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 박태유·유득일 등이 김익훈에게 귀양보내도록 발의하다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유득일(兪得一)등이 김익훈(金益勳)에게 법을 시행하고 멀리 귀양보내도록 발의(發議)하여 아뢰기를,
"김익훈은 간특(奸慝)한 무리로 훈척(勳戚)의 세력을 끼고 외람되게 장수의 직임을 맡았고, 공과 상을 탐하였습니다. 바로 김환(金煥) 등이 염탐할 때에는 상하가 화답하여 응대하여 마침내 고변서(告變書)를 급히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의 무리가 비록 흉계를 모의한 것으로 법에 따라 복주(伏誅)되었으나, 증거로 끌어낸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전익대(全翊戴)의 실상에 이르러서는 김익훈과 김환이 거짓으로 통하고 지향하는 뜻이 서로 합하여, 처음에는 군뢰(軍牢)를 보내 밤중에 협박하여 무고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김환과 전익대가 함께 그 집에 나아가 사정을 힐문(詰問)하여 공초(供招)를 받아 구류(拘留)시켰으니, 그간의 허실을 김익훈이 어찌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당초 김환이 전익대를 달래고 협박하여 유명견(柳命堅)의 의심할 만한 자취를 염탐해 내려고 하였는데, 이미 모역(謀逆)한 사실을 알고도 함께 고발하지 않았다면, 전익대가 비록 김익훈을 인연해서 남을 무고하여 자기의 공을 세우려고 했더라도, 김익훈으로서는 배척하여 거절했어야 마땅하고, 어쩔 수 없었다면 저로 하여금 상변(上變)하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국청(鞫廳)을 설치한 여러 날 뒤에 분명히 허위임을 알고도 고변서를 칭탁하여 비밀리 고발하고 실정을 가렸으니, 그 죄상을 추구해 본다면 전익대와 어찌 멀다고 하겠습니까? 전익대가 이미 승복하였는데 김익훈의 죄를 어찌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는 데 그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은 위에 보인다.】 마침내 두 신하를 거제(巨濟)와 진도(珍島)로 내쫓으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대신과 삼사(三司) 그리고 여러 승지들이 명을 도로 거두도록 힘써 다투었다. 【처음의 사초(史草)와 참고하여 보라.】 대체로 전익대(全翊戴)가 자백함으로써 공론이 다시 격렬하여 이 아룀이 마침내 발의(發議)되었다. 비록 김수항(金壽恒)이라 하더라도 힘써 해명하여 구원할 수 없었으며, 송시열(宋時烈)도 처음에는 대간(臺諫)의 의논을 옳다고 하였고, 청류(淸流)들도 흡족히 그를 따랐다. 그 때 마침 송시열이 병이 있어 외부 손님을 대하지 않았는데, 김만기(金萬基) 형제만이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며 김익훈(金益勳)을 위해 애걸하였다. 대저 송시열을 받드는 자들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때로는 초피(貂皮) 이불과 해송(海松) 죽(粥)을 주었다는 말이 있었다. 송시열도 이미 기운이 쇠약해서 사정(私情)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처음의 견해를 변경하여 젊은 무리들이 김익훈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퍼뜨리며 유득일(兪得一)을 매우 준엄(峻嚴)하게 배척하였고, 민정중(閔鼎重) 역시 이것으로 소원(疏遠)함을 당하였다.
〈송시열이〉 사람을 대하여 번번이, ‘좌상(左相)이 어찌 분명한 외척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므로, 【적(赤)은 방언(方言)에 분명(分明)이라는 말이다.】 민정중이 그 말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빨리 꺾여 들게 되었으며, 젊은 무리들도 많이 앞서의 견해를 변경하여 송시열에게 아부하며 두 마음을 품으므로 대각(臺閣)의 의논이 마침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목(黨目)이 생겼다. 소론으로 이름한 자는 조지겸(趙持謙)·최석정(崔錫鼎)·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박태보(朴泰輔)·박태유(朴泰維)·임영(林泳)·서종태(徐宗泰)·심수량(沈壽亮)·신완(申琓)·유득일(兪得一)등 여러 사람이고, 노론이라고 부르는 자는 이선(李選)·이수언(李秀彦)·이이명(李頤命)·이여(李畬)등 여러 사람이다. 전배(前輩)인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이하 노론을 돕는 자가 많았고, 소론을 돕는 자는 박세채(朴世采)·이상진(李尙眞)·남구만(南九萬)등 여러 사람인데, 노론은 훈척(勳戚)을 끼고 세력으로 억누르며, 청의(淸議)를 가진 자를 많이 말살시켰으므로 이제 송시열을 다시 사류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1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甲戌/持平朴泰維、兪得一等發金益勳加律遠竄之啓曰: "益勳以奸慝之徒, 挾勳戚之勢, 濫叨將任, 貪覬功賞, 乃於煥等譏察之時, 上下和應, 遂至變書之急上。 璽、瑛之徒雖以謀凶伏法, 而所引諸人, 俱無情實。 至於翊戴事狀, 益勳與煥機械相通, 指意交合, 始則給送軍牢, 深夜誘脅, 致令誣告, 末乃煥與翊戴偕詣其門, 詰問事情, 取供拘留, 則其間虛實, 益勳豈有不知之理乎? 當初煥誘脅翊戴, 欲探柳命堅可疑之跡, 而旣知其謀逆之狀, 不爲竝告, 則翊戴雖欲夤緣益勳, 誣人自功, 爲益勳者所宜斥絶, 不得已則使渠上變, 事理當然。 乃於設鞫屢日之後, 明知虛僞, 托變告密, 情節陰秘, 原其罪狀, 與翊戴何遠哉? 翊戴旣已承款, 則益勳之罪, 豈止削黜?" 云云。 【批見上。】 遂有兩臣巨濟、珍島斥補之命, 大臣、三司、諸承旨力爭收還。 【與初史參看。】 蓋自翊戴輸款, 公議復激, 此啓遂發, 雖以金壽恒亦不能出力救解。 宋時烈初亦是臺論, 淸流洽然嚮之會。 時烈有病不見客, 獨金萬基兄弟, 日夜在傍看護, 爲益勳哀乞。 凡所以承奉時烈者, 無不用極, 時有貂皮衾、海松粥之說。 時烈旣氣衰, 不能不牽繫情私, 遂變初見, 揚言少輩將殺益勳, 斥得一甚峻。 閔鼎重亦以此見踈, 對人輒言: "左相豈非赤外戚?" 【赤, 方言分明也。】 鼎重大畏之, 遂駸駸折入。 少輩又多變前見, 附時烈而貳。 臺議遂有老少論黨目, 名以少論者, 趙持謙、崔錫鼎、吳道一、韓泰東、朴泰輔、泰維、林泳、徐宗泰、沈壽亮、申琓、兪得一諸人爲其倡。 老論者, 李選、李秀彦、李頤命、李畬諸人, 而前輩宋時烈、金錫冑以下, 右老論者多;右少論者, 朴世采、李尙眞、南九萬諸人, 而老論挾勳戚, 以勢力勝之, 持淸議者多致抹摋。 於是乎時烈不復爲士類矣。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1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