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판중추 부사 조태채 등의 청에 따라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윤(判尹) 이홍술(李弘述), 공조 판서(工曺判書)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우참찬(右參贊) 임방(任埅),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현(李宜顯), 대사헌(大司憲) 홍계적(洪啓迪), 대사간(大司諫) 홍석보(洪錫輔), 좌부 승지(左副承旨) 조영복(趙榮福),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 등이 저사(儲嗣)를 세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처음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기를,
"전하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시니,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커다란 슬픔으로 애구(哀疚)하시는 중에도 반드시 근심하는 생각이 더하실 것이고, 우리 선왕(先王)의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도 반드시 정성스럽게 돌아보며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이미 행하신 영전(令典)이 있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준용(遵用)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방금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인심(人心)이 흩어졌으니, 더욱 마땅히 국가의 대본(大本)을 생각하여 종사(宗社)의 지극한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도, 대신(大臣)들이 오히려 세자 세우기를 청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속히 이것을 위로는 자성(慈聖)께 품하시고, 아래로는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즉시 사직(社稷)의 큰 계책을 결정해서 많은 백성들의 큰 기대를 잡아매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육경(六卿), 의정부(議政府)의 서벽(西壁)090) 과 판윤(判尹),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명초(命招)하여 회의(曾議)해서 품정(稟定)하기를 청하였는데, 판중추(判中樞)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은 부름을 어기고 이르지 아니하였다. 김창집 등이 드디어 모두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까지 저사(儲嗣)가 없으니, 신은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우려하였으나, 다만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까닭에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간(臺諫)의 말이 지극히 마땅하니, 누군들 다른 의논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태채는 말하기를,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두 황자(皇子)를 잃었을 때 춘추가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간신(諫臣) 범진(范鎭)이 ‘태자(太子)를 세울 것’을 소청(疏請)하였고, 대신(大臣) 문언박(文彦博) 등은 정책(定策)을 극력 도왔습니다. 지금 대간의 말이 이미 나왔으니, 지연시킬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실 적에 매양 ‘국사(國事)를 우려하여 억지로 죽음(粥飮)을 마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비록 애구(哀疚)하는 중에 있지마는 그 종사(宗社)를 위한 염려가 깊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일각인들 조금도 늦출 수 없기에,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청대(請對)하였으니, 원컨대 성사(聖思)를 가하여 조속히 대계(大計)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진청(陳請)하기를 마치자, 김창집·이건명·조태채가 다시 거듭 청하여 마지 않았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이니, 청컨대 빨리 윤허하여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따를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종사의 무강(無彊)한 복(福)입니다."
"대신(臺臣)의 이른바 ‘조종(祖宗)의 영전(令典)’이란 공정 대왕(恭靖大王) 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들고 계시니 들어가서 자전께 품하여 수필(手筆)을 얻은 후에 봉행(奉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은 청컨대 물러나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불러서 구두(口頭)로 아뢰어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니, 먼 동이 튼 뒤에 임금이 낙선당(樂善堂)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것을 이미 자성(慈聖)께 품계(稟啓)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반드시 자전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봉서(封書)가 여기에 있다."
하였다. 김창집이 받아서 뜯어보니, 봉서(封書) 안에 두 통의 종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서(楷書)로 ‘연잉군(延礽君)’이란 세 글자를 써 놓았고, 하나는 언찰(彦札)로 하교하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단지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에게 하교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해자(楷字)로써 언교(諺敎)를 번역하여 써서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영복(趙榮福)이 탑전(榻前)에서 전교(傳敎)를 쓰기를,
"연잉군 【휘(諱).】 을 저사(儲嗣)로 삼는다."
