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윤(昀)이며, 자는 휘서(輝瑞)이니,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장자(長子)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이시다. 처음에 숙종께서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음을 근심하였는데, 후궁(後宮) 장씨(張氏)가 무진년135) 10월 28일에 왕을 탄생(誕生)하니, 숙종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못해 인심(人心)이 매일 곳이 없었더니 오늘의 큰 계책이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시고, 드디어 원자(元子)로 호(號)를 정하였으며, 3세 때에 왕세자(王世子)로 봉(封)하였다. 4세 때에 처음으로 주흥사(周興嗣)136) 의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숙종께서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주며 힘쓰도록 하였고, 8세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는데 주선(周旋)함이 절도(節度)에 맞았으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듣는 인사(人士)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해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인하여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였으며, 두루 《효경(孝經)》·《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여러 책을 강(講)하였는데, 강관(講官)과 사부(師傅)가 심화(心畫) 보기를 청하자 크게 ‘효제충신(孝悌忠信)·예의염치(禮義廉恥)·경이직내(敬以直內)·의이방외(義以方外)’의 열 여섯 글자를 써서 보이니 필세(筆勢)가 뛰어나게 아름다와서 신료(臣僚)들이 서로 돌려가며 완상(翫賞)하였고, 이로부터 학문이 날로 더욱 진보(進步)되었으며, 서연(書筵)에 나아가 의란(疑難)의 질문은 사람들의 뜻밖의 것이 많았다. 일찍이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동(桐) 땅에 내쳤을 적에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를 물었고, 또 ‘사단(史丹)이 청포(靑蒲)에 엎드린 것이 왕씨(王氏)의 화(禍)에 기틀이 되었고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기미를 보고 떠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사단이 소광과 소수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가?’ 하고 물었으며, 강관(講官)이 일찍이 ‘스스로 기약하심이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시기를, ‘능히 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곧 원하는 바는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기시매 자애(慈愛)와 효도(孝道)에 틈이 없었으며, 신사년137) 에 왕후의 병환이 위급하여지자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초방(椒房)138) 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왕후께서 영결(永訣)하는 말씀이 있자 민진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으나 왕께서는 유독 슬픈 용태(容態)를 드러내지 않으시더니, 문 밖에 나옴에 이르러서 갑자기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며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셨다. 왕후가 승하(昇遐)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반호(攀號)139) 하고 벽용(躄踊)140) 함이 예제(禮制)를 넘었고, 이미 계빈(啓殯)하고 발인(發靷)하자 영여(靈轝) 앞에서 애사(哀辭)를 받들고 오래도록 노차(路次)에 서서 바라보며 애통(哀痛)하였으며, 반우(返虞)할 때에는 멀리 교외(郊外)까지 나아가 맞이하고 궁중(宮中)에 이르도록 통곡하는 울음 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니 도로에서 보고 모두 감탄(感歎)하였다.
을유년141) 은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신 지 31년이 되는 해인데, 왕께서 세 번이나 상소(上疏)하여 칭경(稱慶)할 것을 청하시기를, ‘전의 역사(歷史)에 의거(依據)할 만한 문헌이 있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꼭 행하여야 할 예(禮)입니다.’ 하니, 숙종께서 답하시기를, ‘소장의 말이 비록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에서 나왔으나, 다만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안락을 즐기는 큰 일을 일으키겠는가?’ 하셨다. 당시에 숙종께서는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던 탓으로 노고가 쌓여 병이 되었으므로 한가한 곳에 나아가 이양(頤養)142) 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 해 10월에 장차 왕에게 전위(傳位)하려 하자, 왕께서 놀라고 황공해 하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흘러내렸으며, 계속 글을 올려 굳게 사양을 하였으나 이미 거두어 들이는 명을 얻지 못하자 곧 세자궁(世子宮)의 요속(僚屬)들을 불러 유시(諭示)하기를, ‘밤새도록 울면서 청하였으나 끝내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오직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절히 진달(陳達)함이 있을 뿐이다.’ 하시고 날씨가 춥고 많은 눈이 왔는데도 포장과 장막을 제거하라고 명하시니, 그제야 숙종께서 이르기를, ‘너의 정사(情事)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 마침내 앞서 내린 명령을 거두었다.
