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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 6권, 경종 2년 1월 15일 신축 2번째기사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사직 정형익·설서 송인명 등이 상소하여 사친을 추보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사직(司直)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낳아주신 사친(私親)에 대하여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시고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시는 것은 진실로 인정(人情)입니다. 다만 즉위하신 이래 숭봉(崇奉)하는 한 가지 일을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한 것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만 선왕(先王)의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절(嚴截)하였으므로, 의리가 있는 바 정(情)이 가리워졌을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선왕의 신하가 아니었던 자가 없는데,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감히 제멋대로 오늘날 전하의 앞에서 번거롭게 청할 수 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고치지 않아야 효(孝)라고 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생전에 섬기듯 한다.’ 하였는데, 이를 풀이하는 자가, ‘계지술사(繼志述事)014) 하는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경전(經傳)을 충분히 읽으셨고, 계지술사하여 3년 동안 고치지 않는 도리에 있어서도 대개 일찍이 체험하고 실천하셨는데, 어찌 조정의 의논에 이끌려 갑자기 계지술사하는 성의(盛意)를 변개(變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대내(大內)에서 예전에 세운 사우(祠宇)에다 그 공향(供享)하는 의절(儀節)을 풍성하게 한다면, 사정(私情)을 펼 수 있고 선왕의 뜻에도 어긋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우(祠宇)를 세우고 칭호를 정하는 것을 공조(公朝)에서 창도(唱導)하고, 제향(祭享)과 모든 제수(祭需)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봉(供奉)하게 하되, 단지 ‘정례(情禮)에 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다.’ 하며 대의(大義)가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생각하건대 마침내 선왕(先王)의 뜻을 준수하는데 부족함이 있게 될 듯합니다. 아! 선침(仙寢)을 아직 거두지 않았고 옥음(玉音)이 여전히 들리는 듯한데,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들은 다만 전하에게 아첨하려고만 하여 선조(先朝)를 경계하고 꺼릴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요행히 듣기에 좋도록만 바라고 총애를 굳히려 하고 있습니다. 저 김일경(金一鏡) 이하는 진실로 말할 것도 못됩니다만,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오늘날 대신(大臣)이 된 자들도 따라서 부화뇌동하여 주달(奏達)하는 즈음에 한 마디 위복(違覆)015) 함이 없었으니, 훗날 지하(地下)에서 장차 무슨 말로 선왕께 대답하겠습니까?"

하고, 설서(說書)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기를,

"아들이 어머니에게 작위(爵位)를 줄 수 없음은 예경(禮經)의 대방(大防)이니, 칭호(稱號)는 마땅히 추가(追加)할 수 없습니다. 제후(諸侯)는 두 묘우(廟宇)를 세울 수 없음은 성인(聖人)의 명백한 가르침이니, 묘우는 마땅히 따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예법(禮法)이 엄격함은 백대(百代) 왕들의 누습(陋習)을 죄다 씻어버렸는데, 선조(宣祖)창빈(昌嬪)에 대해서016)인조(仁祖)인빈(仁嬪)에 대한 은의(恩義)의 중대함이 어찌 낳아준 분과 차이가 있었겠습니까마는, 또한 모두 예전 칭호를 그대로 따르고 추가하지 않았으며, 사묘(私廟)에 제향(祭享)하고 또한 따로 묘우를 세운 것이 없었으니, 성조(聖祖)의 아름다운 법규(法規)야말로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우러러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3년 동안 고칠 수 없는 의리가 더욱 특별한 것이 있으니, 명현(名賢)의 의논을 또한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사정(私情)으로 말한다면 그 보답을 극진히 하는 것이 옳으나 공의(公義)로 말한다면 융숭하게 보답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안에서 말한다면 그 받드는 일을 극진히 하는 것이 옳으나 바깥에서 말한다면 융숭하게 보답하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전하께서는 성대한 덕과 지극한 효성으로 예(禮)의 뜻을 깊이 알고 계시므로 그 낳아준 은혜에 대하여 어찌 추보(追報)하는 정성을 소홀히 하시겠습니까마는, 사정(私情)을 억제하셔서 처분(處分)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애모(哀慕)하고 슬퍼하시는 마음을 조용히 침묵하고 계시는 가운데 항상 드러내신 채 외정(外廷)을 번거롭히려고 하지 않으시고 대내(大內)에서 보사(報祀)하는 전례(典禮)에 성의(誠意)를 다하려고 하셨으니, 선유(先儒)의 이른바, ‘정(情)에서 나와 예의(禮義)에 그쳤다.’고 한 데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선왕을 따르는 덕에 빛이 나지 않겠으며, 다함이 없는 생각에 흠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깝습니다. 사람들의 견해는 같지 않고 의리(義理)는 무궁한데, 이에 유독 사친(私親)을 추보하는 것을 천리와 인정에 부합된다고만 여기고, 뜻과 행동을 살펴보고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음이 바야흐로 참된 천리와 인정이 됨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시고 가법(家法)을 삼가 지키시어, 안으로는 사정(私情)을 온축(蘊蓄)하시고 밖으로는 공의(公義)을 헤아리시어 후세의 공의(公議)를 초래하지 않게 하소서."

