간의 우애(友愛)의 정을 다하셨다면 저 환관의 무리들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엿보고서 이러한 망측(罔測)한 변고를 만들어내겠습니까? 세제가 편안한 후에야 전하께서도 편안하실 수 있고, 전하께서 편안하신 후에야 종사(宗社)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저 환관들이 춘궁께 불순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전하에게 충성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늙어도 죽지 않고,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서 은혜의 만분의 일에 보답도 못 한 채 불행히 오늘에 또 이러한 변고를 만나게 되니, 신은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을 따름입니다. 또한 어찌 감히 의리에 어긋난 일로 전하를 인도하여 스스로 망측한 주륙에 빠지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안위와 존망이 나누어지는 것인데도 전하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실로 억울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이조가 나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극력 간청함이 이와 같으니,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는 것을 하교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수답(酬答)한 말이 있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분명하지가 않았다. 조태구가 재차 청하여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였습니다. 옥음(玉音)을 상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

하였다. 조태구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여 사례(謝禮)하고, 이어서 동궁을 위안하여 화락(和樂)을 엄하게 신칙하여 이간을 단절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미 물러나와 합문(閤門) 밖에 가서 문안(問安)하니, 대비(大妃)가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혈속(血屬)으로는 다만 대전(大戰)과 춘궁(春宮)이 있을 뿐이며, 책건(冊建)한 이후에 양궁(兩宮)이 화협(和協)하였는데, 중인(中人)과 나인(內人)들이 서로 이간시킴으로 인하여 세제가 장차 불측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선왕의 내려 주신 작호(爵號)에 의해서 세제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구가 자지(慈旨)를 봉환(封還)하여 중관(中官)에게 맡기고 구두로 전달하기를,

"동궁께서 저위(儲位)에 오르신 것은 실로 종사(宗社)의 무강(無彊)한 경사(慶事)로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떠받들어 모시기를 원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중인들이 서로 이간하여 진저(震邸)께서 불안해 하시는 결과를 초래하여 어젯밤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할 때에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휘교(徽敎)를 내렸습니다. 신 등이 서로 인솔하고 청대(請對)하여 이미, ‘적발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신인(神人)의 분한 마음을 거의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방금 진저(震邸)를 뵙기를 청하여 위안의 뜻을 다하였는데, 이제 뜻밖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선왕의 후사(後嗣)의 부탁은 다만 우리 전하와 동궁께 있을 뿐이므로 신 등은 죽음이 있을 따름이며,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처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언교(諺敎)로 굳이 이목(耳目)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기에 삼가 이같이 봉환(封還)합니다. 신 등이 항상 대조와 동궁에 진면(陳勉)하는 바는 단지 우애(友愛)를 돈독히 하고 효경(孝敬)을 극진히 하는 뜻일 뿐인데, 또한 대내(大內)로부터도 이를 권면(勸勉)하여 화평(和平)의 복(福)을 다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인(內人)들의 범죄한 사실에 대해선 외인(外人)들의 알 바가 아니니, 대내(大內)로부터 유사(攸司)에게 회부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 하는 것이 아마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대비가 또 언교로써 답하기를,

"저사의 결정은 곧 선왕(先王)의 유교(遺敎)를 받았고, 대전이 친히 작호를 썼으며, 내가 또 언서로 대신(大臣)에게 하교하여 결정하였다. 불행히도 궁인과 환시가 양궁(兩宮)을 서로 이간시켜 성총(聖聰)을 기폐(欺蔽)하므로, 내가 일찍이 개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궁인을 불러서 화동(和同)의 도리를 개유(開諭)하였더니, 감히 흉패(凶悖)한 말을 대전(大殿)과 내가 앉아 있는 앞에서 방자하게 늘어놓았다. 그 죄상은 반드시 해당되는 형률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의 궁인은 바로 환시와 체결(締結)한 자이므로 마땅히 형률에 따라 처치하여야 할 것인데, 경 등도 마땅히 우리 주상과 동궁을 조호(調護)해서 우리 3백 년 종사(宗社)를 보호하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뒷면에 ‘석렬(石烈)’·‘필정(必貞)’ 두 궁인의 이름을 써 놓았다. 조태구가 재차 아뢰기를,

"두 궁인에 대해서는 방금 진계(陳啓)하여, ‘유사(攸司)에게 회부하여 일체 사형(死刑)에 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상께서는 지인(至仁)·지효(至孝)하시고 저궁(儲宮)께서도 또한 효경(孝敬)의 도리를 다하시며, 종사(宗社)는 선왕의 혼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묵묵히 도와주시니,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볼모양이 없지마는 감히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우러러 선왕의 유교를 받들어 더욱 동궁을 보호하는 도리를 다해서 우리 대비의 간곡하신 자교(慈敎)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린 계(啓)는 잘 알았노라."

