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경종실록3권, 경종 1년 5월 11일 신미 2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경상 감사 조태억이 소를 올려 영남의 인재를 쓸 것을 청하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태억(趙泰億)이 소(疏)를 올려 영남(嶺南)의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은 본디 인재의 부고(府庫)로 일컬어졌으니, 국조(國朝)의 융성(隆盛)한 시대에 조정에 가득한 공경(公卿)이 대부분 영남 사람이었습니다. 근래에 인재의 배출(輩出)이 진실로 옛만 같지 못하지만 국가에서 거두어 쓰는 것도 또한 매우 드물어서, 영남 사람으로 문과(文科)에 오른 자가 많은 경우 80여 명에 이르는데도 벼슬을 얻어 녹(祿)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마땅히 선조(先朝) 때의 거두어 녹용(錄用)하라는 명을 본받아 속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널리 찾아 물어서 재질(才質)에 따라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高麗)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모두 영남 사람이며,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종직(金宗直)·정구(鄭逑)·정온(鄭蘊)·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의 자손이 대대로 영남에 살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조금 존문(存問)하여 찾고 속히 수용(收用)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이언적의 후손을 세우고,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곽준(郭䞭)의 후손을 거두어 쓰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라(新羅) 때의 여러 능(陵)이 황폐해져 풀이 무성하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이 상(傷)하게 만들며, 48 왕릉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대부분입니다. 신라왕의 시조전(始祖殿)의 경우는 곧 우리 세종(世宗) 때에 세운 것으로, 봄·가을의 중월(仲月)173) 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경건하게 향사(享祀)하니, 성조(聖祖)의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가 지극하였습니다.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전수(典守)할 사람이 없어 매양 향사(享祀) 때면 시골 사람을 시켜 일을 맡아 보게 하니, 사체(事體)에 미안합니다.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숭인전(崇仁殿)마전(麻田)고려 태조(高麗太祖)숭의전(崇義殿)의 경우 모두 그 자손을 참봉(參奉)에 임명하여 그제사를 받들되 옛날 삼각(三恪)174) 의 의전(儀典)과 같이 했습니다. 세종 때의 사당을 세워 치제(致祭)한 것은 성의(聖意)를 둔 바 있는데, 왕자(王者)의 사당에 시골 사람이 일을 맡으니, 끝내 구간(苟簡)한 데로 돌아갑니다. 만약 숭인전숭의전의 규례(規例)에 의해 전호(殿號)를 게시(揭示)하라 명하고, 참봉 두 사람을 차출(差出)하되, 혹은 신라왕의 자손으로 채우거나 혹은 유식(有識)한 선비로 임명하여 관원(官員)의 복색(服色)으로 전묘(殿廟)에 천헌(薦獻)175) 하게 한다면, 또 이들로 하여금 때때로 여러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고 추목(芻牧)을 금하게 하며, 또한 경순왕(敬順王)의 유묘(遺廟)도 보살피게 한다면, 국가에서 경건하게 하는 도리에 더욱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사(疏辭)가 진실로 매우 마땅함을 얻었다. 전조(銓曹)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남의 문관 및 선현(先賢)의 후예들은 매번 재질(才質)에 따라 조용(調用)하게 했지만 정관(政官)이 색목(色目)에 구애받고 또 사사로운 청탁(請托)을 따라 끝내 실효가 없었으며, 조태억의 소청(疏請)도 또한 빈말로 돌아갔으니, 정말 개탄스럽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57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가족-가족(家族)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역사-전사(前史)

  • [註 173]
    중월(仲月) : 2월·5월·8월·12월.
  • [註 174]
    삼각(三恪) : 제왕(帝王)이 선왕(先王)을 공경하는 일. 주 무왕(周武王)이 우(虞)나라의 후손(後孫)을 진(陳)나라에, 하(夏)나라의 후손을 기(杞))나라에, 은(殷)나라의 후손을 송(宋)나라에 봉하여 삼각(三恪)이라 하였다고 함.
  • [註 175]
    천헌(薦獻) : 제수(祭羞)를 올리고 헌작(獻酌)함.

慶尙監司趙泰億, 疏請收用嶺南人材。 略曰:

嶺南素稱人材府庫, 國朝盛時, 滿朝公卿, 多是嶺南之人。 近來人才之輩出, 固不如古, 而國家之收用, 蓋亦寥寥。 嶺人之登文科者, 多至八十餘人, 而無得官霑祿者。 宜體先朝收錄之命, 亟令銓曹, 廣加搜問, 隨才調用。

又曰:

高麗 文忠公 鄭夢周、注書吉再, 俱是嶺人, 先正臣金宏弼鄭汝昌李彦迪李滉金宗直鄭逑鄭蘊張顯光鄭經世子孫, 世居嶺南。 亦宜稍加存訪, 亟行收用。

又請立李彦迪後, 收用朴彭年河緯地郭䞭之後孫。 又曰:

代諸陵, 荒墟蔓草, 滿目傷心。 四十八陵見失者居多。 至於王始祖殿, 卽我世宗朝所建, 春秋仲月, 降香祝式虔于享殿, 聖祖致崇之典至矣。 獨恨其典守無人, 每當享祀, 使鄕人將事, 事體未安。 如平壤箕子 崇仁殿麻田崇義殿, 皆以其子孫, 充差參奉, 以奉其祀, 如古三恪之儀。 世宗朝之建廟致享, 聖意有在, 而王者之廟, 鄕人將事, 終爲苟簡之歸。 若依崇仁崇義殿例, 命揭殿號, 差出參奉二員, 或以王子孫充之, 或以有識士人差之, 使以官員服色, 薦獻殿廟, 又使之時時奉審諸陵, 禁其芻牧, 亦令護視敬順王遺廟, 則國家致虔之道, 庶益有光矣。

答曰: "疏辭誠甚得宜。 令銓曹、禮曹, 趁卽擧行。" 嶺南文官及先賢遺裔, 每令隨才調用, 而政官拘於色目, 且循私托, 終無實效。 泰億疏請, 又歸空談, 殊可嘅也。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57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가족-가족(家族)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