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의 문인인 전 세마 최석문의 상소에 대한 논평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운운 【위에 보인다.】 하였다. 최석문 등이 제 스승이 무함받는 것을 목격하고 망극(罔極)하여 임금에게 신리(伸理)를 호소한 것은 비록 고도(古道)가 아니기는 하나 근세의 관례를 따라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만을 말하지 않고 신유년010) 의 의서(擬書)를 곧바로 발론한 것은 제 스승의 마음과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어서 윤증은 스승·제자의 본분을 아직 끊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은 혈기(血氣)의 흠이 점점 심술(心術)의 병통이 되어 도(道)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으면서도 다만 범하지 않는다는 의리만 지켰고, 또 그가 쓴 묘문(墓文)에서 조종(操縱)한 것도 하나의 음양(陰陽)의 수단이므로 중간의 곡절이 상정(常情)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윤증이 이미 경험으로 겪어서 깨달은 것이 더욱이 몸소 간절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더욱 심하여졌고, 그래서 진실로 차마 그가 속여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의서(擬書)를 지어서 충고(忠告)하고 스스로 비간(比干)011) 이 간쟁(諫諍)하다가 죽은 일을 좇아 따랐다. 비록 그 처지로서는 경계하는 듯한 혐의가 있고 그 입설(立說)은 절박한 흠이 있기는 하나, 원래 그 뜻은 또한 아닌게 아니라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니, 정녕 반복하여 다행히 한 번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을 도의(道義)의 교분에서 헤아려 생각하면서 그 시의(時義)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무명 상자 가운데에 숨겨둔 채 일찍이 자제나 문생에게 널리 퍼뜨리지 않았으니, 윤증의 뜻을 또한 알 만하다.
최석문으로서는 변명하여야 할 무함만을 변명하고 이것에까지는 소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우리를 편들고 저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를 타서 이 글을 드러내서 임금이 송시열의 병폐를 환히 알게는 하였으나 그것이 제 스승이 평소에 숨겨둔 깊은 뜻에 어그러짐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침내는 임금의 마음이 따라서 변하게 되고 국시(國是)가 전도되어 장래의 화(禍)가 저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일을 헤아리는 것이 사정(事情)에 어둡고 말을 내는 것이 망령됨이 심하구나. 아! 이 글을 소 가운데에 베껴서 아뢴 것이 본디 큰 잘못이거니와, 그 남겨 간직했던 것을 드러내어 끝내 숨기지 않은 것은 또한 윤가(尹家) 자제의 허물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9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甲午/尹拯門人前洗馬崔錫文上疏云云。 【見上】 。 錫文等目見其師, 受誣罔極, 叫閤伸理, 雖非古道, 循近世塗轍, 所不容已者。 然不徒言《源流》事, 而直發辛酉擬書, 有非其師之心也。 何者, 在其時, 尹拯師生之分未絶, 而時烈血氣之累, 漸爲心術之病, 不可謂道之所在, 而徒守無犯之義, 且其墓文操縱, 亦一陰陽手段, 中間曲折, 有非常情所及。 拯閱歷於已驗, 得尤親切, 所以惑之滋甚, 誠不忍其詿誤而莫之救, 擬以一書下藥, 自附比干之諫死。 雖其處勢, 嫌於規諷立說, 傷於切迫, 原其情, 亦未嘗不出於忠愛, 丁寧反復, 冀幸其一悟也。 然猶以是商量於道義之交, 而悟其時義之不可遂, 爲巾篋中諱藏, 不曾宣播於子弟、門生, 則拯之意, 又可知矣。 爲錫文者, 惟辨其當辨之誣, 而不宜溯及於此也, 而謂上方右我而斥彼, 乘此機發此書, 俾君上, 洞然知時烈病敗, 自不覺其有違於其師平日諱藏之深意, 而卒致天心隨變, 國是顚倒, 末流之禍, 至及泉壤。 甚矣, 其料事之迂, 而發言之妄也。 噫! 以是書, 謄聞於疏中, 固大錯矣, 發其遺藏, 而不終秘者, 亦尹家子弟之過也。 可勝惜哉!
-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9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