하고, 사과(司果) 박필정(朴弼正)도 또한 상소하여 추보하는 것은 예(禮)에 어긋난다고 논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일경(金一鏡)이 맨먼저 숭봉(崇奉)해야 한다는 의논을 건의(建議)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쏠려서 따르며 감히 바른 말로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송인명이 이에 분개하여 이미 자리를 벗어나 진소(陳疏)하고 또 《사묘사의(私廟私議)》를 저술하였는데, 문답(問答)하는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숭봉(崇奉)하는 의절(儀節)을 논하는 자는, ‘아들이 천승(千乘)의 지위에 있으니 낳아준 사친(私親)에게 어찌 작명(爵命)을 더할 수가 없겠으며, 아들이 한 나라를 누리고 있으니 낳아준 사친에게 어찌 묘우(廟宇)를 세워 봉공(奉供)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그 말은 진실로 인정에 가깝지만, 경전(經傳)을 고구(考究)하고 성현(聖賢)에게 질정(質正)해 보면,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별묘(別廟)를 세움이 예에 어긋남은 ‘아들은 부모에게 작명(爵命)을 더할 수 없다.’는 말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고, ‘작질(爵秩)의 명(命)은 폐하(陛下)께서 감히 더하실 것이 아닙니다.’는 말이 정자(程子)의 상소에 보이며, ‘서모(庶母)는 마땅히 사실(私室)에서 제사지내야 한다.’는 말이 예경(禮經)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고, ‘제후(諸侯)에게는 두 사람의 적실(嫡室)이 없으니 응당 묘우(廟宇)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이 선유(先儒)의 설(說)에 나오니, 이에서 작호(爵號)를 마땅히 추가할 수 없음과 묘우를 마땅히 따로 세울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작호를 추가하고 묘우를 세워 사친(私親)을 숭봉하는 것은 과연 자식된 도리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나, 인정에 마땅하고 천리에 부합된다면, 성현(聖賢)이 어찌하여 꼭 이런 설을 세워서 억지로 높고 아득하여 행할 수 없는 인정을 거스르고 천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만들었겠는가? 진실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근본이 없으니, 의리에 있어서 압제(壓制)받는 바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효(孝)란 성례(誠禮)를 귀하게 여기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명(爵命)을 더함이 이미 본분(本分)에서 벗어났다면 더럽히는 데 관계되니 존숭(尊崇)하는 바가 아닌 것이며, 묘우를 세움이 도리어 두 묘우가 있게 된다는 혐의가 있다면 참람스러운 데 가깝게 되니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작명이 나에게서 나와 사친(私親)에게 더해진다면 신하와 같은 경우가 아닌데, 군명(君命)으로 사친에게 영화로움을 미루어 주는 것이 되며, 사사롭게 제사지내지 않고 공적으로 봉공(奉供)한다면 첩모(妾母)임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대대로 제사를 지내어 아들에게서 그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정당하게 정해진 이름이 없이 존숭하여 도리어 성실하지도 못한 채 의리를 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본분을 그대로 지켜 신하로 대우하지 않는 의리를 밝힘이 나을 것이며, 마땅히 세울 수 없는 묘우에 제사지내어 도리어 혐의를 무릅쓴 채 예를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실(私室)에다 제사지내며 두 가지 근본이라는 혐의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부터 명철(明哲)한 임금도 사친(私親)을 존숭하여 「황(皇)」이니 「후(后)」이니 하며 태묘(太廟)에 올려 합사(合祀)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가벼운 경우 또한 모두 따로 작호(爵號)를 더하고 그 옛날 그대로 하며 전혀 변동이 없는 자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저들 또한 어찌 예(禮)를 전혀 몰라서 그러하였겠는가?’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라는 것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삼대(三代)017) 이후로 세도(世道)가 점점 강하(降下)되어 예교(禮敎)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으니, 시군 세주(時君世主)가 비록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이 있고 세상에서 뛰어난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옛 성인(聖人)께서 예를 제작한 본뜻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진실을 다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사정(私情)을 따르며 이치로 스스로 극복(克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漢)나라 소제(昭帝)·선제(宣帝)의 명철(明哲)함과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현철(賢哲)함으로도 예를 어겨서 숭봉(崇奉)하여 선유(先儒)의 「두 근본」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삼대(三代)의 성치(盛治)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광무제(光武帝)가 사친의 묘우(廟宇)를 세우지 아니하였던 것018) 과 장제(章帝)가 단지 적수(赤綬)019) 만을 더하였던 것과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착한 것을 밝힌 법령에 기록한 것과 송나라 영종(英宗)이 「백부(伯父)」라고 일컬었던 것020) 과 같은 경우들은 그 당시에 은혜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후세 사람들도 모두 예(禮)를 알았던 것이라고 일컬었다.

