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신 윤선거·윤증의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다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회복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욱(黃昱) 등과 양호(兩湖)의 유생(儒生) 김수귀(金壽龜) 등의 상소(上疏)를 품처(稟處)하라는 명으로 인해 복주(覆奏)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두 현신(賢臣)의 도덕(道德)·학문(學問), 행의(行誼)·지절(志節)은 진실로 여러 조정에서 예로써 존경하였고, 한 시대에서 종앙(宗仰)하던 바인데, 이제까지 구무(構誣)하는 말은 오로지 흉적 신구(申球)와 역적 김창집(金昌集) 무리의 어진이를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음계(陰計)에서 나왔습니다. 경외(京外)의 장보(章甫)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호유(呼龥)한 것이 수만 마디의 말뿐이 아니었으니, 이것은 한 나라의 공송(公誦)하는 여론(輿論)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개진(開陳)하여 변석(辨釋)한 것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다시 남음이 없었으니, 신 등은 다시 조목을 나누어 논열(論列)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수십 년 이래로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하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堅持)하시는 바가 지극하여 좌우(左右)에서 현혹시키는 데에 흔들려 빼앗긴 적이 없었습니다.
재신(宰臣)의 상소(上疏)에 답한 비지(批旨)에, ‘그 유소(儒疏)에서 말한 것은 근사함을 보지 못하겠는데, 어찌 무훼(誣毁)하는 죄목에 곧장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하교는 일성(日星)과 같이 빛났으니, 말초(末梢)의 처분(處分)이 우리 선왕(先王)의 본의(本意)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단연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두 현신(賢臣)을 원수같이 보았다 하니, 처음에는 감히 무훼(誣毁)의 침척(侵斥)을 가하지 못했는데, 얕은 데에서부터 깊이 들어가서 반드시 선정(先王)을 해치려는 계책을 이루니, 여러 사람의 말에 이끌려 마침내 증모(曾母)가 투저(投杼)하는 것과 같은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월(日月)의 밝음이 하루아침에 돌이켜 살필 것을 두려워하여, 무릇 송사와 변정(卞正)에 관계된 소장은 국가의 금령을 베풀어 한결같이 모두 퇴각(退却)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끝내 한 가지의 사실(事實)도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중외(中外)에서 억울(抑鬱)해 하는 바가 오래 될 수록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아! 한 번 사문(斯文)이 윤상(淪喪)하면서부터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흉역(凶逆)의 형세가 점차 하늘에 사무치게 되고,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고(黨錮)의 화(禍)411) 가 일어나서 한(漢)나라가 망하였고, 위학(僞學)의 금령(禁令)412) 이 나와서 송(宋)나라가 전복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삼아 우리 조정의 옛일로써 말하면,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모두 간임(奸壬)의 구함(構陷)을 받아 중종(中宗) 선조(宣祖) 양묘(兩廟)의 세상에서도 오히려 후명(後命)의 화(禍)와 추탈(追奪)하는 원한을 면치 못하였는데, 인종(仁宗)과 인조(仁祖)께서 설원(雪寃)하고 복관(復官)하셨습니다. 일찍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었다 하여 중난(重難)하게 여기지 마시고 시원하게 공의(公議)를 따르소서.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오직 두 임금께서 이미 시행하신 의전(懿典)에 있습니다. 송(宋)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이 논한 바 ‘왕안석(王安石)과 여조겸(呂祖謙)이 건의(建議)한 바는 선제(先帝)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니, 이것을 불에 타는 이를 구제하고 물에 빠진 이를 건지는 것과 같이 고치라.’고 한 것은 바로 오늘날을 위하여 준비(準備)한 말입니다. 한결같이 경외(京外)의 유생(儒生)들이 청(請)한 바에 의하여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은 모두 그 관작(官爵)과 증시(贈諡)를 회복하고, 원액(院額)을 다시 설치하고, 문집(文集)의 간행(刊行)을 윤허하심이 마땅하니, 이로써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分付)하여 즉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3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상-유학(儒學)
○復故儒臣尹宣擧、尹拯爵諡。 備局因館學儒生黃昱等及兩湖儒生金壽龜等疏稟處之命, 覆奏曰: "竊惟兩賢臣道德ㆍ學問、行誼ㆍ志節, 實是累朝之所尊禮, 一代之所宗仰, 而向來構誣之言, 專出於凶球賊集輩, 戕賢病國之陰計。 京外章甫, 首尾血籲, 不啻累萬言, 此莫非一國公誦之輿論。 其所開陳辨釋, 明白痛快, 無復餘蘊, 臣等無所事於更爲條列, 而第伏念我先王數十年來, 父師輕重之敎, 終始堅持, 靡所撓奪於左右熒惑者, 至矣盡矣。 若其答宰臣之疏批, 未見其近似於儒疏所云, 何可直驅於誣毁之目之敎, 昭揭日星, 則末梢處分之非出於我先王本意, 斷可見矣。 雖以逆集之仇視兩賢臣, 初不敢加以誣毁之斥, 而由淺入深, 必售其毒正之計, 三至之言, 竟至慈母之投杼, 而猶恐日月之明, 一朝回察, 凡係訟卞疏章, 設爲邦禁, 一竝退却, 致令士林, 終不得一暴事實, 中外之鬱抑, 愈久冞切矣。 噫! 一自斯文之淪喪, 人心世道, 晦盲錮塞, 馴致凶逆滔天, 宗社幾亡, 可勝痛哉! 黨錮之禍作, 而漢室底亡, 僞學之禁出, 而趙宋覆邦。 後轍之所當戒者, 其不在玆? 試以我朝古事言之, 先正臣文正公 趙光祖、文簡公 成渾, 俱被奸壬之構陷, 中、宣兩廟之世, 尙不免後命之禍, 追奪之冤, 而孝陵、長陵雪冤復官。 曾不以事關先朝, 有所留難, 快從公議。 今日之所當法者, 唯在兩聖已行之懿典。 宋臣司馬光所論王、呂所建, 非先帝本意者, 改之如捄焚拯溺, 正是爲今日準備語也。 一依京外儒生所請, 故儒臣尹宣擧、尹拯, 竝復其官爵贈諡, 還宣院額, 許刊集板宜當。 以此分付該曹及該道, 劃卽擧行何如?" 傳曰: "允。"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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