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도의 오을족보를 호타리로 이설하다
북도(北道)의 오을족보(吾乙足堡)를 호타리(胡打里)로 이설(移設)하였다. 오을족보는 단천(端川)에 있었는데, 옛날에 번호(蕃湖)들이 내왕하던 요충(要衝)이었다. 그러므로 국초(國初)에 보(堡)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오랑캐의 왕래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번호(藩胡)의 근심이 사라진 뒤로는 허진(虛鎭)이 되고 말았다. 또 지세가 매우 험하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생활할 수가 없었으므로, 불과 토병(土兵) 몇 호(戶)가 있을 뿐이었다. 호타리(胡打里)는 성진(城津)의 남쪽에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가까워 오래전부터 이설(移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런데 전(前) 감사(監司) 윤헌주(尹憲柱)가 이르기를,
"성(城)을 지킬 만한 높은 산이나 큰 내가 없고 만약 성진(城津)이 수비에 실패한다면 호타리는 형세가 고립되어 적을 방비하기 어려울 것이니, 옮기는 것은 불편합니다."
하였으므로, 묘당(廟堂)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그 이해(利害)에 대하여 물었다. 감사(監司) 한세량(韓世良)이 이르기를,
"생리(生理)가 오을족(吾乙足)에 비하여 서로 다를 뿐 만이 아니라, 성진으로부터 30리(里) 사이에 모두 12개의 고개가 있으며 곁에 험조(險阻)한 곳이 많아, 매복을 두기에 적당합니다. 장수만 적임자를 얻는다면 충분히 전승(全勝)할 수 있으니. 청컨대 이설(移設)하여 성진의 후원(後援)이 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장항(獐項) 서북(西北)에 이른바 예별덕(乂別德)이란 곳이 있는데, 그 사면은 절벽이고 큰 내가 절벽을 끼고 흐릅니다. 그리고 윗부분은 평탄하고 사방으로 바싹 접근해 있는 산봉우리도 없습니다. 여기다 불과 3백 보(步) 정도의 성을 쌓는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돌로 쌓지 않더라도 기어 오를 수도 없는 형세이며, 또한 샘물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동(梨洞)·쌍청(雙靑) 두 보(堡) 중 하나를 예별덕으로 이설(移設)하여 마천령(磨天嶺)의 후원이 되게 하소서. 만약 이설하기 어렵다면, 청컨대 단천부(端川府)로 하여금 마곡창(磨谷倉)을 예별덕으로 옮겨 양식과 무기를 많이 저장해 놓고 마천령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며, 만일 마천령이 수비에 실패할 경우 물러나 보전할 수 있는 계책으로 삼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성진은 한 진(鎭) 외에는 다시 막을 만한 곳이 없고 호타(湖打)는 산록(山麓)이 험하게 둘러 막고 있습니다. 지형(地形)이 가장 좋은 곳을 따로 선택하여 양식과 무기를 저장해 둔다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을족보는 전의 분부대로 호타리로 이설하는 것이 편리하고, 예별덕은 그리 높고 험준하지도 않으니 산성(山城)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마천령이 수비에 실패하면 탄환(彈丸)처럼 조그만 보(堡)가 후원(後援)이 될 수 없습니다. 이동(梨洞) 같은 곳을 마천령이나 상갈파(上葛坡) 등의 여러 길이 모이는 곳이고, 쌍청(雙靑)은 또 황토령(黃土嶺) 아래에 있어서 황토기(黃土岐)와 더불어 서로 보호하니 모두 옮길 수가 없습니다. 마곡창의 경우 만약 마천령의 수비를 접제(接濟)하는 것이라면 예별덕이 비교적 조금 멀기 때문에 수송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예별덕으로 물러나 보호하려는 계책이라면 영(嶺)을 버리고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은 만에 하나도 좋은 점이 없으니, 아직은 그냥 두고 마곡에는 특별히 곡물(穀物)을 더 보관하여 두었다가 긴급할 때 이용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남병사(南兵使) 신명인(申命仁)도 역시 이런 뜻으로 계문(啓聞)하여 일체로 분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9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移設北道吾乙足堡於湖打里。 吾乙足堡, 在於端川, 昔爲藩胡來往之要衝, 故國初設堡, 專爲遮胡之路, 自藩胡患息, 便作虛鎭。 又地絶險, 而土甚瘠, 人不能資生, 不過土兵數三戶而已。 湖打里在城津之南, 土厚近海, 久有移設之議, 而前監司尹憲柱云: "無高山大川, 可以城守, 若城津失守, 湖打勢孤, 難以防遏, 移之不便。" 廟議未決, 更問利害。 監司韓世良以爲: "生理比吾乙足, 不惟相懸, 距城津三十里間, 凡有十二嶺, 旁多阻隘, 宜於設伏。 將若得人, 足可全勝, 請移設, 爲城津後援。" 又曰: "獐項西北, 有所謂乂別德, 四面壁立, 大川挾流。 上則平坦, 四方無峰巒之逼近者。 築城不過三百步, 而其餘不煩石築, 無攀援之勢, 水泉亦無不足。 請於梨洞、雙靑兩堡中, 移設乂別德, 爲磨天後援。 若難於移設, 則請使端川府, 移磨谷倉於乂別德, 多儲糧械, 爲磨天之助, 倘磨天失守, 宜爲退保之計。" 備邊司覆奏曰: "城津一鎭外, 更無遮遏, 湖打山麓阻回。 另擇地形最勝處, 預儲餉械, 則自有臨難得力之道。 吾乙足堡則依前分付, 移設湖打爲便, 乂別德不甚高峻, 未可以山城論。 磨天失守, 則非彈丸小堡, 所可爲後援。 若梨洞是磨天、上葛坡等諸路摠會, 雙靑又在黃土嶺下, 與黃土歧相保, 俱不可移。 至於磨谷倉, 若是接濟磨天之守, 則乂別較遠, 轉輸不便。 若爲退保乂別之計, 則捨嶺入谷, 萬無一全。 今姑置之, 磨谷則別爲增置穀物, 以爲緩急之需。" 南兵使申命仁, 亦以此啓聞, 請一體分付,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9면
- 【분류】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