우리 선조(宣祖)께서 창빈(昌嬪)을 대우하신 것과 인조(仁祖)께서 인빈(仁嬪)을 대우하신 것에 이르러서도 어찌 근본에 대하여 보답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였겠는가마는, 추가(追加)하는 전례(典禮)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 인주(人主)가 스스로 기필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신하들이 그 임금에게 기대하는 것도 어찌 그 예에 합당한 것을 버리고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취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창빈(昌嬪)인빈(仁嬪)선조인조에 대하여 친속(親屬)이 조모(祖母)의 관계가 되니, 참으로 나를 낳아준 친모(親母)와는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창빈은 참으로 선조의 조모이나, 인빈은 유독 원종(完宗)의 어머니가 아니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원종(元宗)은 이미 추숭(追崇)하여 왕(王)이 되었으니, 또 어찌 다시 그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당저(當宁)021) 께서 낳아주신 분을 추보(追報)하려고 하는 바와는 너무나도 같지 않은 경우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禮)란 것은 천서(天敍)022)천질(天秩)023) 이니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도 없고 구구(區區)한 사의(私意)로 올리거나 낮출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인군(人君)의 사친(私親)에게 과연 작위(爵位)를 추가하고 묘우를 따로 세울 수 있는 것이 바야흐로 숭봉(崇奉)하는 도리에 합당하다고 한다면, 원종(元宗)은 추숭(追崇)한 뒤에 또한 한 사람의 인군이 되었으니, 인빈(仁嬪)은 곧 군주의 사친(私親)이므로, 오늘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어찌 추숭한 임금이라 하여 감쇄(減殺)하는 바가 있고 당저(當宁)의 임금이라 하여 높이는 바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아니하여 사친을 숭보하는 것이 반드시 예에 합당하지 않다면, 원종께서 인빈에게 더하지 못하였던 것을 당저(當宁)께서도 아마 마땅히 낳아준 분에게 더하지 못하였을 듯하다. 만약 반드시 「원종은 추숭하여 임금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그 사친(私親)께 추보(追報)하지 못하였으나, 당저(當宁)께서는 자신이 군위(君位)에 계시니, 어찌 낳아준 분을 숭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추보(追報)하는 한 의절(儀節)을 선군(先君)에게는 박하게 하고, 현재의 임금에게는 후하게 하는 것이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천리(天理)를 멸절(滅絶)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어린아이의 견해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덕흥(德興) 또한 선조(宣祖)의 사친이지만 퇴도(退陶)024) 가 이미 대원군(大院君)으로 추가함을 긍정하였고, 율곡(栗谷)025) 도 사친을 끊을 수 없음을 대단히 말하였으니, 선유(先儒)가 추보하는 것에 대하여 논한 바가 또한 어찌 언제나 그 박한 것만을 따랐겠는가?’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덕흥군(德興君)은 덕흥(德興)이란 본래 있던 작호인데, 「대(大)」 한 글자를 더하여 여러 종친(宗親)들과 조금 구별했던 것이니, 곧 그 사정(私情)을 펴면서도 천리(天理)를 해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자(程子)의 의논에서 얻은 바가 있는 것이니, 어찌 예를 어겨서 작호를 추가하는 것과 같은 말이겠는가? 고봉(高峰)026) 등 여러 사람들이 친제(親祭)해야 한다는 의논을 다툰 것은 참으로 중도(中道)에 지나친 데 가까우니, 율곡(栗谷)의 이른바 「사친은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인 것이다.

