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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 5권, 경종 1년 11월 2일 기축 2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황해 감사 이집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최석항·조태구를 변호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집(李㙫)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에게 깊은 병이 없는데도 즉위한 원년이 갑자기 정무를 놓기를 명하는 것은 사첩(史牒)에 있지 아니한 바입니다. 전일에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지자 온 나라 인심이 물이 끊어오르듯 불이 타오르듯 하였습니다. 만약 도로 거두기를 조금이라도 늦추었다면 안정시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극도에 이르면 하늘이 어기지 못하는 법인데, 다행히도 전하께서는 멀지 아니하여 회복하셨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를 굳게 정하셔서 다시는 전도(顚倒)되는 일을 하지 마시고, 또 반드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각고 면려(刻苦勉勵)하시어 하늘과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하소서.

최석항이 홀로 먼저 입대(入對)한 것이 과연 무슨 죄이며 말하고자 한 것은 얼마나 큰 일입니까? 몸이 이미 대궐에 이르렀다면 오직 마땅히 즉시 호소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침묵하며 다른 사람과 지체하여 기다리는 것이 어찌 분의(分義)에 마땅한 바이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진실로 주책(誅責)535) 해야 할 만한데도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아니한 것을 죄로 삼으니, 이는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후(先後)를 물론하고 다만 천의(天意)를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지극한 다행이었습니다. 홀로 이룩한 것이나 함께 이룩한 것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태구(趙泰耉)는 전하의, ‘시속의 태도를 쾌히 씻고 마음을 돌이켜 곧 들어와서 장차 망하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앉아서 상규(常規)만 지키겠습니까? 출입을 동궐(東闕)536) 로 한 것은 단지 병이 위중하여 행보가 조금 가까운 곳을 취하였을 뿐이며, 선인문(宣仁門)537) 역시 시어소(時御所)538) 의 정문(正門)이므로, 비록 병이 있지 않아도 이곳을 경유하여 출입한 것이 옛부터 한정없이 많았습니다. 그 행차할 적에 도로에서 소리를 치고 들어와서는 후사(喉司)에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며, 그 말한 바는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자 하는 명을 돌이키려고 한 것인데, 이제 그 죄를 성토하여 혹은, ‘돌입(突入)하였다.’고 하고, 혹은 ‘몰래 진현(進見)하기를 도모하였다.’라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저 인견(引見)의 명이 바로 내려진 것이 또 어찌 상신(相臣)이 감히 아는 바이겠습니까? 그때의 곡절을 전하께서 이미 명백하게 하교하셨는데도, 오히려 구실을 삼아 마음을 쾌하게 하려고 하여 잠시 사이에 삭출(削黜)로부터 원찬(遠竄)에 이르렀고, 이튿날은 원찬에서 국문(鞫問)으로, 또 그 이튿날에는 국문에서 다시 원찬이 되었습니다. 막고 낮추고 올리는 것을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아! 너무나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대신이 비록 죄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나문(拿問)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선왕(先王)의 하교가 명백해 있는데도 오히려 변모(弁髦)539) 로 여기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평생 행신(行身)을 나라 사람이 아는 바이니, 환시(宦寺)와 교통(交通)하였다는 말이 어찌 근사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죄를 마구 더하며 조금도 어려워함이 없습니다. ‘환첩(宦妾)이 이름을 아는 사람에게 복상(卜相)하였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이는 성간(聖簡)540) 하신 일까지 아울러서 속이는 것이니, 어찌 통분(痛憤)하지 않겠습니까?

