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유에게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시키고 수령은 2년 내에 이동하지 못하게 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백관의 조참(朝參)007) 을 받았는데,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오랫동안 정체된 영남(嶺南)의 인재를 발탁하고, 서북의 문관(文官)·무사(武士) 중에 재질과 문지(門地)가 있는 자는 모두 청환(淸宦)의 길을 터 주어 등용하게 하소서. 대사성 이진유(李眞儒)는 직무(職務)에 심력을 다하여, 선비들이 유풍(儒風)에 쏠려 정돈되는 효과가 제법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컨대 선조(先朝)의 사례에 따라 비록 다른 관직으로 옮기더라도 늘 본직(本職)에다가 대사성을 겸임케 하여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책임을 이루도록 하소서. 승문원(承文院)은 참하관(參下官)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임인년008) 과방(科榜) 이전에 출신(出身)009) 한 승문원 관원을 모두 서반(西班)으로 보내어 6품으로 올려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은 백성을 친근히 하는 관원이므로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이는 백성을 안정하게 하고 나라를 굳건히 하는 논의입니다. 요즘에 문관을 수령으로 내보내어 외방의 민사(民事)를 익혀 알도록 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나, 채 한 해도 못 되어 문득 곧장 내직(內職)으로 옮겨서 오래도록 맡겨서 책임을 이루려는 뜻이 없고 영송(迎送)하는 데 따른 폐단만 끼칠 뿐입니다. 마땅히 이제부터는 법식을 정하여 2주년 안에는 이동(移動)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 말하기를,
"경비는 고갈(枯竭)되고 저축은 탕진(蕩盡)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청컨대 돈을 주조(鑄造)하는 것이 마땅한가 않은가를 대신에게 물어 보소서."
"신들도 일찍이 이 일을 안된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호조(戶曹)의 저축이 고갈되어 당장 이어 가기가 어려우니, 앞으로 일체 막을 수만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선조(宣祖)의 왕손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나이 이제 89세이니,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별도로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사과(副司果) 이진수(李眞洙)가 반열에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은 인주(人主)의 수족(手足)이고 대간(臺諫)은 인주의 이목(耳目)인데, 만약 서로 저항만을 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현상이 못됩니다. 그런데 국옥(鞫獄)이 있은 이후로 대신과 대간이 마치 대립해 겨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서로가 정신을 모아서 서로 과격한 일이 없도록 하고, 전하께서도 그 양단(兩端)을 잡아서 대간의 말이 옳으면 대신을 개유(開諭)하여 대간의 말을 따르도록 하고, 대신의 말이 옳으면 대간을 개유하여 대신의 말을 따르도록 한다면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근래에 더러는 아침에 대신의 말을 듣고 따랐다가도 저녁에는 대간의 말을 듣고 고치는 등 한 가지의 일을 놓고 따랐다 거절하였다 하는 일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뭇 신하들이 정당한 표준이 없어서 의논만 분분하여 갈수록 서로 격화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진수가 또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한 번 늦추고 한 번 당김이 각기 그 마땅함이 있어야 합니다. 형살(刑殺)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관인(寬仁)으로써 구제하여야 하고, 눈과 서리가 내린 뒤에는 반드시 따스한 봄날이 이어지듯이, 이제 국옥(鞫獄)을 거의 다 결말을 지었으니 마땅히 하늘을 본받는 정사를 펴야 합니다. 더구나 천시(天時)가 바야흐로 정월(正月)로 새 봄에 속한 만큼, 인사(人事) 역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야 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한 덕을 힘써 베풀어서 백성을 휴양(休養)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그리고 근래 탄핵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도 관대한 뜻을 점차 보이도록 하소서. 대개는 이들이 흉당(凶黨)의 문에 드나들다가 더러는 흉당과 혼인을 함으로 해서 논박을 받은 자가 매우 많은데, 역절(逆節)이 발로되기 전에야 그가 역적임을 어떻게 알고 그들을 거절하겠습니까? 무변(武弁)이 당시의 재상집에 드나드는 것은 곧 예사로운 일인데, 간혹 그 종적이 의심스러운 데가 보인다하여 동료들이 서로 헐뜯음으로 해서 이에 ‘아무개 적(賊)과 친밀하여 종적(蹤跡)이 은밀스러웠다.’ 하며, 일필(一筆)로 결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으니, 어찌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성명(姓名)이 국초(鞫招)에 나오지 않아 죄상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는 비록 일찍이 무거운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일체 구속하지 말고 이전대로 거두어 써야 타당하다고 보며, 또한 대각(臺閣)의 신하로 하여금 밝히기 어려운 일은 가벼이 논하지 말게 하여 조정의 충후(忠厚)한 뜻을 본받게 하도록 하소서.