한편 나는 당저(當宁)의 낳아준 분에 대한 관계는 선조덕흥(德興)에 대한 관계와 그 친속(親屬)의 명칭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마땅히 「첩모(妾母)」라고 해야 하고 「사친(私親)」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으며, 마땅히 첩모의 예를 써서 대우해야 하고 사친의 예를 써서 대우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궁중(宮中)의 작명(爵命)은 곧 선군(先君)께서 은혜를 참작하시어 베푸신 것이니, 후왕(後王)이 어찌 마음대로 높이거나 낮출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예전부터 인군의 사친(私親)에게 오늘날처럼 전혀 칭호가 없었던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혹시 예전대로 하고 더하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마음에 편안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희빈(禧嬪)이란 옛 칭호를 그대로 쓰고자 한다면 선조(先朝)의 처분에 방애(妨礙)되는 바가 있게 되고, 그냥 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곧 한 사람의 서인(庶人)이 될 것이니, 실로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혹은 「빈(嬪)」이라 하고 혹은 「군(君)」이라 하며 따로 추가(追加)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또, 가령 당저(當宁)께 덕흥(德興)하원군(河原君)처럼 같은 어머니에서 난 친아우가 있다면, 진실로 사사(私祠)에다 제사지내게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와 같지 못하여 시사(尸祀)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또 따로 묘우를 두자는 의논이 있게 된 까닭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禮)를 논하는 자는 마땅히 예의 타당성 여부만을 살펴보아야 하니, 그 당한 바의 행(幸)·불행(不幸)은 마땅히 헤아릴 바가 아닌 것이다.

인군(人君)이 그 사친에 대하여 진실로 추존(追尊)할 수가 있다면, 다시 그 평소의 귀현(貴顯) 여부를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며, 그렇지 않다면 또한 어찌 그 지위가 없는 것에 상심하여 갑자기 예에 맞지 않는 명칭을 더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작호(爵號)가 있지 아니하고 예에 있어서 또 추존할 수 없는 것이 곧 우리 당저(當宁)의 불행이니, 오로지 그 불행을 생각하여 항상 매우 슬픈 마음을 품고 그 예에 안심하여 영원히 지나치게 높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애모(哀慕)의 정(情)을 펼 수 있는 날에 펴게 되고, 봉공(奉供)하는 의절(儀節)을 다할 수 있을 때 다하게 될 것이니, 또 어찌 반드시 규례(規例)을 어기고 의리를 범하면서 헛된 이름으로 존숭한 뒤에야 바야흐로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또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작호(爵號)에 대하여 말하는 데 서둘고 있지마는, 오히려 감히 드러내놓고 예전 작호를 마땅히 회복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조(先朝)의 처분을 능히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지키고 있는 것은 어찌 그 일이 적후(嫡后)에 관계가 있어 첩모(妾母)의 사은(私恩)을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이 의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이 의리를 안다고 한다면, 이는 선조(先朝)의 처분 전에는 빈호(嬪號)를 감히 더하지 못하는 날이 아님이 없다. 그리고 보사(報祀)하는 한 가지 의절(儀節)에 이르러서 정동(貞洞)의 옛 궁(宮)에는 이미 사옥(祠屋)이 있어 따로 꾸밈을 더하였고, 제도(制度)를 조금 사치하게 하였으니, 봄·가을의 제사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해 혹은 재결(齋潔)하여 자성(粢盛)을 올리고 혹은 첨망(瞻望)하여 애모(哀慕)의 정을 편다면 또한 그 정(情)을 다하고 예를 넘지도 않을 것인데, 또 어찌 반드시 예방(禮防)을 두지 않고 별묘(別廟)를 창건(創建)한 뒤에라야 바야흐로 효(孝)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이 의논을 내세운 자에게는 그 설(說)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옛날의 인군은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는데, 혹은 타당하기도 하고 혹은 지나치기도 하였으나, 요체(要諦)는 모두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일체 예전대로만 하고 추가(追加)하는 바가 없다면, 나는 아마도 효성에 부족함이 있고 은혜에 소홀할 듯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저(當宁)께서 낳아준 분에 대하여 어찌 