하였다.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 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모두 합문(閤門)에 부복(俯伏)하여, ‘자교(慈敎)에 써서 내린 석렬필정을 유사(攸司)에게 회부할 것을 조속히 분부하여 역엄(逆閹)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함께 일체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상검문유도는 바로 왕세제를 대전(大殿)과 이간시킨 자들이다. 박상검은 젊어서 심익창(沈益昌)에게 배웠고 집이 담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 항상 왕래하였는데, 본래 영변(寧邊) 사람이다. 김일경(金一鏡)원휘(元徽)는 일찍이 이곳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인연(因緣)이 친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익창·김일경·원휘 등이 박상검과 난만(瀾漫)하게 밀의(密議)하여 한쪽편의 사람들을 진출시키려고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저위(儲位)가 이미 결정됨에 이르러서는 의구(疑懼)가 더욱 깊어져 드디어 이간시키고 동요시킬 계획을 내어서 쇄문(鎖門)과 교지(矯旨)의 변고가 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영조(英祖) 을사년190) 에 이르러 환관(宦官) 손형좌(孫荊佐)의 국초(鞫招)에 말하기를,

"박상검이 요악(妖惡)한 나인(內人) 필정과 결탁하여 말을 지어내어 대궐 안에 여우가 왕래한다고 하였으며, 여우를 잡는다고 핑계하고는 기계와 그물을 많이 설치하였습니다. 청휘문(淸暉門)은 바로 동궁(東宮)이 문안(問安)하는 길이므로, 박상검이 그것을 저지하고 막아서 음흉한 일을 꾸미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에 매양 박상검을 만나보면 양두필(兩頭筆)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혹은 진서(眞書)로 쓰기도 하고 언서(諺書)로 쓰기도 하다가 사람을 보면 놀라서 그 종이를 말아 깊이 감추었고, 친밀한 나인(內人)을 만나면 글을 주면서 서로 내통하는 자취가 현저히 있었는데, 그 내인이 바로 필정이었습니다. 그의 은비(隱祕)한 정상은 여러 환관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박상검이 아이 때부터 심익창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김일경심익창의 집에 왕래한다는 것을 듣고 박상검과 때때로 항상 모였습니다. 신축년191) 겨울의 소비(疏批) 및 제수(除授) 비망기(備忘記)가 대내(大內)로부터 써 나올 즈음에 집필(執筆)한 내관(內官)이 어떤 글자를 써야 할지 알지 못하면 박상검이 곁에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심익창의 아들 심정옥(沈廷玉)의 국초(鞫招)에 말하기를,