12년 뒤 정유년143) 에 숙종께서 병환이 더욱 심해지자 국조(國朝)의 옛일에 의거하여 왕에게 청정(聽政)을 대리(代理)하도록 명하셨고, 왕께서 다시 간절히 사양하셨으나 숙종께서 여러번 노고(勞苦)를 대신하라는 뜻으로 교유(敎諭)하시므로 비로소 힘써 명령(命令)을 받들었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들이 조정(朝廷)에 들어와 칭하(稱賀)하였더니 고취(鼓吹)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업무(業務)의 재결(裁決)이 모두 사리(事理)에 합당하였지만,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하시어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 첫봄에 팔도[八路]에 유시(諭示)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셨고, 백성들 중에 굶주리는 자에게는 넉넉히 진대(賑貸)해 주도록 하였으며, 유포(流逋)144) 하는 자에게는 자산(資産)을 주어 향토(鄕土)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역질(疫疾)을 앓는 자에게는 양식과 약품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고, 그 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곧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의방(醫方)을 알아서 능히 사람을 병 중에서 구(救)해 주었거나 사재(私財)를 들여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 준 사람이 있으면 위에 계문(啓聞)하여 시상(施賞)을 하도록 허락하였고, 그 역질에 휩쓸려 죽고 단지 어린이만 남은 자는 모두 그 부포(負逋)를 면제(免除)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읍리(邑里)에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만난 사람이 있으면 매번 부역[庸]을 덜어주고 적미(糴米)145) 를 정지하면서 또 곡식을 주어서 안정[奠居]하도록 하였고, 소사(燒死)·익사(溺死)·압사(壓死)한 자 및 호식사(虎食死)한 자까지도 후하게 그 집을 구휼(救恤)하여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관서(關西) 지방에 황재(蝗災)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향(香)을 내려 공경히 빌도록 명하였다.
감사(監司)가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이면 반드시 인접(引接)하고 그 출척(黜陟)을 엄정하고 분명히 하도록 권면하였으며, 여러번 정조(政曹)146) 에 경계하여 수령(守令)의 간택(簡擇)을 신중히 하도록 하였다. 춥거나 더우면 근시(近侍)를 보내어 옥에 갇힌 죄수(罪囚)를 살펴보게 하여 가벼운 죄수는 방면(放免)하도록 하였으며, 궁궐의 담장이 비에 허물어짐으로 인하여 백성이 마구 들어온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도 그 사사로운 뜻이 없다는 이유로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였고, 형례(刑隷)147) 가 술김에 서계(書啓)를 찢고 파괴해서 해조(該曹)에서 요절 공문률(邀截公文律)에 의하여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한 것을 또한 특별히 비율(比律)하여 사형을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신료(臣僚)를 예(禮)로써 대우하였고, 종친(宗親)은 은혜로써 대접하였으며, 대신(大臣)이 죽으면 반드시 위차(位次)를 마련하여 곡(哭)하였고, 종신(宗臣)의 상사(喪事)에도 역시 관가(官家)에서 상장(喪葬)을 갖추어 돕도록 하고 아울러 3년상(三年喪)을 마칠 때까지 녹(祿)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일찍이 기로연(耆老宴)을 베풀어 주려고 하는데 원보(元輔)148) 의 장사를 아직 지내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즉시 정지하였고, 왕제(王弟)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이 일찍 죽으매 왕께서 손수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祭祀)하기를,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막막하게 소리가 없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이 났는데 공연히 의형(儀形)만을 생각하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아 산으로 떠날 기약만 있구나. 