숭봉(崇奉)하려는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감추어 두고 꺼내지 않은 채 군하(群下)의 공의(公議)를 기다리려고 하다가 기다린 지 이미 오래 되어 한결같이 서로 잊어버린다면, 반드시 장차 군하의 성실하지 못함을 의심하게 되어 도리어 위노(威怒)를 더하실 것이고, 한결같이 자신의 사정(私情)에 맡겨 지나친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지금 만약 숭봉하는 의절(儀節)을 조금 정하고, 지나치게 높이는 일을 천천히 쟁론(爭論)하여 사은(私恩)을 조금이나마 펴게 하고, 공의(公議)도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위로는 격발(激發)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죄를 면하는 다행스러움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모자(母子)의 은혜는 천성(天性)에 근원하고 있으며, 어버이를 높이는 정성은 억지로 시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니, 항상 예에 지나칠까 두려워하는 것이지 은혜에 야박(野薄)하게 할 것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당저(當宁)의 인효(仁孝)로써 낳아준 분에 대하여 추보(追報)하고자 하는 바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러나 성인(聖人)의 「뜻을 살펴본다.」는 가르침을 좇아 대통(大統)의 관계된 바가 중대함을 생각하고, 예(禮)를 고구(考究)하여 헛된 이름의 무익함을 알고 의리를 참작하여 사은(私恩)의 펴기 어려움을 안다면, 남몰래 가슴 아파하고 슬픔을 감춘 채 참고서 나타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유(先儒)가 이른바 「정(情)에서 나와 예의(禮義)에 그친다.」고 한 것에 들어맞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이미 그 좋은 점을 받들어 순종하지도 못하면서 이에 혹 그 은혜에 소홀할까 의심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임금을 천리(天理)의 밖에다 두고 의심하는 것이므로, 불경(不敬)스러움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 은혜란 위에서 펼 수 있는 것이고, 예란 아래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성상께서 명을 내리시지 않았는데 아래에서 먼저 청하였으니, 이는 은혜를 펴는 아름다움이 위로 돌아가지 않고 예를 잃었다는 비난이 도리어 아래에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또 속으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그 자취를 감추고 군하(群下)의 희지(希旨)027) 를 바라며 잠자코 시험해 보다가, 공의(公議)가 정론(正論)을 지키는 데 노하여 위세를 떨치는 것은 말세에 술수를 부리는 자의 소행이니, 어찌 당저(當宁)의 성명(聖明)으로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당저(當宁)께서 참으로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가 또 어찌 망령되게 천심(天心)을 엿보며 뒷날을 염려하겠는가마는, 지나치게 높이는 일을 반드시 뒤에서 다투지 아니하고 숭봉하는 의절을 앞에서 도리어 창도(唱導)하고 있으니, 아첨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무리들이 공(功)을 헤아려 이익을 도모하는 습관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앞의 말을 따른다면 임금의 잘못을 조성(助成)하여 역적(逆賊)이 되는데 가깝게 되고, 뒤의 말을 따른다면 임금의 사정(私情)에 따라 아첨하는 데 관계된다. 생각건대 아첨과 역적질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니, 두 가지 중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당저(當宁)께서는 낳아준 분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라면 방법은 있다. 한(漢)나라 장제(章帝)의 적수(赤綬)를 더한 규례(規例)를 본받아 그 의물(儀物)을 더하고, 선유(先儒)의 사실(私室)에서 제사지낸다는 가르침을 준수하여 옛 궁(宮)에서 봉공(奉供)하며, 율곡(栗谷)의, 「친림(親臨)하여 제사지낸다는 논의」에서 상량(商量)하여 혹 그 슬픔을 펴기도 하고, 백사(白沙)028) 의 「관에서 공봉한다는 의논」에서 짐작하여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의리를 해치는 작호(爵號)와 어긋나는 별묘(別廟)의 경우는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94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註 014]
    계지술사(繼志述事) : 앞사람의 뜻과 사업을 이어받음.
  • [註 015]
    위복(違覆) : 일의 의심스러운 데를 소상히 캐어 밝힘.
  • [註 016]
    선조(宣祖)의 창빈(昌嬪)에 대해서 :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아들인데, 덕흥 대원군은 중종의 후궁인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이므로, 선조는 창빈에 대하여 손자가 됨. 곧 이 관계를 말한 것임.
