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이제가 이희조를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청하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다. 집의(執義) 이제(李濟), 사간(司諫) 정해(鄭楷),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광보(李匡輔), 교리(校理) 이명의(李明誼)·여선장(呂善長), 부교리(副校理) 유필원(柳弼垣), 수찬(修撰) 김시환(金始煥), 부추찬(副修撰) 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 등이 먼저 합계(合啓)를 윤종(允從)하라는 뜻으로 서로 잇따라 힘들게 간쟁(諫爭)하였으나, 임금은 다만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고, 혹은 발락(發落)이 없기도 하였다. 또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는 일을 독주(讀奏)하였으나, 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잇따라 진달하였는데, 한낮이 되었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좌우를 돌아보고는 아득히 개납(開納)하는 것이 없자, 여선장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연묵(淵默)375) 이 너무 지나치신데, 신은 감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그 말을 약간 거론하여 말하기를,
"연묵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헌관(憲官)이 이어서 전계(前啓)를 읽으니, 이기지(李器之)의 노적(孥籍)과 임욱(任勗)을 원배(遠配)하는 두 계사를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새로 아뢰기를,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이희조(李喜朝)는 변혜(辯慧)376) 의 작은 지모(智謀)를 믿고 장구(章句)의 보잘것없는 기예(技藝)로 수식하니, 사람들이 간혹 유자(儒者)로 지목하고, 그도 또한 고도(高蹈)로 자처(自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요사스럽고 간악한 도둑으로서, 무릇 어질고 올바른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침에 있어서 몰래 주관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차자로 자질구레한 기록을 올리고 섬기던 바의 신(神)과 지키던 법(法)에 이르러서는 기량(伎倆)이 완전히 드러나, 위로는 선왕(先王)의 밝음을 속이고 아래로는 역적 구(球)의 광대가 되었는데, 마침내 사화(士禍)는 기세(氣勢)가 하늘까지 넘쳐서 선류(善類)는 자취를 감추어 거의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였으니, 말을 한다면 마음아프다 이를 만합니다. 지난해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잡고 군부(君父)를 협박하자 정유(庭籲)는 곧 중지되고 천위(天位)는 장차 허물어지려 하였으니, 무릇 이륜(彛倫)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새매가 참새를 내쫓는 의거(義擧)에 크게 용기를 내려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희조는 벼슬이 대각(臺閣)의 장관(長官)에 있으면서 끝내 강상(綱常)의 분의(分義)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이명·김창집 두 역적과 정지(情志)를 은밀히 맺고 성세(聲勢)를 몰래 연결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며 국가의 요인(妖人)입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이홍술(李弘述)을 노적(孥籍)하는 일과 이빈흥(李賓興)을 국문(鞫問)하는 일을 그대로 따르고, 그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몸을 조금 돌려 오줌을 누므로 여러 신하들이 잠시 물러 가려고 하자 임금이 물러가지 말라고 명하였다. 파할 즈음에 이거원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급암(汲黯)을 만날 때 관(冠)을 쓰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 전하께서 소피를 보실 때 하교(下敎)하지도 않으셨고 환시(宦寺) 또한 서로 알린 일이 없었으니, 이는 신료(臣僚)를 접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3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신분(身分) / 가족(家族)
- [註 375] 연묵(淵默) : 침착하고 말이 적음.[註 376] 변혜(辯慧) : 말주변이 좋고 지혜가 있음.
○三司請對。 執義李濟、司諫鄭楷、掌令李景說、獻納李眞淳、持平李巨源、正言具命奎ㆍ李匡輔、校理李明誼ㆍ呂善長、副校理柳弼垣、修撰金始㷜、副修撰李顯章ㆍ權益淳等, 先以合啓允從之意, 相繼苦爭, 上只答以勿煩, 或無發落。 又讀奏頤、集孥籍事, 又答以勿煩。 諸臣交口迭陳, 日向午, 猶不退。 上欠伸, 顧左右邈然無所開納, 善長曰: "殿下淵默太過, 臣不敢知。" 上卽微擧其言曰: "淵默太過?" 憲官仍讀前啓, 器之孥籍、任勗遠配, 兩啓從之, 其餘不從。 新啓曰: "門黜罪人李喜朝, 挾其辯慧之小智, 文之以章句溥藝, 人或目之以儒者, 渠亦自處以高蹈, 而性本回邪奸賊, 凡於戕賢毒正, 無不陰主。 至於箚上瑣錄, 而其所善神護法, 伎倆畢露, 上以欺先王之明, 下以爲賊球之倡, 卒之士禍滔天, 善類屛跡, 幾乎國不爲國, 言之可謂痛心。 昨年權凶柄國, 迫脅君父, 庭籲旋輟, 天位將圮, 凡有秉彝之心者, 孰不明目張膽於鷹鸇逐雀之義, 而喜朝官在臺閣之長, 終無一言及於綱常之分。 頤、集兩賊, 情志密結, 而聲勢潛連, 此實斯文之亂賊, 國家之妖人。 請極邊遠竄。" 上不從。 諫官申前啓, 弘述孥籍事、李賓興鞫問事, 從之, 其餘不從。 是日, 上對群臣, 小回身放溺, 諸臣欲暫退, 命勿退。 臨罷, 巨源趨而進伏曰: "漢 武帝見汲黯時, 不冠不見。 俄者殿下小避時, 不爲下敎, 宦寺亦無相告之事, 此有歉於待臣僚之道矣。"
-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3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신분(身分) / 가족(家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