하였다. 이어서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을 명초(命招)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고, 여러 신하들이 이에 물러나왔다. 뒤에 영조[英宗] 계축년091) 에 민진원(閔鎭遠)이 영조에게 고하기를,
"경자년092) 국휼(國恤) 후에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만나면 번번이 머리를 맞대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사왕(嗣王)의 성후(聖候)가 불예(不豫)하시고, 더욱 후사를 두실 희망이 끊어졌으니, 국사(國事)를 장차 어찌 하겠는가?’ 하여, 이에 건저(建儲)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비록 급하지만 즉위(卽位)한 지 한 해를 넘기지도 않았는데, 바로 건저한다면 중외(中外)에서 성후(聖候)의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에 반드시 의혹이 있을 것이다. 힘을 다해 곁에서 보좌하여 3년이 지난 뒤에 마땅히 건저를 의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여러 분 계시다면 마땅히 일찍 건저를 의논하여 인심(人心)을 붙잡아 매어야 하겠지만,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단지 한 분이 계실 뿐이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가겠는가? 「3년 뒤에 해야 한다.」는 말이 진실로 옳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의 신하들이 건저(建儲)를 급하게 여겼으나, 김창집은 끝내 종전의 견해를 고집하였고, 고(故) 판서(判書) 이만성(李晩成)은 신을 꾸짖기를, ‘종사(宗社)의 계책이 시급하니,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축년093) 에 이르러 대소(臺疏)가 갑자기 나오자 신은 ‘이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 일개 대관(臺官)이 갑자기 상소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습니다. 비답(批答)이 내려진 뒤에 김창집이 신을 빈청(賓廳)으로 나가는 길에 지나다가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3년의 뒤를 기다리려 하였는데 지금 대소가 나왔습니다.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 논의가 이미 나온 뒤에는 경각도 지연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밤 정성을 다하여 극력 진달해서 꼭 정책(定策)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지연된다면 종사(宗社)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하니, 김창집이 그렇게 여기고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들을 부르기를 청하여, 유문(留門)094) 한 다음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청대(請對)하여 ‘동조(東朝)에 입품(入稟)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한 뒤 다시 신 등을 불러서 하교하실 것’을 진달하고, 합문(閤門) 밖으로 물러나와 기다렸습니다. 3, 4경이 되도록 소명(召命)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각이 매우 급하니, 지금 다시 청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군부(君父)에게 재촉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파루(罷漏) 뒤 신이 말하기를, ‘일이 재촉하는 것 같은 것은 소절(小節)이고,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는 것은 대사(大事)이니, 곧바로 조속히 청대함이 마땅하다.’ 하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습니다. 즉시 승전색(承傳色)에게 구대를 청하여 날이 밝아지려 할 때 입시하니, 어좌(御座)의 곁에 서안(書案)이 있었고, 서안 위에는 글이 있었습니다. 경묘(景廟)께서 서안을 돌아보며 가리키시기에, 대신(大臣)이 가져다가 받들어 보니, 자전(慈殿)의 언교(諺敎)와 경묘의 친필(親筆)이었습니다. 좌상(左相) 이건명(李健命)이 받들어 읽으니,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실성(失聲)하여 눈물을 흘려 울고 물러나왔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47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090]의정부(議政府)의 서벽(西壁) : 서벽(西壁)은 회좌(曾座)할 때 좌석의 서쪽에 앉는 벼슬. 《중종실록(中宗實錄)》 제 24권에 보면, 정부의 동벽(東壁)은 좌우 찬성(左右贊成)이고, 서벽(西壁)은 좌우 참찬(左右參贊)이라 하였음.