  • [註 017]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
  • [註 018]
    광무제(光武帝)가 사친의 묘우(廟宇)를 세우지 아니하였던 것 :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사친(四親)의 친묘(親廟)를 낙양(洛陽)에 세웠다가 장순(張純)과 주부(朱浮)의 의논을 따라 자기의 고향인 용릉(舂陵)으로 옮겨 따로 세운 것을 말함. 즉 광무제는 전한(前漢)의 황통(皇統)이 이미 끊어진 상황에서 새로 나라를 세운 것과 다름없으므로 4대 조상을 추숭(追崇)하여 황제로 하고 친묘를 세워도 불가할 것이 없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곧 사친(私親)을 높이지 않았다는 뜻임.
  • [註 019]
    적수(赤綬) : 황후(皇后)의 인수(印綬).
  • [註 020]
    송나라영종(英宗)이 「백부(伯父)」라고 일컬었던 것 : 송(宋)나라 영종(英宗)은 인종(仁宗)을 이어 제위를 계승했는데, 곧 숙질간(叔姪間)이었음. 따라서 자신은 인종의 아들이 되는 셈이므로, 친아버지인 복왕(濮王)을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어 백부(伯父)라 불렀다는 것임.
  • [註 021]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 [註 022]
    천서(天敍) : 군신(君臣)·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붕우(朋友)의 윤서(倫序)임.
  • [註 023]
    천질(天秩) : 존비(尊卑)·귀천(貴賤) 등급의 높고 낮은 품질.
  • [註 024]
    퇴도(退陶) : 이황(李滉)의 호(號).
  • [註 025]
    율곡(栗谷) : 이이(李珥)의 호.
  • [註 026]
    고봉(高峰) : 기대승(奇大升)의 호(號).
  • [註 027]
    희지(希旨) : 남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춤.
  • [註 028]
    백사(白沙) : 이항복(李恒福)의 호.

○司直鄭亨益上疏曰:

殿下於所生之親, 念鞫育之恩, 思報答之道者, 固人情也。 第自卽祚以來, 崇奉一事, 不敢輕議, 豈有他哉? 只以先王處分, 極其嚴截, 故義之所在, 情有所掩耳。 顧今在廷之臣, 莫非先王之臣子。 分義道理, 何敢肆然煩請於今日殿下之前哉? 傳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又曰: "事死如事生。" 釋之者曰: "繼志述事之意也。" 聖上熟讀經傳, 其於繼述無改之道, 蓋嘗體驗而躬行, 何可牽連廷議, 遽變繼述之盛意乎? 今若自內就其舊建之祠, 豐其供享之節, 則可以得伸私情, 無悖先旨, 而今乃立祠建號, 自公朝而倡之, 祭享凡需, 命有司而供之, 但曰情禮之不可已, 罔念大義之有所傷, 竊恐終有歉於遵先旨之道也。 噫嘻! 仙寢未撤, 玉音如聞, 而入對諸臣, 徒欲阿諛殿下, 不知嚴憚先朝, 冀幸樂聞, 以圖固寵。 彼一鏡以下, 固不足道, 受先王厚恩, 爲今日大臣者, 又從而和附之, 無一言違覆於奏達之際, 他日地下, 將何辭以對於先王乎?

說書宋寅明上疏曰:

子無爵母, 禮經大防, 則稱號不當追加也; 侯不貳廟, 聖人明訓, 則廟宇不當別立也。 我朝禮法之嚴, 一洗百王之陋, 宣廟之於昌嬪, 仁廟之於仁嬪, 恩義之重, 何間所生, 而亦皆仍其舊號, 未有追加, 祭之私廟, 亦無別建。 聖祖懿規, 豈非殿下之所當仰法者, 而況今無改之義, 尤有別焉。 名賢之議, 亦可監矣。 以私則極其報可也, 而以公則不可爲崇報之擧, 以內則極其奉可也, 而以外則不可爲崇奉之事。 唯我殿下, 盛德至孝, 深識禮意, 故其於所生之恩, 豈忽追報之誠, 而抑情制私, 未有處分。 哀慕惻怛之懷, 常寓於淵靜窅默之中, 不欲煩諸外廷, 而務盡誠意於自內, 報祀之典, 庶幾乎先儒所謂出於情, 止乎禮義者也。 豈不有光於遵先之德, 無玷於不匱之思哉? 惜乎! 人見不同, 義理無窮, 乃獨以追報私親, 爲合於天理人情, 而不及思觀志觀行, 不得不悅, 方爲眞天理正人情也。 願殿下, 深究聖訓, 謹守家法, 內蘊私情, 外裁公義, 無招後世之公議焉。

司果朴弼正, 亦疏論追報非禮, 上俱不報。 時, 一鏡首建崇奉之議, 廷臣靡然從之, 莫敢正言矯其非, 寅明憤之, 旣出位陳疏, 又著《私廟私議》, 設爲答問。 其略曰:

今之論崇奉之節者, 不過曰: "子爲千乘, 所生之親, 何可無爵命之加, 子享一國, 所生之親, 何可無廟宇之奉?" 其言誠近人情, 而考之經傳, 質之聖賢, 則《春秋》之義, 成風見譏。 別廟非禮, 子不得爵命父母, 出於《公羊》之傳; 爵秩之命, 非陛下之敢加, 見於程子之疏; 庶母當祀於私室, 著於《禮經》之訓; 諸侯無二嫡, 不應立廟, 發於先儒之說。 此可見爵號之不當追加, 廟宇之不當別立也。 夫追爵立廟, 以崇私親者, 果是子道之不可已者, 而宜於人情, 合乎天理, 則聖賢何必立說如此, 强爲高遠難行, 拂人情悖天理之論哉? 誠以人無二本, 義有所壓, 孝貴誠禮, 不得不悅。 爵命之加, 旣出本分之外, 則涉於黷而非所以尊也; 廟宇之立, 反有二廟之嫌, 則近乎僭而有乖於禮也。 爵出於我, 而加之於親, 則非若人臣以君命, 而推榮於親也; 祭不以私, 而奉之以公, 則未免妾母爲世祭, 而不止於子也。 與其尊之以無正定之名, 乃反不誠而害義, 曷若仍其本分, 而明不臣之義也; 與其祭之於不當立之廟, 乃反冒嫌而失禮, 曷若祭之私室, 而無二本之嫌也? 或言: "自古明君喆辟, 莫不尊崇私親, 稱皇稱后, 躋祔太廟。 輕者亦皆別加爵號, 未有一仍其舊, 全無變動者, 彼亦豈全不知禮而然哉?" 曰: "禮豈易言, 亦豈易知哉? 三代以後, 世道漸降, 禮敎不明, 時君世主, 雖有生質之美, 高世之行, 而至於古聖人制禮本意, 未必眞實見得, 循其私情, 不能以理自克。 雖以 之明, 仁宗之賢, 越禮崇奉, 不免先儒二本之譏, 誠不能無愧於三代之盛。 況如光武之不立親廟, 章帝之只加赤綬, 文帝之著令, 英宗之稱伯, 當世不以爲傷恩, 後人皆稱其得禮。 至於我宣廟之待昌嬪, 仁廟之待仁嬪, 豈忽報本之道, 而未有追加之典, 則豈非今日之所當法, 而人君之所以自期? 人臣之所以期其君者, 又何可捨其合於禮者, 而取其不合於禮者哉?" 或言: "昌嬪仁嬪之於兩廟, 屬爲祖母, 誠不可與生我之親母, 比而言之也。" 曰: "昌嬪誠爲宣廟之祖母, 而仁嬪獨非元宗之母乎?" 或言: "元宗, 旣以追崇爲王, 又何可更尊其私親乎? 此與當宁所以追報所生者, 逈然不同矣。" 曰: "禮者, 天敍天秩, 一定而不可易, 不可以區區私意, 有所低仰。 使人君之私親, 果可以追加爵別立廟, 而方合崇奉之道, 則元宗追崇之後, 亦一人君, 仁嬪, 乃人君之私親, 與今日無以異也。 何可以追崇之君, 而有所殺, 當宁之君而有所隆哉? 不然而崇報私親, 未必合禮, 則元宗之所不能加於仁嬪者, 當宁恐不當加於所生也。 若必曰: ‘元宗追崇爲君, 不當更報其私親, 當宁身處君位, 何可不尊其所生?’ 云爾, 則是追報一節, 薄於先君而厚於時王, 循私情滅天理, 莫此爲甚。 是眞兒童之見也。" 或言: "德興, 亦宣廟私親, 而退陶旣許大院之追加, 栗谷盛言私親之不可絶。 先儒所以論追報者, 亦何嘗從其薄哉?" 