금양(衿陽)으로 가는 것은 하룻밤뿐인데 저 달빛은 천추(千秋)토록 비치겠지’ 하였으니, 그 사어(詞語)의 정이 지극하고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언제나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는데 비록 비나 눈이 와도 폐하지 않았으며, 조묘(祧廟)는 태묘 뒤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꼭 걸어서 나아가셨고, 궁관(宮官)과 사부(師傅)들이 굳이 소여(小輿)를 타도록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엄숙하고 공경히 해야 할 자리에 감히 스스로 편리함을 취하겠는가?’ 하였다. 숙종께서 위예(違豫)149) 하신 십수 년 동안을 왕께서 시탕(侍湯)하시면서 근심하고 애태우기를 시종(紿終) 하루같이 하셨으며,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실 적에는 왕께서 따라가셨고 곤전(坤殿)이 뒤를 이어 이르렀다. 예절로 보아 마땅히 밖에서 공경히 맞아들여야 하는지라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성후(聖候)의 편치 않으심이 다른 때와 다르니, 내가 먼저 들어가 문후(問候)하고 다시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시니, 창졸간의 주선(周旋)도 진실로 모두 정례(情禮)에 합당하였다. 그리고 온천(溫泉)에 행행(行幸)하실 때에 이르러 왕이 도성(都城)에 머물러 국사(國事)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왕께서 강두(江頭)에 나아가 공경히 전송하시고 우모(羽旄)가 이미 멀어졌는데도 여전히 해 그림자가 옮겨지도록 우두커니 서서 계셨으니, 그 애태우고 근심하시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경자년150) 여름에 숙종의 병환이 크게 위독하시자 왕께서는 체읍(涕泣)하시며 황황(皇皇)해 하시고 묘사(廟社)와 산천(山川)에 기도(祈禱)하도록 명하셨고, 휘(諱)151) 하심을 받들게 되어서는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의 절목(節目)을 올리자 답하기를, ‘하늘이 무너진 망극(罔極)한 속에서 인자(人子)의 정리에 어찌 차마 이를 하리오.’ 하셨으니, 백료(百僚)들이 계속 날마다 일제히 부르짖었으나 대답한 말씀은 더욱더 애통(哀痛)하셨으며, 여러날을 지내고서야 비로소 억지로 허락하였다. 왕께서 이미 왕위에 오르시자 모든 여러 가지 정령(政令)을 대리(代理)하실 때와 한결같이 하셨고, 신축년152) 에 왕께서 후사(後嗣)를 이을 사람이 없어 국세(國勢)가 외롭고 위태롭다 하시어 우리 전하(殿下)를 책봉(冊封)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으시니, 세제께서 다섯 번이나 소장(疏章)을 올려 굳게 사양하매, 왕께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기를, ‘조심하고 근신하며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여 국인(國人)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고 하셨다.
왕께서 위로는 혜순 대비(惠順大妃)를 받들어 효도로 봉양(奉養)하는 도리를 훌륭히 다하였는데, 경복전(景福殿)을 만수전(萬壽殿) 옛터에 영조(營造)하시고 임인년(壬寅年)153) 에 상(喪)이 끝나자 대비(大妃)를 받들어 이어(移御)하게 하셨고, 바로 잔치를 베풀어 상수(上壽)를 하려고 하였으나 모비(母妃)께서 하고 싶어하지 않으시매 역시 감히 억지로 하지는 않았으며, 서서히 틈을 타서 말씀하기를 여러번 한 뒤에야 비로소 청원(請願)에 대하여 허락을 얻으셨고, 공헌(供獻)하는 물품에 이르러서도 모비께서 백성(百姓)의 재력(財力)을 염려하여 재감(裁減)하고자 하시므로 역시 순응하여 받들어 행하시고는 오래되지 않아 다시 개진(開陳)하여 옛 그대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는 은혜를 미루어서 백성에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봉양하게 하고 벼슬을 주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조(高麗王朝)의 묘소에 의물(儀物)이 결함(缺陷)이 있으면 수신(守臣)에게 명하여 개수(改修)하고 신라 왕묘(新羅王廟)에 사전(祀典)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 후손(後孫)에게 벼슬을 주어 받들도록 하였다. 양녀(良女)를 뽑아 궁인(宮人)에 충당하는 영(令)을 정지하도록 하였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자들에게 본래 부과된 이외의 물품을 독책하여 부응(副應)케 하는 폐단을 혁파(革罷)하니,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 등의 권귀(權貴)한 집 아들과 체결(締結)하여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왕께서는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조사해 다스려서 모두 법(法)에 맡기도록 하였다.
