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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4권, 경종 1년 6월 16일 병오 5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의주 부윤 이명언이 상소하여 성을 옮길 방략을 아뢰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명언(李明彦)이 상소하여 성을 옮길 방략(方略)을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변(西邊)의 보장(保障)의 중지(重地)로서 본부(本府)보다 나은 곳이 없으나, 한 조각 고성(孤城)이 다른 험애(險阨)한 곳이 없고 믿는 것은 오직 장강(長江) 하나 뿐인데, 근래에는 수세(水勢)가 크게 변하여 창일(漲溢)할 때가 아니면 걸어서 물을 건널 수가 있으니, 요충지로서의 험애함을 이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강밖에는 호산(胡山)253) 들이 죽 늘어서서 막고 있어 여느 때의 후망(候望)도 수리(數里)를 벗어나지 못하니 만일 창졸간에 포위를 당한다면 며칠 동안을 서로 버티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개 방비군을 철수한 뒤로는 본부의 윤번(輪番)하는 병졸은 수백 명도 채 못되는데 급박한 형편을 당한다면 부곡(部曲)의 원근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어떻게 전령(傳令)하여 불러들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성첩(城堞)에 올라가 있는 자는 성안의 민정(民丁)뿐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성을 지키자니 어떻게 안전을 다짐할 수 있겠습니까? 군량이 모자라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성안의 우물들이 거의 말라버렸으니, 이미 후원(後援)도 끊기고 또 물과 식량도 떨어진다면 한 번 죽는 것 밖에는 딴 방책이 다시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병자년254) 의 호란(胡亂) 때에 임경업(林慶業)이 감히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물러나 지킬 계책도 쓸 수가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임경업은 화란(禍亂)이 꼭 올 줄을 알고 미리 사사(死士)255) 를 모집하여 저들의 경내(境內)를 정탐하고는 시기에 앞서서 성에 들어가 지켰지만, 이제는 사세(事勢)가 아주 달라져서 예측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으니, 비록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는다 해도 멀리 백마 산성까지 달려가기란 그 형세가 또한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30리쯤 되는 거리에 고성(古城)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으로 곧 고구려(高句麗)에서 5백 년간이나 도읍을 하였던 곳입니다. 형세의 편리함이 본주(本州)의 주성(州城)보다 백 배나 나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의 천작(天作)의 금탕(金湯)256) 입니다. 몇겹으로 둘러쌓인 속에 저절로 일국(一局)을 이루고 있는데 옛 성터가 지금도 완연하고 밖은 험준하고 안은 평탄하여 토곽(土郭)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周回]는 3천 6백여 보(步)나 되는데 그 안에는 옛 우물이 더욱 많고 겹쳐서 간수(澗水)의 여러 줄기가 마름이 없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는 따로 산기슭 하나가 있어 옆으로 뻗어서 빙 둘러막고 있으니 하나의 외곽(外郭)을 이루어 놓았으며, 또 10여 리를 지나서 압록강의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수된 곳이 있는데, 바로 대총강(大摠江)입니다. 또 고진강(古津江)이 있는데 대총강의 하류와 해구(海口)에서 합쳐지니, 이곳이 바로 양하진(楊下津)입니다.

구성(舊城)에서 수구(水口)에 이를려면 양쪽 골짜기가 묶어놓은 듯한데 그 가운데로 한가닥 길이 통해져서 바로 10리 장곡(長谷)을 이루고 있으니, 설사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압록강을 건너가도 한 걸음에 곡구(谷口)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백마 산성으로 물러나 지키더라도 적들이 또한 우리의 퇴로(退路)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니, 그 주성(州城)에 비교하여 같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국내성(國內城)으로 고을을 옮기고 백마 산성과 서로 성원(聲援)을 의뢰한다면 비단 험준함을 믿어 스스로 견고하게 수비할 뿐만 아니라, 황주(黃州)철산(鐵山)의 통로가 두 성 사이에 있게 되니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해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본부를 이설(移設)한 뒤에는 저쪽과 우리의 사신이 곧바로 저들의 마전참(馬轉站)에서 권두(權豆)의 북쪽을 경유하여 대총강을 건너서 국내성(國內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아홉 개 참에서 하나의 참(站)으로 비용이 줄어들고 세 강을 따로 건너는 폐단이 일거(一擧)에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국내성에서 곧바로 용천(龍川)으로 가게 되니 소관참(所串站) 하나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비용 절감도 적지는 않습니다. 주성(州城)은 새로이 첨사(僉使)를 두어 지키게 하고 본부(本府)에는 장교들도 또한 많이 있으니 서로 협력하여 엄중히 지키는 곳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수상(水上) 6진(鎭)은 비록 바둑을 깔아놓은 형세이긴 하나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정작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반드시 힘이 되지는 못할 것이니, 청수(靑水)·청성(淸城)을 합하여 1진(鎭)을 만들고, 방산(方山)·옥강(玉江)을 합하여 1진을 만들며, 수구(水口)·건천(乾川)을 합하여 1진을 만들어 토병(土兵)들을 형편에 따라 증파해 주면 점차 모양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병정들은 신설된 첨사(僉使)에게 나누어주면 3진(鎭)이 조금은 보강된 형세가 될 것이고, 신진(新鎭)도 더 모집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그것이 군대 배치의 방법에 있어서 타당할 듯합니다. 또 고(故) 부사(府使) 임경업청천강(淸川江) 이북에 곤수(閫帥)257) 를 두어야 한다는 상소를 보니 그 말은 매우 간절하지만, 백마 산성은 변방 끝에 치우쳐 있으므로 비록 큰 일을 하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만일 선천(宣川)이나 구성(龜城) 등지에 땅을 가려 병영(兵營)을 열고 용천 구성(龍川舊城)에다 따로 행영(行營)을 두어 여름에는 본영(本營)에서 머물고 겨울이면 행영에 나가서 주둔하여 북로(北路)258) 의 방수 제도와 똑같이 한다면,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얻는 방법이 바로 이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변통하는 것은 폐단이 생기는 법이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복주(覆奏)하여 시행치 못하였다. 의주(義州)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실로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 믿을 곳은 못된다. 국내성의 형편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지마는 나라의 습성이 인순(因循)259) 에 젖어 있어 비록 좋은 계책이 있더라도 시행되지 못하게 되니, 한스러울 뿐이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61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註 253]
    호산(胡山) : 오랑캐 땅의 산.
  • [註 25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255]
    사사(死士) : 결사대(泱死隊).
  • [註 256]
    금탕(金湯) : 금성 탕지(金城湯池). 곧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
  • [註 257]
    곤수(閫帥) : 병사(兵使).
  • [註 258]
    북로(北路) : 함경도(咸鏡道).
  • [註 259]
    인순(因循) : 구습(舊習)을 따라 행함.

