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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수정실록 2권, 경종 1년 9월 2일 경인 1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판중추부사 문순공 권상하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卒)하였다. 권상하의 자(字)는 치도(致道)인데, 견확(堅確)하고 중후(重厚)하였으며 학문을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히 하였다. 권상하송시열(宋時烈)을 사사(師事)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에 써주기를, ‘한수재(寒水齋)’라 하였다. 송시열초산(楚山)에서 화(禍)를 입었을 때 세도(世道)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이어서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 주었는데, 옷은 바로 주자(朱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바로 이이(李珥)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草本)으로, 김장생(金長生)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의 의리에 따라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는데,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淸州)화양동(華陽洞)에 건립하고, ‘만동묘(萬東廟)’라 이름하고, 사변(四籩)·사두(四豆)119)신종(神宗)의종(毅宗) 두 황제(皇帝)를 제사하였다. 갑신년120) 에 이르러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121) 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122)숙묘온천(溫泉)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召命)을 받아 행궁(行宮)에 입견(入見)하였다가, 회란(回鑾)123)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124)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門人)으로는 이간(李柬)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50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119]
    사변(四籩)·사두(四豆) : 변(籩)은 대나무로 만든 제기(祭器)이고, 두(豆)는 나무로 만든 제기(祭器)임. 변은 과일이나 포를 담았고, 두는 식혜·김치 등을 담았음. 즉 변기(籩器) 네 개와 두기(豆器) 네 개를 차려 놓은 제수(祭需)를 말함.
  • [註 120]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 [註 121]
    군탄(涒灘) : 옛날 갑자(甲子)의 십이지(十二支)의 하나로, 신(申)과 같음. 《이아(爾雅)》에 "태세가 신(申)에 있음을 군탄(涒灘)이라 한다.[大歲在申日涒灘]." 하였음.
  • [註 122]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 [註 123]
    회란(回鑾) : 환궁(還宮).
  • [註 124]
    환산(還山) : 산중으로 돌아감.

○庚寅/判中樞府事文純公 權尙夏卒。 尙夏, 字致道, 堅確重厚, 攻學甚勤篤。 尙夏師事宋時烈, 時烈甚重之, 題其所居之室曰寒水齋時烈被禍於楚山, 以世道托尙夏, 仍以衣書付之, 衣卽倣朱子所製野服而製之者, 書卽李珥手書《經筵日記》草本, 金長生傳之時烈者也。 始, 時烈嘗欲依張栻虞帝祠之義, 立大明 神宗祠, 未及就。 尙夏始建於淸州華陽洞, 名之曰萬東廟, 以四邊、四豆, 祀神宗毅宗二皇帝。 及甲申, 肅廟以太歲涒灘, 感皇朝舊恩, 欲設壇墠以祭之, 密訪於尙夏, 尙夏力贊之, 遂築大報壇。 丁酉, 肅廟幸溫泉, 尙夏始膺召命, 入見於行宮, 及回鑾, 尙夏亦還山, 不復起。 至是卒, 年八十一。 後賜諡文純。 門人李柬韓元震, 最知名。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50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