외방(外方)의 유생(儒生)에 있어서는 비록 평상시에도 논의(論議)의 파문에 따라 해괴한 거조가 없지 않은데, 삼수(三手)010) 의 음모(陰謀)를 어떻게 사람마다 다 알 수 있기에 근일 향교와 서원에서 시기를 타고 죄를 성토하며 죄벌(罪罰)과 삭적(削籍)이 분분하여 사습(士習)이 평온하지 못하고 인심이 진정되지 않는 것은 유달리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진실로 의당 각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유생들을 타일러서 안정에 힘쓰고 분요(紛擾)함이 없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서원(書院)의 폐단은 의논하는 자들이 말해 온 지가 오래나, 근래에 와서 여러 고을에 서원을 세우지 않는 곳이 없고 서원치고 사액(賜額)을 걸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미 향민(鄕民)의 병정 편입을 모면하는 곳이 되었는가 하면, 또 수령이 수레를 보내어 물자를 보조하여야 하는 폐단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식한 선비들이 여기에 의부(依附)함을 빙자하여 서로 수탈을 일삼아 하나의 싸움터가 되고 있는지라, 지식이 있는 자는 그윽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비록 경화(更化) 이후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를테면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의 도덕과 학문은 조정에서 높이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한 곳이라도 서원을 건립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또한 여러 곳에 중첩해 세워서 폐단을 끼쳐서도 아니됩니다. 더구나 도학이 윤증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드러낼 만한 절의(節議)도 없는 자라면 비록 조정에서의 사업과 가정에서의 학행(學行)이 있다 한들, 어떻게 쉽사리 사액을 내려 사전(祀典)의 소중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해마다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마을마다 시름과 고통속에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곤란을 구제하고 백성들의 힘을 펴 줄 만한 한 가지의 사안, 한 가지의 계책도 아직 세우지 못한 채, 서원이란 아무 보탬도 없는 일일 뿐 막기 어려운 폐단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는 요청만 해오면 문득 허락해 주곤 하니, 신은 적이 개연(慨然)해 하는 바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서는 유종(儒宗)이나 사절자(死節者)가 아니면 비록 이미 사액한 서원일지라도 그것을 일체 환수하고, 아직 사액하지 않은 서원은 이를 방지하며, 비록 윤증 같은 이의 서원일지라도 한 곳만 사액하고 그 외에는 역시 중첩된 설립은 금지함이 옳습니다."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이진유(李眞儒)가 이어 말하기를,
"윤증의 서원을 충주(忠州)·여산(礪山)·성주(星州)·밀양(密陽) 등지에 중첩하여 설립하였으니, 국가의 법령이 아주 준엄하거늘 선비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3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철훼(撤毁)한 뒤에 장문(狀聞)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박필몽(朴弼夢) 등이 조정의 의논을 주도하면서 옥사(獄事)를 다스리고 사람을 논박함에 있어 참혹하고 각박한 쪽으로 주력하였으나, 유독 이진수(李眞洙) 만은 이를 걱정하여 너그럽고 공평한 논의를 펴므로, 식자(識者)가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9면
- 【분류】사상-불교(佛敎) / 사법(司法) / 윤리-강상(綱常) /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금융-화폐(貨幣)
- [註 007]조참(朝參) : 매달 초5일, 11일, 21일, 25일, 네 차례 모든 문무 관원이 검은 옷[黑衣]을 입고 임금을 문안하고 정사를 아뢰던 일.