기내(畿內)와 호서(湖西)에 재해와 흉년이 들었다 하여 특별히 상부(常賦)154) 를 감해 주셨고, 서읍(西邑)이 조폐(凋弊)하였다 하여 3년 동안 전조(田租)155) 를 감면(減免)해 주셨다. 오래도록 가뭄이 계속되자 소여(小輿)를 타고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기도(祈禱)하였는데,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지라, 시신(侍臣)들이 번갈아 간하여 상승(常乘)156) 을 쓰시도록 청하고 세제(世弟) 역시 달려가 간곡히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노천(露天) 아래에서 빌었으며, 이미 돌아오셔서는 또 전전(前殿)에 앉아 저녁 때가 다 되도록 녹수(錄囚)를 하셨으며, 그래도 여전히 비가 오지 않자 곧 또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下敎)하시기를, ‘가뭄의 기운이 매우 심하니 이 마음이 타고 지지는 것 같다. 날을 가리지 말고 다시 교단(郊壇)에 나아가 비를 빌도록 하라.’ 하시므로, 여러 신하들이 또 번갈아가며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시고 비가 내린 뒤에야 그만두셨다. 이듬해 가뭄에도 다시 친히 사직단(社稷壇)과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재차 노천 아래서 비를 빌었으며, 어선(御膳)을 감하고 풍악을 정지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을 피하였다가 가을에 이르러서야 회복하였다.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으시어 무릇 논주(論奏)가 있으면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는지라, 식자(識者)는 훌륭한 보좌(輔佐)가 없어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하였음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역시 일찍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으니, 비록 사친(私親)을 높이 받드는 데 관계되어 사람의 상정(常情)으로서는 의당 기꺼이 들을 일인데도 본래 분수와 한계를 넘으면 반드시 배척해 끊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중앙과 지방에서 이익됨을 말하면서 백성에게 가렴 주구(苛斂誅求)157) 하는 풍습을 통쾌히 개혁(改革)하셨고, 여러 관사(官司)나 제도[諸路]에서 가게를 설치하고 차인(差人)을 두어 기회를 틈타 무천(貿遷)158) 하는 것도 일체 혁파(革罷)하여 제거하였다. 그리고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중하게 여겨 훌륭한 선비를 포상(褒尙)하였으며, 공경(公卿)·재상(宰相)·시종(侍從)과 제로(諸路)의 사신(使臣)에게 명하여 인재(人才)를 천거해 올리도록 하였고, 또 법(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겼거나 백성들의 역사(役事)가 번거롭고 과중한 것은 보필하는 신하로 하여금 여러 면으로 참작하여 헤아려서 고치고 바로잡도록 하셨는데, 이 일은 아쉽게도 미처 성취하지 못하였다.
왕께서는 천성(天性)이 침중(沈重) 홍의(弘毅)하고 덕용(德容)이 혼후(渾厚)하였으며, 평상시에 말씀과 웃음이 적어서 사람들이 그 변제(邊際)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제방(隄防)에 엄격하시어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에게도 일찍이 안색과 언사에 용서함이 없어서 좌우에서 복종하여 섬기는 자들도 모두 공경하여 겁내며 두려워하였고, 그 휴목(休沐)159) 하는 날에 이르러서도 역시 감히 여리(閭里)를 횡행(橫行)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척리(戚里)와 귀근(貴近)에게도 일찍이 사사로운 은택(恩澤)이 있지 않았고, 순수하여 기욕(嗜慾)의 누(累)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성색(聲色)과 유전(游畋)과 궁실(宮室)과 화훼(花卉) 등 예로부터 인군(人君)이 깨끗이 벗어나지 못했던 것까지도 왕께서는 털끝만큼도 뜻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불행함을 만나 변고에 대처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는데도 잠잠하게 그 소리와 자취가 중외(中外)에 들림이 없었는지라 사람들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여러해 쌓인 병환이 있어 갈수록 고질로 굳어지자 세제(世弟)의 영명(英明)함을 아시고 일찍이 국사(國事)를 대리(代理)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세제의 간곡한 사양으로 인하여 중지되었다.