"박상검이 아이 때 신(臣)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박상검은 바로 영변(寧邊) 사람입니다. 김일경원휘가 다 그곳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박상검과 다정하고 친밀하게 지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신축년 7월 그믐 무렵의 밤중 3경(三更)에 박상검의 집에 갑자기 화광(火光)이 있는 뒤 대문(大門)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따라가서 그 사유를 물어보았더니, 김일경이 온 것이었습니다. 신이 박상검에게 묻기를, ‘김 참의(金參議)가 무슨 일로 왔는가?’ 하였더니, 박상검이 말하기를, ‘김 참의의 말이 「내가 바야흐로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하려 하는데, 비답(批答)이 만일 더디게 내려진다면 일에는 도움이 없게 될것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만일 미리 상소가 들어갈 시기를 안다면 출납(出納)할 즈음에 마땅히 주선(周旋)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원휘는 평안 병사로써 하직(下直)할 때 신이 ‘전에 하고자 하였던 바를 지금 하게 되니 과연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원휘가 말하기를,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김일경의 무리가 정국(政局)을 맡게 되면 천하(天下)를 탕평(蕩平)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탕평’이란 것은 노론(老論)을 모조리 살해하고 남인(南人)과 소론(少論)만을 전적으로 임용하려는 것입니다. 원휘의 아들 원일서(元日瑞)박상검과 서로 결탁하고 왕래한 상황은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신이 삼가 그 당시의 일을 살펴보건대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박상검이 왕세제를 해치고자 하여 교지(矯旨)를 소매 속에 넣고 장차 승정원에 내리려하여 위기가 호흡(呼吸)의 사이에 닥쳐 있을 때 왕세제께서 인원 왕대비(仁元王大妃)께 울면서 고하시니, 왕대비께서 하교하시기를, ‘종사(宗社) 위망(危亡)의 기틀이 목전에 있는데 세제가 어찌 피혐(避嫌)하여 대조(大朝)께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히 대전의 침실(寢室)로 가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왕세제께서 이에 대전으로 가서 박상검의 교지한 죄를 주달하고, 대비전(大妃殿)에서는 또 재차 언서(諺書)로 하교하시어 환첩(宦妾)의 죄를 처형하니, 궁위(宮闈)가 깨끗이 맑아지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성상의 우애(友愛)하는 마음에서 연유된 것이나,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침착한 기지(機智)와 은밀한 계획이 양궁(兩宮)을 지교(指敎)하여 위험을 전환시켜 안정되게 만든 것입니다. 옛적의 이른바 ‘여중(女中)의 요순(堯舜)’이라는 말이 인원 왕후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58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189]