- [註 00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009]
출신(出身) :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섬.- [註 010]
삼수(三手) : 삼종(三種)의 수법(手法)이란 말. 즉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를 이름. 대급수는 용사(勇士)를 시켜 칼을 품고 궁중(宮中)에 들어가 왕을 시해(弑害)하는 것이요, 소급수는 중국에서 사온 환약(丸藥)을 궁녀(宮女)에게 주어 음식물에 타서 왕을 독시(毒弑)하는 것이요, 평지수는 선왕(先王:숙종)의 전교(傳敎)를 위조하여 왕을 폐출(廢黜)시키는 것임.○丙戌/上受百官朝參于仁政門。 右議政李光佐請: "申飭銓曹, 振拔嶺南人才之淹滯者, 西北文官、武士有才地者, 竝通淸奬用。 大司成李眞儒, 盡心職事, 士趨、儒風, 頗有齊整之效。 請依先朝事, 雖移他職, 常令以本官兼大司成, 久任責成。 承文院參下官積滯, 壬寅榜以上出身院官, 竝送西陞六品。" 上俱從之。 光佐又言: "守令親民之官, 不可不擇。" 左議政崔錫恒曰: "此安民固國之論也。 近者以文官差送守令, 使習知外方民事, 非不好矣, 未及周歲, 輒卽內遷, 無責成之意, 貽迎送之弊。 宜自今定式, 二周年內勿許遷動。" 上可之。 戶曹判書金演言: "經費匱竭, 蓄積蕩盡, 誠無善策。 請以鑄錢當否, 詢問大臣。" 錫恒、光佐皆言: "臣等, 嘗以此事爲不可, 今則地部罄竭, 目前難繼, 將不得一切防塞矣。" 上許之。 左參贊趙泰億言: "宣廟王孫檜原君 倫, 年今八十九歲, 宜別施優老之典。" 從之。 副司果李眞洙出班啓言: "大臣, 人主之股肱, 臺諫, 人主之耳目, 若互相牴牾, 非佳象也。 自有鞫獄以來, 大臣、臺諫, 殆同角立。 自今宜聚精會神, 毋至相激, 殿下亦執其兩端, 臺言是, 則開諭大臣, 使從臺言, 大臣言是, 則開諭臺臣, 使從大臣言, 豈不美哉, 而殿下近或朝聽大臣之言而從之, 暮聽臺閣之言而改之, 一事而互相從違者, 至再至三。 此所以群下罔有表正, 而論議紛爭, 轉輾相激也。" 上曰: "當留意。" 眞洙又言: "治國之道, 一弛一張, 各有其宜。 刑殺之餘, 必濟以寬仁, 霜雪之餘, 必繼之以陽春。 今鞫獄幾盡收殺, 宜行體天之政。 況天時方屬於獻歲發春, 人事亦當有除舊布新。 願聖上, 務推寬仁之德, 以爲休養之道。 且年來被彈諸人, 亦宜稍示寬大之意。 蓋以出入凶黨之門, 或與凶黨連姻, 而被論者甚多, 逆節未發之前, 何以知其爲逆而絶之乎? 武弁出入時宰之門, 乃其常也, 而或見蹤跡疑似, 或因同輩相毁, 乃曰: ‘親昵某賊, 蹤跡陰秘’, 一筆句斷, 驅之罔測之地, 豈不冤痛之甚? 臣謂宜姓名不出鞫招, 罪狀未有執定者, 雖曾被重彈, 人倂勿拘, 如前收用, 亦令臺閣之臣, 毋得輕論難明之事, 以體朝廷忠厚之意。 至於外方儒生, 雖常時, 隨波於論議, 不無怪擧, 三手陰謀, 豈人人所可知, 而近日校院, 乘時聲罪, 罰削紛紜。 士習不靖, 人心靡定, 殊非聖世美事。 誠宜分付各道道臣, 曉諭儒生, 俾務安靜, 無爲紛鬧。 書院之弊, 議者言之久矣, 近來列邑, 無不建書院之地, 書院無不揭恩額之處, 旣作鄕民圖免簽丁之所, 又致守宰輦輸資助之弊。 甚至無識士子, 憑藉依附, 互相傾奪, 作一鬪鬨之場, 有識竊歎。 雖以更化後事言之, 若先建, 以貽弊端。 況道學不及尹拯, 又無節義可以表章者, 則雖有立朝事業, 居家學行, 豈可容易賜額, 不顧祀典之重哉? 況荐歲凶荒, 閭里愁苦, 朝廷未有一事一策, 可以恤民困、紓民力, 而不知書院爲無益之事, 有難防之弊, 隨請輒許, 臣竊慨然。 爲今之計, 非儒宗及死節者, 雖已賜額之院, 一切還收, 未賜額者防塞, 雖如尹拯書院, 一處賜額外, 亦禁疊設爲宜。" 大司成李眞儒繼言: "尹拯書院, 疊設於忠州、礪山、星州、密陽等地。 令甲甚嚴, 士子輩, 安敢乃爾? 請分付三道道臣, 撤毁後狀聞。" 上從之。 時, 李眞儒、朴弼夢輩, 主朝論, 治獄論人, 務主慘刻, 獨眞洙憂之, 有此寬平之論, 識者多之。
- 【태백산사고본】 7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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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