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보궐정오 38권, 숙종 29년 4월 17일 임진 1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박세당을 삭출하고 유신으로 하여금 축조하여 변파하게 하다

태학생(太學生) 홍계적(洪啓迪) 등이 청하기를,

"박세당(朴世堂)《사변록(思辨錄)》주자(朱子)의 학설과 어긋나고 다름이 있으며,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에 송시열(宋時烈)을 침범해 욕한 말이 있습니다. 문자(文字)를 거두어 들여서 물과 불속에 던져버리고, 인하여 성인(聖人)을 헐뜯고 현인(賢人)을 업신여기는 죄로 다스리어 선비의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여 비문과 책자를 올리면서 명백히 분변하여 엄중하게 배척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박세당은 삭출(削黜)하고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축조(逐條)하여 변파(辨破)하게 하라."

하였는데, 뒤에 비문과 책자를 모두 불속에 던져버렸다. 【원소(原疏)와 계사(啓辭)의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박세당은 출신(出身)한 지 얼마 안되어 용감하게 물러나서 높은 절개가 있었고 문장에 능하며 경(經)을 연구하고 널리 배워 장구(章句)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집요(執拗)하고 신기(新奇)함을 숭상하여 지은 경설(經說)은 말로 억지로 끌어다가 꾸며댄 것이 많은데 스스로 귀중하게 여기기를 닳아빠진 비[弊箒]013) 처럼 하였다. 주장이 너무 지나쳐서 주자의 해설을 논하는 데에도 혹시 공손하지 못함이 있었으니, 세상에 도학(道學)을 맡은 자들이 말하고 물리침이 엄중한 것은 진실로 방해될 것이 없지마는, 그가 송시열과 배치(背馳)된 이유 때문에 평소부터 당인(黨人)의 꺼리고 미워함을 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위(權威)를 빙자하여 상소로 배척하기를, 다만 어긋나고 괴이하다고 처리할 뿐 아니라 그 글을 불태우고 그 사람을 처벌하기를 청하는 데 이르렀는데, 역시 오로지 당론(黨論)의 배척하고 모함하는 버릇에 돌아가서 식자(識者)의 비난하는 바가 되었다. 대저 박세당송시열을 논한 것도 역시 그 공평함을 얻지 못하였고, 송시열이경석(李景奭)에게는 이미 일찍이 도리(桃李)014) 의 문(門)에 출입하였는데도 작은 하자가 있게 되자, 비로소 장두 문자(藏頭文字)015) 로써 어두운 곳에서 모욕하였으니, 자못 학자의 구기(口氣)016) 가 아니다. 홍계적 등은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 이를 드러내어 모욕한 일이 있으니 송시열의 충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물며 사가(私家)의 문자가 그 존경하는 바를 침욕(侵辱)하였다는 이유로써 장황하게 상소하여 바로 그 죄를 청하였으니, 세상에서 또 놀랐다.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서는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에 초탈(超脫)하였으니 진실로 한 시대의 높은 선비라고 이를 만한데, 갑자기 다시 편지 왕복하는 사이에 팔을 걷어붙이고 꾸짖고 욕하여 변고(變故)를 만난 뒤에 물러나서 자못 삼가는 본뜻을 잃었으니, 그 가슴 속에는 당론의 종자가 온전히 소멸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註 013]
    닳아빠진 비[弊箒] : 자기가 가진 것은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 위 문제(魏文帝) 전론문(典論文)에 "집에 있는 닳아빠진 비를 천금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병통이다."라고 하였음.
  • [註 014]
    도리(桃李) : 인재를 취하는 것.
  • [註 015]
    장두 문자(藏頭文字) : 드러내지 아니한 은어(隱語).
  • [註 016]
    구기(口氣) : 글이나 말.

○壬辰/太學生洪啓迪等, 以朴世堂 《思辨錄》, 有崖異朱子說者, 故相李景奭碑文, 有侵辱宋時烈之言, 陳疏請收入文字, 投之水火, 仍治其毁聖侮賢之罪, 以正士趨, 上令該曹稟處。 禮曹覆啓, 進碑文、冊子, 請明辨嚴斥。 上答以世堂削黜, 令儒臣, 逐條辨破, 後碑文、冊子, 竝投火。 【原疏、啓辭批旨見上。】 世堂出身未幾, 勇退有高節, 能文章, 窮經博學, 不泥章句。 然性執拗尙新奇, 所著經說, 語多牽强, 而自珍弊箒, 主張太過, 其論朱子說, 亦或不遜。 使世有任道學者, 固不妨辭闢之嚴, 而以其背馳時烈, 素被黨人忌嫉。 至是, 藉重疏斥, 不但以弔詭處之, 而至請火其書而罪其人, 則又全歸於黨論排陷之習, 爲識者所非。 若夫世堂之論時烈, 其亦不得其平, 時烈之於景奭, 旣嘗出入於桃李之門, 而及有纖芥, 始以藏頭文字, 暗地醜辱, 殆非學者口氣, 而啓迪等, 乃於久遠之後, 有此露醜, 不可謂時烈之忠臣。 況以私家文字之侵辱其所尊, 張皇陳疏, 直請其罪, 世又駭之。 至於金昌翕, 超脫於功名、利祿, 固可謂一代高士, 而忽復攘臂噴薄於書尺往復之間, 殊失遭變後斂約之本意, 豈其胸中黨論種子, 全不能消滅而然歟?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