갑진년160) 8월 25일에 창경궁(昌慶宮) 별전(別殿)에서 훙서(薨逝)하시니, 춘추(春秋)가 37세였으며, 재위(在位) 4년이었다. 도성(都城)의 사민(士民)으로부터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와 슬피 부르짖으며 고비(考妃)의 상사(喪事)와 같이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바야흐로 병환중에 계실 때 신료(臣僚)들이 침소[臥內]에 들어가 뵈니, 병장(屛帳)161) 과 상욕(床褥)162) 이 모두 질박하고 검소하며 옷과 이불에 비단붙이가 없는 것을 보았으며, 상사가 남에 이르러 곤복(袞服)의 여벌이 없었고 여러 가지 몸에 부착한 것이 새로 지은 것이 많았으니, 그 나머지는 이를 미루어 알 만하였다. 이 해 12월 16일 을유(乙酉)에 대행왕(大行王)을 양주(楊州) 고을 남쪽 신좌(申坐) 인향(寅向)의 언덕에 안장(安葬)을 하였다. 왕비(王妃) 심씨(沈氏)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일찍 훙서(薨逝)하였고, 계비(繼妃)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아! 왕께서는 품질(稟質)이 이미 탁이(卓異)하신데다가 선왕(先王)의 정일(精一)하신 전교(傳敎)를 받아 중심에 얻은 바가 이미 극도로 고명(高明)하였다. 사사로이 기거함에도 용(龍)이 나타난 것 같고, 깊이 침묵하셔도 우레 소리가 나는 듯 하였으며,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가운데 지극한 감화를 운용하시는 것은 진실로 신민(臣民)이 엿보아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밖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실제에 힘쓰는 정치를 숭상하였고, 바깥 사물의 유혹을 단절하였으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간함을 따르고 어기지 않았으며, 백성을 불쌍히 여겨 폐단을 혁파(革罷)하는 데 마음을 두셨으니, 이는 모두 옛날 제왕(帝王)의 성대한 절도였는데, 왕께서는 곧 겸하여 가지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큰 것으로 여겨 만족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그 즉위하신 첫 해에 먼저 큰 계책을 결정하여 주창(主鬯)의 중대한 일을 개제(介弟)163) 에게 부탁하셨으니, 이는 단지 그 뜻과 생각이 깊고 원대할 뿐만 아니라, 주고받은 바의 광명(光明)함이 마침내 국가(國家)에 반석(盤石)과 같이 편안함이 있게 하였고, 사직(社稷)은 영장(靈長)164) 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 이에 온 동토(東土) 수천 리 안에 삶을 누리는 유(類)가 음(陰)으로 왕께서 주신 은혜를 받지 않은 자가 없다. 아!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겸 대제학(吏曹判書 兼大提學) 이덕수(李德壽)가 지어 바쳤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29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 [註 135]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136]
주흥사(周興嗣) : 양(梁)나라의 문인(文人). 무제(武帝) 때에 《천자문》을 지었음.- [註 137]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註 138]
초방(椒房) : 후비(后妃) 궁전.- [註 139]
반호(攀號) : 부여잡고 부르짖음.- [註 140]
벽용(躄踊) : 가슴을 치며 슬퍼함.- [註 141]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142]