    기정(機穽) : 날짐승을 잡기 위한 장치가 있는 함정.
  • [註 19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19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宦官朴尙儉淸暉門, 欲害王世弟, 王大妃發尙儉奸, 竝其黨文有道及宮人石烈必貞, 下獄鞫之。 時, 尙儉, 內外交結, 謀害王世弟, 托以闕中有狐, 設機穽閉淸暉門淸暉門, 卽王世弟問寢之路也。 於是, 兩宮阻隔, 危機益急。 是夜, 王世弟召入直宮官金東弼權益寬及翊衛司官洪禹賢李世瑍。 王世弟謂宮官曰: "一二閹竪, 欲除去吾身, 慈聖令余入告大朝。 余涕泣請於大朝, 始命拿推, 旋又收還。 玆事未發則已, 旣發之後, 不可不除君側之惡, 更爲陳達, 快賜允從, 心甚喜幸。 退歸私次, 卽爲還收前命, 又下不忍聞之敎。 余將出閤, 席藁俟罪辭位, 欲使講官, 知余去就。 此非一朝一夕之故, 積漸旣久。 吾旣告上前之後, 雖收拿推之命, 渠輩當縮伏俟罪, 而乃反略無忌憚, 揚揚出入於禁中, 至於今日問安、視膳, 亦因此輩而隔塞。 余若不避此位, 必遭渠輩毒手, 避位俟罪之外, 無他道理。 余非不知哭辭魂殿, 仍出私第, 此則未承聖敎, 不敢擅便耳。" 東弼益寬等言: "邸下之於大朝, 有君臣、父子之義, 雖有一時未安之敎, 惟當起敬起孝而已。" 又曰: "自內明白陳請, 以正典刑, 勿使外人知之。" 又曰: "兩殿違豫, 不可深夜瀆撓, 差待明日, 使朝廷處之。" 王世弟不聽, 出示辭位疏草本。 東弼益寬, 如前陳達屢千言, 且言: "臣等當退言於師傅、賓客、外廷諸臣, 而請討罪人。 伏法之後, 邸下豈有不安之端乎?" 王世弟始許明日與師傅、諸僚相見, 乃行己志。 翌日己卯, 領議政趙泰耉、右議政崔錫恒、禮曹判書李肇、戶曹判書金演、吏曹判書沈檀、工曹判書韓配夏、吏曹參判金一鏡、禮曹參判朴泰恒、訓鍊大將尹就商、承旨李正臣柳重茂朴彙登、大司諫梁聖揆、司諫李眞儒、獻納李明誼、持平朴弼夢尹聖時、校理尹㝚尹淳、正言徐宗厦, 與李台佐趙泰億李仁復沈樘沈珙等, 同入對於進修堂泰耉言: "昨夜, 東宮下令宮僚曰: ‘一二閹竪, 作俑中間, 問安視膳, 亦至隔塞, 故涕泣陳達, 初有拿推之命, 卽爲還收, 繼下嚴敎。 將欲出閤, 陳疏待罪辭位。’ 臣未知緣何故至此境, 亦何爲遽寢拿推之命乎? 古人以閹竪比家奴。 試以私家言之, 聽信僕隷之言, 兄弟不協, 則其家興乎? 亡乎? 殿下何可愛一家僮, 不卽嚴鞫, 以慰東宮之心哉?" 錫恒曰: "自古聖王, 莫不以孝友爲本。 況先王骨肉, 只有殿下與春宮。 新立儲嗣, 國本大定, 而一二閹竪, 敢爲離間, 使春宮不安。 春宮之心不安, 則先大王在天之靈, 安得不衋傷, 而慈殿止慈之念, 亦豈不憫然乎? 宗社存亡之幾, 迫在呼吸, 請亟設鞫廳, 嚴覈得情正法。" 諸臣以次力請。 沈檀言: "世弟至有除去吾身之敎, 此輩係是大逆。 臣意不必鞫問, 宜亟正邦刑。" 諸臣皆是言, 三司諸臣, 亦合辭啓請, 嚴明究覈, 出付有司正刑, 上皆不答。 諸臣更進迭請, 又各屢百千言。 尹淳曰: "、皇之亡, 皆由宦寺之弄國柄, 而我朝之制, 不過備灑掃宮室之間, 故祖宗朝, 未聞有此等事, 出於宦妾。 至于殿下之身, 有此莫大之變, 前頭之憂, 有不可勝言。 殿下何不絶此禍亂之萠, 紹述祖宗盛德乎? 日昨三宦竄配, 雖未知所坐何事, 而聖上逬逐之, 曾不少難。 今兩宦罪逆, 非三宦之比, 何殿下之處分, 快於彼而靳於此也?" 泰耉泣曰: "殿下, 平日處同氣之間, 若盡友于之情, 則彼宦輩, 曷敢窺測, 造此罔測之變乎? 世弟安然後, 殿下可安, 殿下安然後, 宗社可安。 彼宦竪不順春宮如此, 豈有忠於殿下之理乎? 臣老而不死, 不能竭忠效誠, 以報萬一, 不幸今日, 又遭此變, 臣寧欲溘然無知。 亦豈敢以非義, 導殿下, 自陷罔測之誅哉? 此實安危存亡之判, 而殿下終不允許, 臣實抑鬱。" 上終不答。 李肇進曰: "諸臣之力請如此, 以摘發正法, 下敎何如?" 上若有酬答而猶未明。 泰耉再請曰: "小臣聽瑩。 願詳聞玉音。" 上曰: "摘發正法。" 泰耉以下, 皆起拜謝, 仍請慰安東宮, 務盡和樂, 嚴飭宮闈, 以絶惎間, 上曰: "唯。" 泰耉旣退出, 詣閤外問安, 大妃以諺書下敎:

先王血屬, 只有大殿與春宮。 冊建之後, 兩宮和協, 因中人及內人之交構, 世弟將陷不測。 依先王所授爵號, 使之出外。

泰耉封還慈旨, 付中官口達曰: "東宮升儲, 實宗社無疆之休。 一國臣民, 莫不願戴, 而不意中人交構, 以致震邸不安。 昨夜宮僚引接時徽敎, 人臣所不忍聞。 臣等相率請對, 旣蒙摘發正法之命, 神人之憤, 庶可少洩。 臣今方請見震邸, 以盡慰安之意, 而今承意外下敎。 先王後嗣之托, 只有我殿下與東宮, 臣等有死而已, 豈敢不盡心保護乎? 矧今處分已定, 諺敎不必煩耳目, 謹此封還。 臣等常所陳勉於大朝、東宮者, 只是篤友愛盡孝敬之意, 而亦願自內勸勉, 以盡和平之福也。 至於內人負犯, 非外人所知, 自內出付攸司, 明正典刑, 恐爲得宜。" 大妃又以諺敎答曰:

儲嗣之定, 卽奉先王之遺敎, 而大殿親書爵號, 予又以諺書, 敎于大臣而定之。 不幸宮人及宦寺, 交構兩宮, 欺蔽聖聰, 予嘗慨惋, 招宮人開諭和同之道, 則敢以凶悖之說, 肆然於大殿及予坐前。 其罪狀必有當律。 其一宮人, 乃締結宦寺者也。 當依律處置, 而卿等亦宜調護我主上及東宮, 保我三百年宗社, 毋負先王遺敎, 是所望也。

紙下者石烈必貞二宮人名字。 泰耉再啓曰: "兩宮人, 今方陳啓, 請付攸司, 一體正法, 而我聖上至仁至孝, 儲宮亦盡孝敬之道, 宗社先王之靈, 默佑於冥冥之中, 豈有一毫他慮? 臣雖無狀, 敢不殫誠竭力, 以死爲期, 仰體先王遺敎, 益盡保護東宮之道, 以毋負我丁寧慈敎乎?" 答曰: "兩啓知悉。" 大臣、二品以上、政院、三司, 竝伏閤, 請以慈敎所書下石烈必貞, 亟命出付攸司, 與逆閹朴尙儉文有道一體正法, 上從之。 尙儉有道, 卽王世弟所敎交構者也。 尙儉, 少學於沈益昌, 家居隔墻, 常常往來, 而本寧邊人金一鏡元徽, 嘗經府使, 故因緣親熟。 至是, 益昌一鏡尙儉, (瀾漫)〔爛漫〕 密議, 謀進一邊人。 及儲位旣定, 疑懼益深, 遂生疑間動搖之計, 致有鎖門、矯旨之變。 逮英宗乙巳, 宦官孫荊佐鞫招曰: "尙儉與妖惡內人必貞, 締結做言, 以爲闕中有狐往來, 托以捉狐, 多設機器。 淸暉門, 乃東宮問安之路也。 尙儉欲沮遏之, 以圖陰凶之事。 其時每見尙儉, 持兩頭筆作書, 而或眞書寫、諺書寫, 見人則驚捲其紙而深藏之, 逢親密內人, 顯有授書相通之跡。 內人, 乃必貞也。 其隱秘之狀, 諸宦之所共知。 尙儉自兒時, 受學於沈益昌, 聞一鏡往來家, 與尙儉, 時常聚會。 辛丑冬疏批及除授備忘, 自內書出之際, 執筆內官, 不知書字, 則尙儉從傍指敎。" 益昌廷玉鞫招曰: "尙儉兒時, 受學於臣, 而寧邊人也。 一鏡元徽, 皆經府使, 故與情密者久。 辛丑七月晦間夜三更, 尙儉家, 忽有火光, 有開大門聲。 追後問之, 則一鏡來也。 臣問尙儉曰: ‘金叅議何故來耶?’ 尙儉曰: ‘金叅議言: 「吾方欲應旨陳疏, 批答若遲下, 則事無益矣。」 吾曰: 「若預知疏入時, 則出納之際, 當有周旋之道。」’ 元徽平兵下直時, 臣問前所欲爲者, 今乃爲之果好乎? 曰: ‘好矣。’ 仍曰: ‘一鏡輩當局, 欲蕩平天下。’ 所謂蕩平, 欲盡殺老論, 專用南少矣。 日瑞, 與尙儉交結往來之狀, 人孰不知?" 臣謹按其時之事, 尙忍言哉? 尙儉欲害王世弟, 矯旨納於袖中, 將下政院, 危機迫在呼吸之間。 王世弟泣告于仁元王大妃, 王大妃敎曰: "宗社危亡之機, 在於目前, 世弟何可避嫌, 而不聞於大朝乎? 速往大殿寢室以聞可也。" 王世弟, 乃詣大殿, 奏尙儉矯旨之罪。 大妃殿又再下諺敎, 以正宦妾之罪, 宮闈廓淸, 宗社再安。 此實由於聖上因心之友, 而仁元王后沈機密謨, 指敎兩宮, 轉危爲安。 古所謂女中, 其仁元王后之謂歟! 於戲盛矣!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58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