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판중추부사 서종태의 졸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68세이다. 부고(訃告)를 알리니, 세자가 하교(下敎)하기를,
"한 번 병들어 갑자기 심해졌다가 흉문(凶問)001) 이 갑자기 이르니,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매우 애통(哀痛)해 하심과 내 마음의 놀란 슬픔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하고, 부의(賻儀)와 호상(護喪)을 전례(前例)와 같이 보내도록 명하였다. 서종태는 자(字)가 노망(魯望)이고, 호(號)가 만정(晩靜)인데, 천성(天性)이 도(道)를 가까이 하여 단정하고 아칙(雅飭)하였으며, 겸근(謙謹)을 이루어 종일 목연(穆然)002) 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거만한 용모와 빨리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자신을 단속하기를 청렴(淸廉)하고 엄정(嚴正)하게 하여 비록 으레 하는 궤유(餽遺)·부의(賻儀)·증유(贈遺)도 조금 많으면 이를 물리쳤다. 당쟁(黨爭)이 나라를 해침을 매우 미워하여 일찍이 공평한 의론(議論)을 지키며 치우친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큰 시비(是非)를 당하면 문득 거리낌없이 할 말을 다하였으며, 매번 휴퇴(休退)003) 할 것을 마음먹고 기꺼이 시사(時事)를 담당하지 않았으나 융숭한 지우(知遇)에 얽매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옥(玉)을 차고서도 마음은 고목(枯木)과 같다는 것이다. 장차 장사(葬事)를 치르는데, 온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상엿줄을 잡고 보내었으니, 이는 옛날에도 드물게 있던 일이었다. 무릇 사류(士流)는 졸(卒)이란 글자를 쓰는데, 초사(初史)에는 한 가지도 공정(公正)한 사필(史筆)이 없었다. 서종태는 당인(黨人)에 대해 몹시 미워하지 않았으므로, 폄척(貶斥)과 무함(誣陷)이 유독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발휘(發揮)한 것이 상세(詳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므로, 이에 거듭 상세히 기술(記述)하여 이를 보충한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3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001]
○甲子/行判中樞府事徐宗泰卒。 年六十八。 訃聞, 世子下敎曰: "一疾忽劇, 凶問遽至。 聖心之衋傷, 余懷之驚怛, 曷可云喩?" 命致賻庀喪如例。 宗泰字魯望, 號晩靜。 天資近道, 端凝雅飭, 濟以謙謹, 終日穆然, 人不見慢容疾聲。 律已淸嚴, 雖例饋、賻贈, 稍多則却之。 深惡黨爭病國, 嘗持平議, 無偏心, 然遇大是非, 輒盡言之。 每以休退爲心, 不肯擔當時事, 而係縻隆知, 竟莫之遂, 眞所謂佩玉而心如枯木者也。 將葬, 都民傾城執紼以送, 此又古罕有者。 凡士流書卒, 初史無公筆。 宗泰以不深忤於黨人, 故貶誣獨不及, 而發揮有未悉, 玆復備述而補之。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3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