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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3권, 경종 1년 5월 11일 신미 1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우의정 조태구가 소를 올려 해면을 청하고 기호의 민폐를 진달하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성묘(省墓)하고 교서(郊墅)169) 로 돌아와 다시 소를 올려 해면을 원하였다. 이어 기호(畿湖)의 민폐(民弊)를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제 신이 경유(經由)한 각 고을은 마을이 폐허가 되어 쓸쓸해졌고, 평소 부유하고 충실하던 마을이 아주 쇠잔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물어보면, ‘모두 죽었습니다.’, ‘도망가 흩어졌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사년170) 이후로 기근(飢饉)이 든 끝에 무술년171) 의 혹독한 여역(癘疫)이 겹쳐 거의 모든 백성이 없어졌는데도, 도고(逃故)한 군민(軍民)에게서 거둘 것을 모두 일족(一族)에게서 거두고, 족징(族徵)으로도 그치지 않아 이징(里徵)에 이르니, 강자(强者)는 흩어져 도적이 되고 약자(弱者)는 중이나 노비가 되어 양민(良民)이 거의 절종(絶種)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삶을 즐기는 뜻이 없어 양전(良田) 미답(美畓)을 분토(糞土)처럼 버리니, 한 사람이 열 사람의 역(役)에 응하는데 그 형세상 어찌 이렇게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는 별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절생(節省)에 힘쓰시고 서울의 각 관사(官司)의 용도를 적절하게 헤아려 수량을 줄인 연후에 족징(族徵)의 정령(政令)을 조금 늦추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행하지 말도록 각별히 수령(守令)을 신칙(申飭)해 농사를 권장(勸奬)하는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놀고 먹는 무리가 모두 논밭에서 일하고 물고(物故)의 대역(代役)이 점차 보충되어 세월이 흘러간다면, 그래야 복구(復舊)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각 고을의 진정(賑政)은 곡식이 적은데도 백성은 많아, 보리가 채 수확되기도 전에 진휼이 먼저 끝이 납니다. 보리 수확 뒤의 진휼도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고을의 곡식이 바닥이 나서 손댈 곳이 없으니, 바라는 것은 오직 저치미(儲置米) 중에서 남아 있는 것 및 채 상납(上納)하지 않은 대동미(大同米) 중에서 진휼을 위해 남겨둔 것뿐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량(商量)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환상(還上) 보리는 결코 정해진 대로 거둘 수 없으니, 청컨대 반을 갈라 벼로 환산하고 가을을 기다려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진달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전부터 위로는 어공(御供)에서 아래로는 여러 관사(官司)에 이르기까지 용도(用度)를 이미 많이 줄이고 절약했는데도 징포(徵布)의 폐단은 오히려 전일과 같으니, 위 문공(衞文公)의 대포(大布)·대백(大帛)172) 과 같은 일대 경동(警動)과 일대 변통(變通)이 없다면, 사소한 재감(裁減)으로는 끝내 실효(實效)가 없을 것입니다. 대저 양역의 폐단은 말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잘 변통하는 계책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물고(物故)의 대역(代役)을 만약 즉시 충정(充定)하지 못하다면 백골 징포(白骨徵布)의 폐단도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으니, 또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폐단의 근원을 깊이 구명(究明)하소서. 또 역대(歷代)의 규제(規制)를 상고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하시어 반드시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하신 뒤에야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의 저축이 먼저 이미 바닥나서 달리 추이(推移)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상납하지 않은 대동미는 본청(本廳)의 형세(形勢)로 보아 결코 남겨 두기를 허락하기 어려우나, 저치미(儲置米)는 앞으로 수요(需要)에 응(應)하는 것 외에 혹 남는 수량이 있다면 개색(改色)하여 나누어 주고 가을에 이르러 거두어 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모맥(牟麥)의 환상(還上)은 본디 민간(民間)의 종자를 위한 것이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의 전결(田結)을 참작하고 헤아려 종자로 만들 만한 것을 덜어낸 뒤 그 밖의 것은 혹은 절반을 혹은 3분의 1을 벼로 환산하여 거두어 들이게 하는 것이 또한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5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재정-공물(貢物)

  • [註 169]
    교서(郊墅) : 시골에 있는 별장.
  • [註 170]
    계사년 : 1713 숙종 39년.
  • [註 171]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 [註 172]
    위 문공(衞文公)의 대포(大布)·대백(大帛) : 춘추 시대의 위(衞)나라 임금인 문공(文公)은 검소한 생활을 하여 대포(大布)로 지은 옷을 입고 대백(大帛)으로 만든 관(冠)을 썼으며, 인재를 기르고 농사를 장려하고 상업·공업을 권면하고 교육을 일으켜서 위나라를 부흥(復興)시켰음. 대포와 대백은 올이 굵은 베와 비단.

○辛未/右議政趙泰耉, 省墓還郊墅, 復疏乞解, 仍陳湖畿民弊。 略曰:

今臣所經各邑, 墟落蕭然, 常時富實之村, 無不殘敗。 問之則曰: "皆死也。" "逃散也。" 蓋自癸巳以後, 飢羸之餘, 重以戊戌毒癘, 死亡殆盡, 而軍民逃故, 皆徵於一族, 徵族之不已, 至於里徵, 强者散而爲盜, 弱者爲僧爲奴, 良民殆將絶種矣。 以此民無樂生之意, 棄良田美畓如糞土。 蓋以一人應十人之役, 其勢安得不如此也? 卽今捄弊之道, 無他別策。 自上務存節省, 京各司用度, 量宜減數, 然後少紓徵族之令, 勿行擾民之事。 另飭守令, 勤行勸農之政。 游食之徒, 盡緣南畝, 而物故之代, 漸次充補, 磨以歲月, 猶可望其復舊。 且各邑賑政, 穀少而民多, 麥未登場, 而賑事先畢。 麥後之賑, 不可不留意。 各邑穀盡, 着手無地, 所望惟在於儲偫之遺在者及未上納大同之留賑。 請令廟堂, 從長稟處焉。

又言還麥, 決不可準捧, 請令折半作租, 待秋收捧, 上賜溫批, 條陳事, 令廟堂商確稟處。 備局覆啓曰: "曾前上自御供, 下至諸司用度, 已多減省, 而徵布之弊, 猶夫前日。 如非大警動大變通, 如衛文之大布、大帛, 則些少裁減, 終無實效。 大抵良役之弊, 言之已久, 而尙未得善變之策。 物故之代, 若不趁卽充定, 則白骨徵布之弊, 無以捄正。 亦望聖上, 深究弊源。 且考歷代規制, 詢咨諸臣, 必以革弊安民爲意, 然後庶可有效矣。 卽今京外畜積, 先已匱竭, 他無推移之路。 未上納大同, 則本廳形勢, 決難許留, 儲偫米, 則計其前頭應需之外, 或有餘數, 則改色分給, 趁秋收捧, 似爲得宜。 牟麥還上, 本爲民間種子, 則令道臣, 參量各邑田結, 除出可作種子之外, 或折半、或三分之一, 換租收捧, 亦無所妨。" 上允之。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5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재정-공물(貢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