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을 연경에 보내어 사신 일행의 물자를 대는 상인을 혁파할 것을 청하다
자문(咨文)을 연경(燕京)에 보내어 난두(欄頭)290) 를 혁파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우리 나라의 사신(使臣)이 돌아올 때 일행 중에서 원역(員役)들이 산 물화(物貨)를 형편에 따라 품삯을 주고 수례를 빌어 더디게 가거나 빠르게 가는 것이 우리 쪽 사정에 달려 있었는데, 기사년291) 무렵부터 요인(遼人) 호가패(胡嘉佩) 등이 난두를 설치할 것을 청하여 품삯의 이익을 독점하였고, 해마다 액수(額數)를 덜고 세은(稅銀) 2천 냥(兩)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가고 머물고 지체하고 빨리 가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였고, 걸핏하면 여러 달을 체류했기 때문에 노자(路資)를 낭비하고 구갈(裘褐)292) 이 시기를 어겨 물화가 못쓰게 되어 교역(交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혹은 포자(包子)293) 를 뚫고 물화를 훔쳐 허다하게 침해한 것이 해마다 점점 더하여 인중(人衆)이 뒤섞이고, 또 몰래 서로 사고 파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 금단(禁斷)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청주(淸主)가 호부 시랑(戶部侍郞) 오이태(吳爾泰)·형부 시랑(刑部侍郞) 마이제(馬爾齊)·급사중(給事中) 무원(繆沅) 등으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역관(譯官) 한영희(韓永禧)·유재창(劉再昌)·김택(金澤)·김경문(金慶門) 네 사람을 보내 호가패·동명형(蕫名珩)·이현룡(李顯龍) 등과 함께 봉황성(鳳凰城)에서 분변하여 밝히니, 과연 자문(咨文)의 말과 같았으므로, 마침내 호가패 등의 직임(職任)을 혁파하고, 석 달동안 목에 칼을 씌워 각각 채찍 1백 대를 때렸으며, 봉황성의 성수위(城守尉)가 우리 나라의 사무를 전담하여 처리하면서도 아울러 엄중히 조사해 게보(揭報)하지 않았다 하여 전임 수위 오이도(吳爾都)에게서 이급(二級)을 박탈했다. 사신이 갈 때 무역하는 포자는 종전처럼 편리한 대로 품삯을 주고 싣게 하고, 그 진공(進貢)하는 포자는 그대로 역참(驛站)의 수레를 움직여 끌어 운반하게 하니, 난두(欄頭)의 폐단이 이로부터 비로소 혁파되었다. 당초 설치했던 것이 강희(康熙)의 뜻에서 나왔으므로 난두들이 황제의 내탕(內帑)에 세금을 바치고 궁액(宮掖)들과 결탁했던 것인데, 일단 그 이득(利得)을 잃자, 분노와 원한이 크게 일어나 헐뜯는 소리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3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
- [註 290]난두(欄頭) :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使臣) 일행의 물자를 도맡아 대는 상인(商人).
- [註 291]
○己巳/移咨燕京, 請罷攔頭, 許之。 先是, 我國使臣回還之時, 一行員役所市物貨, 隨便雇車, 遲速在我, 自己巳年間, 遼人 胡嘉佩等, 請設欄頭, 獨專雇利, 每歲除額徵稅銀二千兩。 自此行留淹速, 唯意所欲, 動滯多月, 浪費盤纏, 裘褐愆期, 廢不貿遷。 或穿包竊貨, 許多侵剝, 逐年滋加, 人衆雜遝, 且有潛相買賣之弊。 至是移咨禮部, 請加禁斷, 淸主令戶部侍郞吳爾泰、刑部侍郞馬爾齊、給事中(繆沆)〔繆沅〕 等, 査奏。 我國亦送譯官韓永禧、劉再昌、金澤、金慶門四人, 同胡嘉佩、(蕫名珩)〔董名珩〕 、李顯龍等, 辨明於鳳凰城, 果如咨文語。 遂將嘉佩等革職, 枷號三月, 各鞭一百, 以鳳凰城城守尉, 專理我國事務, 而竝不嚴査揭報, 除前任守尉吳爾都二級。 使行時, 貿易包子, 聽如前從便傭載, 其進貢包子, 仍令動驛站車, 拉運欄頭之弊, 自此始革, 而當初設置, 出於康熙之旨, 故欄頭納稅皇帑, 締結宮掖, 一失其利, 大生恚怨, 造謗無所不至云。
-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3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
- [註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