義州府尹李明彦, 疏陳移城方略。 略曰:

西邊保障之重, 無過於本州, 而一片孤城, 無他險阨, 所賴者惟一長江, 而近者水勢大變, 如非漲溢之時, 可以徒涉, 天塹之險, 已不可恃。 江外山, 羅絡遮障, 常時候望, 不出數里。 若使倉卒被圍, 則數日相持, 亦已難矣。 蓋自撤防之後, 本府輪番之卒, 不滿數百, 勢迫呼吸, 則部曲之散處遠近者, 何以傳發而收召乎? 然則登陴列堞, 不過城內民丁耳。 以此守城, 何能自全? 糧餉之不足, 姑且無論, 城中井泉, 太半枯涸。 旣絶聲援, 又乏水穀, 一死之外, 更無它策。 是以, 丙子之變, 林慶業不敢嬰城固守, 退保白馬。 目今退保之計, 亦無所施, 何也? 慶業知其禍亂之必至, 先募死士, 偵探彼境, 先時入保, 而今則事勢頓異, 固難預度, 雖欲冒死潰圍, 遠赴白馬, 其勢亦末由也。 距此三十里許, 有一古城, 所謂國內城, 卽高句麗五百年所都處也。 形勝便利, 不啻百倍於州城, 便一天作之金湯也。 環抱數重, 自作一局, 舊城基址, 尙今宛然, 外險內夷, 土郭天成, 周回三千六百餘步, 其中尤多舊井, 重以澗水爭流, 滔滔不竭。 城之東南, 別有一麓, 橫亘周遮, 作一外郭, 又過十餘里, 鴨綠諸泒, 合爲一流, 卽大摠江也。 又有古津一江, 與大摠下流, 合於海口, 此卽楊下津也。 自舊城至水口, 兩峽如束, 中通一條路, 便成十里長谷。 假使騎渡江, 不可一蹴而至谷口矣。 如欲棄城登山, 退保白馬, 賊亦不敢攔其歸路, 其視州城, 不可同年而語也。 今若移邑於國內城, 仍與白馬, 藉爲聲援, 則不惟負險自固, 一路, 在於兩城之間, 雖無防守, 自不足慮矣。 本府移設之後, 則彼我使客, 直自彼中馬轉站, 由權豆之北, 渡大摠江, 抵國內城, 九連一站之費, 三江分渡之弊, 一擧而可盡祛矣。 又自國內城, 直趨龍川, 則所串一站, 應在輟罷之中, 其省費又不淺尠。 州城則新設僉使, 使之防守, 本府亦多將校, 以爲同力嚴禁之地。 水上六鎭, 雖云碁布, 而勢單力弱, 苟有緩急, 必難得力, 靑水淸城, 合爲一鎭, 方山玉江, 合爲一鎭, 水口乾川, 合爲一鎭, 量添土卒, 稍成貌樣。 以其餘丁, 劃給于新設僉使, 則三鎭有差强之勢, 新鎭無添括之憂, 其於制置之道, 亦似得宜。 且見故府使林慶業設閫淸北之疏, 其言甚切, 而白馬逼處邊頭, 雖欲有爲, 勢難措手。 若於宣川龜城等處, 擇地開營, 以龍川舊城, 別爲行營, 夏則留箚本營, 冬則進屯行營, 一依北路防守之制, 則制敵取勝之道, 正在此矣。

竝令廟堂稟處。 備局覆奏以變通生弊, 固難輕議爲辭, 而不施。 義州處於平地, 實非緩急所恃。 國內城形便, 未知如何, 而國俗恬於因循, 雖有長策, 不得見施, 可嘅也已。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61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