이양(頤養) :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하게 정신을 수양함.- [註 143]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144]
유포(流逋) : 일정한 주거가 없이 방랑함. 또는 그 사람.- [註 145]
적미(糴米) : 곡식이 귀할 때 백성에게 꾸어 주었다가 수확 후에 받아들이는 관미(官米). 10분의 1의 이식을 붙여 받는 것이 상례(常例)임.- [註 146]
정조(政曹) : 이조와 병조.- [註 147]
형례(刑隷) : 형조의 하례(下隷).- [註 148]
원보(元輔) : 영의정(領議政)의 별칭.- [註 149]
위예(違豫) : 병환.- [註 15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151]
휘(諱) : 훙서(薨逝)를 뜻함.- [註 15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53]
임인년(壬寅年) : 1722 경종 2년.- [註 154]
상부(常賦) : 일정하게 바치는 구실.- [註 155]
전조(田租) : 전답의 조세.- [註 156]
상승(常乘) : 상용(常用)의 승여(乘輿).- [註 157]
가렴 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註 158]
무천(貿遷) : 교역(文易).- [註 159]
휴목(休沐) : 관리(官吏)의 휴가.- [註 160]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161]
병장(屛帳) : 병풍과 장막.- [註 162]
○行狀曰:
王姓李氏, 諱 【昀】 字 【輝瑞】 , 肅宗大王長子, 顯宗大王之孫也。 始肅宗久無嗣爲憂, 後宮張氏, 以戊辰十月二十八日, 誕王, 肅宗喜甚, 語諸大臣: "國本未定, 人心靡係, 今日大計, 不在他矣。" 遂定號元子, 三歲封王世子。 四歲始學周興嗣 《千字文》, 肅宗親製序以勉。 八歲行入學禮, 周旋中節, 講音洪亮, 人士之圜橋聽者, 莫不相慶。 是歲行冠禮, 仍謁太廟, 遍講《孝經》、《小學》、《三綱行實》諸書, 講官、師傅, 請見心畫, 大書孝悌忠信、禮義廉恥, 敬以直內、義以方外十六字以示, 筆勢偉麗, 爲臣僚所傳翫。 自是學問日益進, 臨筵問難, 多出人意表。 嘗問: "伊尹放太甲於桐, 終不改過, 則如之何?" 又問: "史丹伏靑蒲, 基王氏之禍, 疏廣、疏受, 見幾而作。 由是論之, 史丹不及廣、受?" 講官嘗問自期如何? 答曰: "非曰能之, 乃所願則舜何人也, 予何人也?" 事仁顯王后, 慈孝兩無間, 辛巳, 后疾瀕劇, 判書閔鎭厚, 以椒房之親入侍, 后有永訣語。 鎭厚伏而垂涕, 王獨不露慼容, 及出戶, 便持鎭厚手, 大泣哀不能自止。 及后昇遐, 攀擗踰制, 旣啓靷, 奉辭靈轝, 久立路次, 瞻望哀慟, 迎虞遠郊, 洎至宮, 哭不絶聲, 道路感歎。 歲乙酉, 爲肅宗卽位之三十一年, 王三疏請稱慶曰: "於前(吏)〔史〕, 有可據之文, 在今日, 爲必行之禮。" 肅宗答曰: "疏辭雖出人子至情, 顧予何心, 作此豫大之事?" 時, 肅宗以好學勤政, 積勞成疾, 思就閑頣養。 是年十月, 將傳位于王, 王驚遑, 淚隨言發, 連章固辭, 旣不獲命, 則召宮僚諭之曰: "達夜泣請, 終不得回天, 今惟有伏閤陳懇耳。" 天寒大雪, 令去帷幕, 肅宗曰: "爾之情事, 不可不念。" 遂收前命。 後十二年丁酉, 肅宗疾彌甚, 依國朝故事, 命王聽政代理, 王復懇辭。 肅宗屢諭以替勞之意, 始黽勉承命。 群臣入朝稱賀, 命停皷吹。 裁決庶務, 咸當於理, 然當事皆上稟而後行, 示不敢專也。 首春下諭八路勸農桑, 百姓飢者賑贍之, 流逋者資遣歸土, 疾疫者給糧與藥, 其有死者, 令卽收瘞。 民有曉解醫方, 能救人病, 及捨私財瘞道殍者, 許上聞施賞賚, 其疫歿而只餘幼穉者, 悉免其負逋。 諸邑里有遭水火災, 輒蠲庸停糴, 又與之粟, 俾奠厥居, 燒死溺死壓死, 及爲虎食死者, 厚恤其家。 嘗聞關西蝗, 命降香虔祈。 監司辭去, 必引接, 勉以嚴明黜陟, 屢飭政曹, 愼簡守令, 寒暑遣近侍審獄, 放輕囚。 宮墻因雨頹圮, 民有闌入者, 法當死, 以其無情, 特原之。 刑隷乘醉裂破書啓, 該曹據邀截公文律, (蔽)〔論〕以死, 又特令比律減死。 