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원에서 윤헌주의 논계에 첨개하여 조어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윤헌주(尹憲柱)의 논계(論啓)에 첨개(添改)하여 조어(措語)하였는데, 이르기를,
"신이 전일에 윤헌주의 장오(贓汚)하고 불법(不法)한 죄(罪)를 논핵하여 이미 윤종(允從)을 받았습니다마는, 추후하여 듣건대 신이 논핵한 것은 윤헌주에 있어서도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대저 참람하게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인데, 그가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하나의 와상(臥牀)을 만들었습니다. 상(牀)의 양쪽 모서리에 용(龍)을 새겨서 올라 앉으면 두 용두(龍頭)가 일시에 입을 열게 하고 왜홍(倭紅)으로 칠하여 그 기교(奇巧)를 다하니, 보는 사람들이 용상(龍牀)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제도가 어상(御床)보다 넘침이 있었으니, 비록 이사명(李師命)이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지만 오히려 감히 하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감조(監造)한 자는 곧 본영(本營)의 심약(審藥)인데, 체차되어 돌아올 때 실어온 자는 본부(本府)의 아전인 김취경(金就京)이라고 이름하는 자입니다. 생각하건대 여기에 연좌된 자는 죽여도 여죄(餘罪)가 있으니, 이것이 그가 첫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청차(淸差)가 개시(開市)653) 하였을 때 그가 친신(親信)하는 조성(趙姓)의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6동(同)의 정목(正木)을 회령부(會寧府)에 영송(領送)하고, 본부(本府)의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피중(彼中)의 물화(物貨)와 환무(換貿)하게 하였으므로, 북인(北人)들이, ‘고 감사(賈監司)’라고 일컫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그가 두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본영(本營)의 성기고(城基庫)에 전해 오는 전화(錢貨)도 모두 각 고을에서 수합(收合)하여 성지(城池)를 개축(改築)할 때에 고군(雇軍)의 품삯에 대한 밑천으로 삼은 것으로, 해마다 불어나서 그 수량이 거의 만 냥(萬兩)에 이르렀는데, 1전(錢)도 남기지 않고 수량 전체를 실어 오고, 감영(監營)의 환모(還耗)654) 와 피곡(皮穀)을 덜어내어 채워서 미봉(彌綘)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세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함흥(咸興) 지옹자(地瓮子)와 선덕(宣德)의 두 진(津)에 일찍이 해망 감관(海望監官)이 있었는데, 중방(中房)으로 그 임무를 차정(差定)하고, 왕래하는 선척(船隻)을 세어서 징세(徵稅)하니, 전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은 속공(屬公)을 핑계대어 전체의 선척을 죄다 탈취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또 물금첩(勿禁帖)655) 수천여 장(張)을 만들어 군관(軍官)·색리(色吏)와 아노(衙奴)에게 발송하여 남북 연해(沿海)의 어부(漁父)들의 처소에 흩어 주고, 한 첩(帖)에 강제로 건접어(乾鰈魚) 15급(級)을 받고는 아울러 모두 배로 원산(元山)에 운반하다가 돈을 만들어 실어 왔습니다. 그런데 첩(帖)을 팔 때에 군관과 아노의 무리가 사사롭게 받은 수량은 거의 첩가(帖價)보다 넘기 때문에, 그물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는 자는 빈 손으로 돌아가기를 면하지 못합니다. 만약 첩(帖)이 없이 고기를 잡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엄중히 형추(刑推)하고 강제로 속목(贖木)을 징수하니, 해민(海民)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네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일찍이 전에 중한 값[重價]을 받고 한 여종을 회령(會寧)에 사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그가 도백(道伯)이 되자 불러들인다고 핑계대어 회령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매주(買主)를 잡아다 가두게 하고, 도로 그 종을 탈취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다섯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일찍이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에 탐독(貪黷)한 일이 한 가지만이 아니므로, 입이 있는 이는 모두 말하고 귀가 있는 이는 모두 들었는데, 오직 이 북관(北關)에서 범한 것이 가장 낭자(狼藉)합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북로(北路)를 진념(軫念)하는 것이 다른 곳보다 자별(自別)하였는데, 한낱 윤헌주(尹憲柱)의 탐학(貪虐)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을 많이 잃어 국가에 원성(怨聲)이 돌아왔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더욱 지극히 통완(痛惋)합니다.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로써 문목(問目)을 첨입하여 속히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평시 영(平市令) 홍서하(洪敍夏)·종묘 직장(宗廟直長) 이귀령(李龜齡)·사옹 직장(司饔直長) 권병(權炳)은 모두 향곡(鄕曲)의 보잘것없는 무리로서, 권흉(權凶)을 붙좇아 분수에 넘치게 사적(仕籍)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한 지 오래었으나,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송위(宋煒)·익릉 참봉(翼陵參奉) 이현기(李顯箕)는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를 때에 따라 반복하고 변환(變幻)하는 정태(情態)는 선비가 모두 대신 부끄럽게 여기니,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오중한(吳重漢)을 도배(島配)하는 일과 말단(末端)의 두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7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註 653]개시(開市) : 우리 나라와 청(淸)과의 무역을 위해 회령(會寧)·경원(慶源)에 둔 시장, 곧 북관 개시(北關開市)를 이름.