曰: "德興之君, 是德興本有之爵, 加一大字, 稍別諸宗, 乃所以伸其私情, 不害天理。 此正有得於程子之議, 豈可與越禮追爵者, 同日語哉? 至於高峰諸人, 爭親祭之論, 誠近過中, 則栗谷所謂私親不可絶者, 此也。 抑吾以爲當宁之於所生, 與宣廟之於德興, 屬稱煞有不同, 當曰妾母, 而不當曰私親, 當用待妾母之禮, 而不當用待私親之禮。 況宮中爵命, 卽先君所以酌恩而施之者, 後王何可任情而高下乎?" 或言: "自古人君之私親, 未有全然無稱如今日者, 故雖或仍舊而無所加, 可以安於心也。 今欲用禧嬪舊號, 則有妨於先朝處分, 置而不論, 便一庶人, 實有不安於心者。 此所以或嬪或君, 別欲追加者也。 且使當宁, 有同母親弟, 如德興河原君, 則固可以祭之私祠, 而今不能如此, 祀無人, 此又所以有別廟之議也。" 曰: "論禮者, 只當觀禮之當否, 若其所値之幸不幸, 非所當計。 人君之於其親, 苟可以追尊, 則不當更論其素貴與否也。 不然, 亦何可傷其無位, 而遽加以非禮之名也? 今之所以未有爵號, 禮又不可追尊者, 卽我當宁之不幸也, 惟當念其不幸, 而常懷痛怛之心, 安於其禮, 而永無過隆之擧。 哀慕之情, 伸之於可伸之日, 供奉之節, 盡之於可盡之時, 又何必越例犯義, 尊之以虛名, 然後方可以安於心也? 且今日庭議, 汲汲以爵號爲言, 而猶不敢顯然以爲舊爵之當復者, 豈不以其有先朝之處分耶? 先朝處分, 不能無不改, 而斷斷然獨於此事焉持之者, 豈不以事有關於嫡后, 而難容妾母之私恩也耶? 苟不知此義則已, 如知此義, 則是先朝處分之前, 莫非嬪號不敢加之日也。 至於報祀一節, 貞洞舊宮, 旣有祠屋, 別加增飾, 稍侈制度, 春秋之饗, 必以其誠, 或齋潔而供粢盛, 或瞻望而伸哀慕, 亦可以自盡其情, 無違於禮。 又何必不有禮防, 創爲別廟而後, 方謂之孝也?" 或言: "今之建此議者, 其說有二。 一則曰: ‘古之人君, 莫不追報私親, 或當或過, 要皆自盡, 而今若一切仍舊, 無所追加, 則吾恐其歉於孝, 而忽於恩。 此吾所以不得不言也。’ 一則曰: ‘當宁之於所生, 豈無崇奉之念, 而蘊而不發, 欲待群下之公議, 待之旣久, 一向相忘, 則必將疑群下之不誠, 而反加威怒, 任一己之私情, 而致有過擧。 今若稍定崇奉之節, 徐爭過隆之擧, 使私恩少伸, 公議不悖, 則上無激發之擧, 而下有免罪之幸矣。’" 曰: "噫! 此何言也? 母子之恩, 根於天賦, 尊親之誠, 不待勉强。 常恐其過於禮, 而不患其薄於恩。 今偶當宁之仁孝, 其所以欲報所生, 豈有極哉, 而追聖人觀志之訓, 念大統所繫之重, 考之於禮, 而識虛名之無益, 參之於義, 而知私恩之難伸, 潛傷隱痛, 忍而不發, 此正深合於先儒所謂出於情止於禮義者, 而今日廷臣, 旣不能將順其美, 乃或疑其有忽於恩, 是疑吾君於天理之外, 不敬莫大矣。 恩者, 上之所可伸, 禮者, 下之所必守。 今上未有命, 而下先爲請, 則是伸恩之美, 不歸於上, 而失禮之譏, 反在於下矣。 況且內有其心, 而外泯其迹, 望群下之希旨, 默而試之, 怒公議之守正, 威以震之者, 卽叔世任數者之所爲, 豈以當宁之聖明, 乃有此哉? 假令當宁, 誠有此事, 爲人臣者, 又何可妄窺天心, 逆慮後日, 而過隆之擧, 未必爭之於後, 崇奉之節, 乃反倡之於前, 不免爲阿意順旨之輩, 計功謀利之習哉? 由前之言, 則成君之過而近乎賊, 由後之言, 則從君之私, 而涉於諂。 惟諂與賊, 非臣之義, 二者無一是。 然則當宁所以待所生者, 如何而可也? 無已則有之, 法 加赤綬之規, 而增其儀物, 遵先儒祭私室之訓, 而奉之舊宮, 商量於栗谷臨祭之論, 而或伸其哀, 斟酌於白沙官供之議, 而必致其誠。 若其害義之爵號, 非禮之別廟, 非吾之所知也。"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94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