遇臣僚以禮, 待宗親以恩, 大臣沒則必設次而哭, 宗臣之喪, 亦官庀喪葬, 竝給祿終三年。 嘗欲賜耆老宴, 有以元輔未葬爲言, 卽停之。 王弟延齡君 昍早卒, 王自製文以祭曰: "呼之不應, 漠漠無聲。 已矣於世, 空想(形儀)〔儀形〕。 居諸如流, 卽山有期。 衿陽一夕, 月色千秋。" 其詞情懇至如此。 每謁太廟, 雖値雨雪, 亦不廢, 祧廟在太廟後稍遠, 而必步進, 宮官、師傅, 固請乘小輿, 不許曰: "肅敬之地, 其敢自便?" 肅宗違豫十數年, 王侍湯憂灼, 始終如一日, 嘗移御慶德宮, 王隨往, 坤殿繼至。 禮當在外祗迎, 語宮官曰: "聖候未寧, 異於他時, 我當先入候, 復出迎。" 倉卒周旋, 允合情禮。 及行幸溫泉, 留王監國, 王祇送于江頭, 羽旄旣遠, 猶佇立移晷, 焦憂形於色。 庚子夏, 肅宗疾大漸, 王涕泣皇皇, 命禱廟社、山川, 逮奉諱, 禮官進嗣位節目, 答曰: "天崩罔極之中, 人子之情, 豈忍是?" 百僚連日齊籲, 答辭愈哀痛, 閱累日始勉許。 王旣踐位, 凡諸政令, 一視代理時。 辛丑, 王以未有繼嗣, 國勢孤危, 冊我殿下爲王世弟, 世弟五上章固辭, 王賜答慰諭曰: "小心翼翼, 勤勤孜孜, 以副國人之望。" 王上奉惠順大妃, 克盡孝養之方, 營景福殿於萬壽殿舊基, 壬寅去喪, 奉大妃移御, 仍欲設宴上壽, 而母妃不欲, 則亦不敢强, 徐乘間爲言, 屢以後始得請。 至於供獻之物, 母妃念民力欲裁減, 亦承順行之, 不久又開陳而復舊焉。 推老老之恩, 民有高年者, 必惠養而賜之爵, 麗祖墓缺儀物, 命守臣改之, 新羅王廟, 祀典不備, 官其孫以奉之。 停良女選充宮人之令, 革貢物人科外責應之弊, 都民大悅。 龍澤、天紀等, 締結權貴子, 陰圖不軌, 事發, 王命攸司按治, 悉致於法。 以畿內、湖西菑荒, 特減常賦, 以西邑凋弊, 減三年田租。 屬久旱, 乘小輿, 親禱于社壇, 烈日下曝, 侍臣迭諫, 請用常乘, 世弟亦趨進懇請, 終不聽, 徹夜露禱。 旣還, 又坐前殿, 竟夕錄囚, 猶不雨, 乃敎于群臣曰: "旱氣孔酷, 心如焚灼。 其勿卜日, 更禱郊壇。" 群臣又迭諫, 又不聽, 得雨乃已。 明年旱, 復親詣社壇、農壇, 再露禱, 減膳撤樂, 避正殿, 至秋乃復。 弘於聽納, 凡有論奏, 無不開懷虛受, 識者頗恨其無良輔佐, 不能贊成至治也。 然其不中理者, 亦未嘗苟循, 雖係尊奉私親, 宜爲常情所喜聞者, 苟越分限, 必斥絶不少假。 痛革中外言利剝民之習, 諸司諸路, 設舖置差, 乘時留遷者, 一切罷去。 崇儒重道, 褒尙賢士, 命卿宰、侍從、諸路使臣, 薦進人才, 又以法久弊生, 民役煩重, 令輔臣, 商確釐改, 而事未及就。 王天性沈毅, 德容渾厚, 平居罕言笑, 人莫測其際。 嚴於隄防, 近昵未嘗假以色辭, 服事左右者, 咸祗栗惴惴, 至其休沐日, 亦不敢橫於閭里, 於戚里貴近, 未嘗有私恩澤。 粹然無嗜慾之累, 凡聲色游畋, 宮室花卉, 自古人君所不能灑脫者, 無毫髮役志。 沖年遭罹不幸, 處變至難, 而泯然無聲跡之聞於中外, 人知其有聖德焉。 然積年有疾, 寢以益痼, 知世弟英明, 嘗欲令代理國事, 因世弟懇辭而止。 甲辰八月二十五日, 薨于昌慶宮之別殿, 春秋三十有七, 在位四年。 自都中士民, 以至深山窮谷, 莫不奔走哀號, 如喪考妣。 方寢疾, 臣僚入覲臥內, 見屛帳床褥, 皆樸素, 衣被無錦綺之屬, 及喪, 衮服無副, 凡附於身者, 多新製, 其餘可知也。 以是年十二月十六日乙酉, 葬王于楊州治南坐申向寅之原。 王妣沈氏, 贈領議政靑恩府院君 浩女, 早薨, 繼妃魚氏, 領敦寧府事咸原府院君 有龜女。 嗚呼! 王稟質旣卓異, 而受先王精一之傳, 其所得於中者, 旣極其高明矣。 燕居而龍見, 淵默而雷聲, 運至化於不言不動之際者, 固非臣民所得以窺。 第以其著見於外者言之, 尙務實之政, 絶外誘之累, 崇儉而從諫弗咈, 恤民而留心革弊, 是皆古昔帝王之盛節, 而王卽兼而有之, 然此未足以爲大也。 惟其卽位初載, 首決大策, 以主鬯之重, 託之介弟, 不但志慮深遠, 授受光明, 卒之國家有盤石之安, 社稷有靈長之休。 於是乎環東土數千里之內, 含生之類, 莫不陰受王之賜矣。 嗚呼! 豈不休哉?
吏曹參判兼大提學李德壽製進。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實錄卷之十五終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29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 [註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