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 8월 25일 을미 1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밤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井星)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丑刻)250) 에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니, 내시(內侍)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皐復)을 하고 곧 거애(擧哀)251) 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세제(世弟)가 피발(被髮)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가지고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유신 등이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 참최 변복조(斬衰變服條)에 왕세자(王世子)와 대군(大君) 이하가 피발하는 글이 있는데, 저하(邸下)가 대행 대왕(大行大王)252) 에게는 왕통(王統)을 계승(繼承)하는 의(義)가 있으니, 상복(喪服)을 변통하는 절차는 당연히 《오례의》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세제가 드디어 피발을 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덕스러운 의용(儀容)이 혼후(渾厚)하였으며,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기는 데 성효(誠孝)를 돈독히 다하였고, 어린 나이에 일찍 학문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물욕(物慾)의 누(累)도 없었다. 불행한 소조(所遭)에 걸려서 변통하며 지내는 데 지극히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그에 대해 헐뜯고 칭찬함이 전혀 중외(中外)에 들리는 바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신성(神聖)한 덕(德)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을 이루었고 깊어갈수록 더욱 고질화해서, 즉위한 이래로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데 게을리하였고 조회에 임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정사를 여러 아랫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그런데도 승하하신 날에는 뭇 신하들과 백성이 달려와 슬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 그 애통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애통해 하였고 공경(恭敬)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공경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26면
  • 【분류】
    왕실(王室)

  • [註 250]
    축각(丑刻) : 오전 3시경.
  • [註 251]
    거애(擧哀) : 발상(發喪).
  • [註 252]
    대행 대왕(大行大王) : 대행(大行)은 왕이나 왕비가 승하(昇遐)한 뒤 아직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여기에서는 경종을 가리킴.

○乙未/夜, 流星出昴星下, 又出井星上。 丑刻, 上昇遐于環翠亭, 內侍乘屋復, 乃擧哀。 禮曹以世弟被髮當否, 問議儒臣, 儒臣等言: "《五禮儀》斬衰變服條, 有王世子、大君以下被髮之文。 邸下於大行大王, 有繼體之義, 變服之節, 宜依《五禮儀》擧行。" 世弟遂被髮。 上天性慈仁, 德容渾厚, 事仁顯王后誠孝篤摰, 沖齡學問夙成, 且無物慾之累。 雖遭罹不幸, 處變至難, 而泯然無聲迹毁譽, 聞於中外, 人以爲有神聖之德焉。 然積憂悸成疾, 浸以益痼, 卽位以來, 聽事怠倦, 臨朝淵默, 委政群下, 而昇遐之日, 群臣百姓, 莫不奔走悲號, 嗚呼! 其可謂未施哀於民, 而民哀之, 未施敬於民, 而民敬之者歟!


  • 【태백산사고본】 7책 1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26면
  • 【분류】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