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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 4권, 경종 1년 8월 4일 임술 2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좌의정 이건명이 차자를 올려 양역을 변통하는 일의 가부를 논하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의 가부를 논하기를,

"지금 백 리(百里)의 고을이라면 호수(戶數)가 천(千)이 못되지는 않지만, 마포(麻布)를 내어 공상(供上)을 하고 과수(戈殳)를 잡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양민은 10분의 2, 3에 지나지 못하고, 양반(兩班)·중인(中人)·서얼(庶孽)로서 한유(閒遊)의 무리들이 10분에 8, 9를 차지하고 있으니, 양민은 살을 깎아 뼈에까지 이르고 족징(族徵)을 하다가 인징(隣徵)에까지 미쳐 심지어는 아들을 낳아서도 기르지를 못하고 곤궁이 심하여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이러한 폐단을 깊이 아시고 여러 번 측은히 여기는 교서를 내리셨는데, 교서에 이르기를, ‘어린아이가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려 하는데 어떻게 구원할 길이 없다 핑계하고서 편히 앉아 태연히 하면서 구제할 것을 생각치 않겠는가?’ 하셨고, 또 이르기를, ‘일이 어떻게 십분 완전한 게 있겠는가? 만약 7, 8분이 좋게 된다면 2, 3분의 지장이 있더라도 나는 따르겠다.’ 하셨으니, 이는 실로 성인(聖人)의 애민(愛民)하는 마음이요, 천지의 호생(好生)하는 인(仁)인 것이니, 잘 계술(繼述)하는 바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4책(四策)을 순문(詢問)하여 편부(便否)를 살피려 하셨는데, 조령(朝令)이 겨우 내려지자 쓸데없는 의논만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일 이 일로 인하여 중지하신다면 국체(國體)의 손상이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결포(結布)의 법으로 우선 한두 고을에 시험해 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사복(嗣服)하신 초기에 신해년341) 이전의 쌓인 포흠(逋欠)은 견감(蠲減)해 줄 것을 명하시니, 민심이 흡족해 하고 국세(國勢)는 더욱 공고(鞏固)해졌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고 행례(行禮)하신 지 이미 돐이 되었는데도 한 번도 덕음(德音)을 베풀어 백성들의 위급을 돌봐주셨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선조(先朝)의 예에 따라 계사년342) 이전의 포흠(逋欠)은 군향(軍餉)·정공(正供)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탕척(蕩滌)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시정(時政)을 걱정하여 진언(進言)하였으니, 명심(銘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하유(下諭)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6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左議政李健命箚論良役變通事宜曰:

今以百里之邑, 戶不下千數, 出麻布以供上, 執戈殳以衛國, 而良民不能什之二三, 兩班、中、庶閑遊之類, 什居八九。 良民剡肉至骨, 侵族及隣, 甚至生男而不擧, 困極而自經者有之。 先王深知此弊, 屢發惻怛之敎曰: "赤子入於水火, 安可諉以無可救之道, 而安坐恬然, 不思拯濟?" 又曰: "事豈有十分完全者? 如得七八分好, 二三分有礙, 予當從之。" 此實聖人愛民之心, 天地好生之仁。 善繼善述, 莫大於此。 向者四策之詢問, 欲審便否, 而朝令纔下, 浮議喧騰。 今若因此停止, 國體之損傷, 更無餘地, 請以結布之法, 先試一二邑。

且言:

先大王嗣服之初, 命蠲辛亥以上積逋, 民心洽然, 國勢益鞏。 今殿下, 踐位行禮, 亦已周歲, 而未聞宣一德音, 以顧民巖。 宜依先朝例, 癸巳以上逋欠, 勿論軍餉正貢, 一倂蕩滌。

上遣史官, 諭以憂時進言, 可不服膺? 令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6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