군부(君父)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내리시자 정성을 다해 돌이키려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함께 분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혹시 다른 사람이 능히 하기도 하고, 상례(常例)로 할 수 없는 것은 혹 파격적으로 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일이 지나간 뒤에도 서로 하례(賀禮)하는 바탕이 되기에 꼭 적합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오히려 함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신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탄합니다. 마음에 품은 바의 장소(章疏)를 승정원에서 마음대로 퇴각(退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옛 법인데, 지난번 정청(庭請)을 정지하던 날 중신(重臣)이 상소를 승정원에 와서 올렸으나, 공공연히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국가에 관한 일은 경중을 물론하고 모두 위에 아뢸 길이 없어질 것이고,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될 것입니다. 엄하게 신칙(申飭)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광구(匡救)하고자 올린 말을 내가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시사(時事)가 개탄스러운 것은 진실로 나의 박한 덕이 밝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니, 아! 누구를 허물하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경은 뒤미처 다시 제기하지 말고, 공경히 가서 일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한중희(韓重熙), 부제학(副提學) 홍계적(洪啓迪),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이 모두 이집(李㙫)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소를 올려 피혐(避嫌)함이 서로 잇따라 분분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8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註 535]
    주책(誅責) : 죄책.
  • [註 536]
    동궐(東闕) : 창경궁.
  • [註 537]
    선인문(宣仁門) : 창경궁의 협문.
  • [註 538]
    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현재 거처하는 곳.
  • [註 539]
    변모(弁髦) : 관례(冠禮) 때 머리에 쓰는 관(冠). 한 번 쓰고 버리므로 쓸모없는 것을 가리킴.
  • [註 540]
    성간(聖簡) : 임금이 특별히 임명함.

黃海監司李㙫上疏辭職, 且言:

人君未有沈頓之疾, 而卽祚元年, 遽命釋務者, 史牒之所未有也。 向日備忘之下, 擧國人情, 如沸如焚。 若使收回少遲, 幾不得定。 人心所極, 天不能違。 幸殿下, 不遠而復。 願殿下, 堅定聖心, 勿復爲顚倒之擧, 又必刻勵治道, 以答皇天祖宗之意。 崔錫恒獨先入對, 果何罪也, 所欲言者, 何等大事? 身旣到闕, 惟當卽時呼籲。 伈伈默默, 遲待他人, 夫豈分義之所宜? 苟有若是者, 誠可誅責, 今反以不如是爲罪, 此非常情可度。 無論先後, 但得回天, 斯爲至幸。 獨辦與共辦, 其可論乎? 趙泰耉承殿下快滌時態, 翻然入來, 以安將亡之國之敎, 其敢坐守常規乎? 出入之由東闕, 只因危病澟綴, 取行步之稍近耳, 宣仁亦時御正門, 雖不病者, 由此出入, 從古何限? 其行也行呼唱於道路, 其入也請對喉司, 其所言者, 欲反君上釋務之命, 而今其聲罪, 或曰突入, 或曰潛圖進見, 天下寧有是哉? 若夫引見之徑下, 又豈相臣之所敢知? 其時委折, 殿下旣已明白下敎, 猶欲藉口而甘心, 片刻之間, 自黜而竄, 明日自竄而鞫, 又明日自鞫而復竄。 阻搪低仰, 唯意所欲。 嗚呼! 其亦太無忌憚也。 大臣雖有罪過, 不許拿問, 明有先王下敎, 而猶且弁髦, 其他又何說? 相臣平生行已, 國人所知, 交通宦寺, 夫豈近似, 而白地橫加, 曾不少難。 至謂枚卜於宦妾知名之人, 是竝與聖簡而誣之, 豈不痛哉? 君父下非常之敎, 竭誠挽回, 衆心齊憤。 吾身之所不能, 或他人能之, 常例之所不可爲, 或破格而爲之, 適足爲事過後相賀之資, 而顧反抑勒操持, 猶恐不力, 臣誠爲世道慨然。 所懷章疏, 政院不得任自退却, 乃是古規, 而向於庭請停止之日, 重臣之疏, 來呈政院, 而公然不捧。 若是則事關國家者, 勿論輕重, 皆無由上聞, 後弊所關。 宜加嚴飭也。

上答曰: "匡救進言, 予深嘉尙。 時事之慨惋, 實由涼德不明。 嗚呼! 是誰之愆? 夫復何言? 卿勿追提, 欽哉!" 承旨趙榮福韓重熙、副提學洪啓迪、持平李倚天、司諫魚有龍, 皆因疏, 引嫌疏避, 相繼紛然。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8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