- [註 091]
계축년 : 1733 영조 9년.- [註 092]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註 09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94]
유문(留門) : 궁문(宮門)의 개폐(開閉)는 정시(定時)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꼭 나가야 할 사람과 들어올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개폐(開閉)를 유보(留保)하던 일.○戊寅/領議政金昌集、左議政李健命、判中樞府事趙泰采、戶曹判書閔鎭遠、判尹李弘述、工曹判書李觀命、兵曹判書李晩成、右參贊任埅、刑曺判書李宜顯、大司憲洪啓迪、大司諫洪錫輔、左副承旨趙榮福、副校理申昉, 請建儲嗣, 上從之, 以延礽君爲王世弟。 初, 正言李廷熽上疏曰:
殿下春秋鼎盛, 未有儲嗣。 竊伏想我慈聖, 巨創哀疚之中, 必益憂念, 我先王在天之靈, 亦必眷顧悶鬱。 況我祖宗有已行之令典, 豈非今日之所當遵者乎? 方今國勢岌嶪, 人心渙散, 尤宜念國家之木本, 爲宗社之至計, 而大臣尙無建請之擧, 臣竊慨然。 願殿下, 亟以此上稟慈聖, 下議大臣, 卽定社稷之大策, 以繫億兆之顒望。
上命議大臣稟處。 昌集、健命詣賓廳, 請命招原任大臣、六卿、政府西壁、判尹、三司長官, 會議稟定, 判中樞金宇杭、禮曹判書宋相琦、吏曹判書崔錫恒, 違召不至。 昌集等, 遂竝請對, 上引見于時敏堂。 昌集曰: "聖上春秋鼎盛, 尙無儲嗣。 臣忝在大臣, 夙夜憂慮, 只緣事體至重, 不敢仰請。 今臺言至當, 孰有異議?" 泰采言: "宋 仁宗喪兩皇子, 《春秋》雖不晼晩, 諫臣范鎭疏請建儲, 大臣文彦博等, 力贊定策。 今臺言旣發, 不可遲延。 請亟賜處分。" 健命言: "慈聖下敎, 每曰: ‘憂念國事, 强進粥飮。’ 雖在哀疚之中, 其爲宗社慮深矣。 此事不容一刻少緩, 臣等敢於深夜請對。 願加聖思, 亟定大計。" 諸臣以次陳請訖, 昌集、健命、泰采, 復申請不已。 承旨趙榮福曰: "大臣、諸臣之言, 皆宗社大計, 請速允從。" 上命允從。 諸臣皆曰: "此宗社無疆之福也。" 昌集、健命言: "臺臣所云祖宗令典, 似指恭靖大王時事。 聖上上奉慈殿, 不可不入稟慈旨得手筆, 然後奉行。 臣請退俟閤外。" 上乃入大內, 久不出臨。 昌集等招承傳內官口啓, 請更入對, 曉漏後, 上命引對于樂善堂。 昌集曰: "其已稟啓慈聖乎?" 上曰: "唯。" 健命言: "必有慈殿手札, 可以擧行。" 上指案上曰: "封書在此。" 昌集受而坼之, 封內有二紙, 一以楷書, 寫延礽君三字。 一以諺札敎曰: "孝宗大王血脈, 先大王骨肉, 只主上與延礽君而已, 有何他意? 予意如此, 下敎大臣宜矣。" 諸臣皆讀而泣。 健命請令史官, 以楷字翻書諺敎, 下政院, 令承旨, 書傳旨, 上可之。 榮福於榻前, 書傳曰: "以延礽君 【諱。】 爲儲嗣。" 仍請命招禮曹堂上擧行, 諸臣乃退。 後英宗癸丑, 閔鎭遠告于英宗曰: "庚子國恤後, 諸臣相對, 輒聚首憂遑曰: ‘嗣王聖候不豫, 尤斷求嗣之望, 國事將奈何?’ 於是, 有建儲之議。 臣言: ‘國事雖急, 而卽位未逾年, 卽爲建儲, 則中外未知聖候之如此, 而必有疑惑。 戮力夾輔, 過三年後, 當議建儲。’ 金昌集曰: ‘王子衆多, 則當早議建儲, 以係人心, 而吾君之子, 只有一位, 天命人心, 更歸何處乎? 三年後之說, 誠是矣。’ 其後廷臣, 皆以建儲爲急, 而昌集, 終執前見, 故判書李晩成責臣曰: ‘宗社之計爲急, 何爲緩緩?’ 及至辛丑, 臺疏猝發, 臣以爲此國家大事, 一臺官之猝然上疏何耶?’ 批下後, 昌集歷見臣於詣賓廳之路, 言於臣曰: ‘欲待三年之後, 今有臺疏。 旣已發言, 則力請何如?’ 臣曰: ‘此論旣發之後, 不可頃刻遲延, 必於今夜, 竭誠力陳, 期於定策。 若或遲延, 宗社之變, 必生矣。’ 昌集以爲然, 卽詣闕, 請召諸宰臣, 留門入來, 仍爲請對, 以入稟東朝, 決定大策後, 更召臣等, 而下敎爲達, 而退出閤外以待矣。 至三四更, 召命不下, 臣以爲: ‘此事, 頃刻甚急, 今更請對爲宜。’ 趙泰采曰: ‘如是則若催促於君父, 不可爲也。’ 罷漏後, 臣以爲: ‘事若催促者, 小節也, 求對入侍者, 大事也, 卽速請對宜矣。’ 諸大臣曰: ‘然。’ 卽請承傳色求對, 欲明時入侍, 則御座傍有書案, 案上有書。 上顧指書案, 大臣取而奉覽, 則慈殿諺敎及景廟親筆也。 左相李健命奉而讀之, 入侍諸臣, 皆失聲涕泣而退出矣。"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47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