- [註 654]
환모(還耗) : 환곡(還穀)을 수납할 때 원곡(元穀) 외에 쥐·새 등에 의한 손실을 채우는 뜻으로 한 섬에 한 말씩 더 받는 일.- [註 655]
물금첩(勿禁帖) : 물금(勿禁)을 적은 문서. 곧 관아에서 특별히 면허하여 준다는 뜻을 적은 문서. 야간 통행증이나 특정인에게 금제(禁制)를 받지 않는 특권을 주기 위한 증명서.○諫院申前啓, 尹憲柱之啓, 添改措語曰: "臣於前日論尹憲柱贓汚不法之罪, 已蒙允從矣, 追後聞之, 則臣之所論, 在憲柱, 猶爲薄物細故耳。 夫僭造器用, 人臣之極罪, 其在北關也, 造一臥床, 而刻龍於床之兩角, 登坐則兩龍頭一時開口, 柒以倭紅, 極其奇巧, 見之者稱之爲龍床, 而其制有踰於御床, 雖以師命之凶猾, 猶不敢爲者也。 其時監造者, 卽本營審藥, 而遞歸時輸來者, 乃本府吏金就京爲名者也。 惟此所坐, 死有餘罪, 此其難掩者一也。 淸差開市時, 使其親信軍官趙姓人, 領送六同木於會寧府, 令本府兵房, 換貿彼中物貨, 北人至謂之賈監司。 此其難掩者二也。 本營城基庫流來錢貨, 皆自各邑收合, 以爲城池改築時, 雇軍之資者也。 年年生殖, 其數至於近萬兩, 而不遺一錢, 沒數載來, 除出營還耗皮雜穀, 塡充彌縫, 此其難掩者三也。 咸興 地瓮子、宣德兩津, 曾有海望監官, 而以其中房, 差定其任, 往來船隻, 計船徵稅, 比前倍蓰, 而或稱屬公, 全船盡奪者, 比比有之。 且作勿禁帖數千餘張, 發送軍官、色吏及衙奴, 散給於南北沿海漁父等處, 一帖之價, 勒捧乾鰈魚十五級, 幷皆船運於元山, 作錢載來, 而賣帖時軍官衙奴輩私捧之數, 殆過於帖價, 故持網入海者, 不免空手而歸。 若有無帖而捉魚者, 則拿致嚴刑, 勒徵贖木, 海民呼冤, 至今未已。 此其難掩者四也。 厥子曾前受重價, 賣一婢於會寧居人矣, 及其爲道伯也, 托以招引, 發關會寧, 捉囚買主, 還奪其婢, 此其難掩者五也。 此外曾爲湖西伯時貪黷之事, 不一而足, 有口皆言, 有耳皆聞, 而惟此北關所犯, 最爲狼藉。 況我祖宗朝以來, 軫念北路, 自別他處, 而因一憲柱之貪虐, 積失人心, 怨歸國家, 念之及此, 尤極萬萬痛惋。 請令攸司, 以此添入問目, 速爲勘處。" 又啓曰: "平市令洪叙夏、宗廟直長李龜齡、司饔直長權炳, 俱以鄕曲鄙瑣之徒, 蝨附權兇, 濫通仕籍, 人之嗤點, 久而未已。 禁府都事宋煒、翼陵參奉李顯箕, 行身處事, 隨時反覆, 變幻情態, 士皆代羞, 請竝汰去。" 吳重漢島配事及末端兩件事, 從之, 餘不從。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7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註 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