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시니, 바로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104)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왕(王)을 낳으셨다.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 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묘께서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께서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이 현묘께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跪拜)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정미년105) 정월(正月)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106) 정월(正月)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에 참배하고 8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여 선성(先聖)을 전알(奠謁)하였다. 이어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를 차린 용모가 씩씩하고 엄숙하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에 둘러서서 보고 듣는 자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경술년107) 3월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108) 4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었다. 이때 왕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는데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接見)하며 부지런히 강마(講磨)하여 문리(文理)가 크게 통달(通達)하고 예덕(睿德)이 날로 향상되었으며, 빈사(賓師)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이 갑자기 죽자, 하령(下令)하기를, ‘내 마음이 슬픔에 싸여 실로 스스로 안정(安定)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날의 은근한 가르침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목이 메어 소리가 막힌다.’ 하며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갑인년109) 에 현종께서 병환이 나시자 왕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애태우며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대점(大漸)이 되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경건히 기도하게 하였다. 8월 18일 기유(己酉)에 현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이 우수(憂愁) 속에 상주(喪主) 노릇을 하시며 수장(水醬)조차 들지 않고 반호(攀號)하고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니, 모시는 자가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못하였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니 도로 내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져 망극(罔極)한 가운데 또 이런 말을 들으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다.’ 하며, 근신(近臣)과 삼사(三司)에서 여러번 청해도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大臣)이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며 세 차례 청한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23일 갑인(甲寅)에 왕이 여차(廬次)에서 걸어 나오는데, 울며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다. 이어서 연영문(延英門)으로부터 걸어 나와 인정문(仁政門)의 계단 위에 이르러 오랫동안 서서 어좌(御座)에 나아가지 않았다. 승지(承旨)와 예관(禮官)이 달려가 나아가기를 권유하니, 왕이 따르지 않고 소리내어 울 뿐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간청하니, 왕이 어좌에 올라가 곡했는데, 눈물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뜰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모두 다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고, 위졸(衞卒)이나 이예(吏隷)들까지도 눈물을 씻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禮)를 마친 후에 걸어서 여차로 돌아왔는데, 울어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며, 언제나 신료(臣僚)로서 처음 보는 이를 대하면 곧 곡하였다. 조용히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이런 대위(大位)에 올라 사리(事理)가 어떠한 것을 알지 못하니, 무릇 여러 가지 정령(政令)에 있어 혹시라도 망령되고 그릇된 것이 있을까 두렵다. 다만 대신이 잘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왕은 보위(寶位)에 오른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임무로 여겨, 상방(尙方)이 연시(燕市)에서 무역(貿易)하는 것을 특별히 정파(停罷)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대신(臺臣)의 말로 인해 또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을 사들이는 것을 정파하였다. 새 능의 석물(石物) 공사가 매우 거창했는데, 왕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영릉(寧陵)의 옛 석물을 옮겨다가 씀으로서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
이때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이 채 연상(練祥)110) 이 되지 않았는데, 예관(禮官)이 ‘왕이 대신 복(服)을 입는 예(禮)’를 계의(啓議)하니, 왕이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졸곡(卒哭)한 뒤에 조전(朝奠)111) 으로 인해 복(服)을 입었다. 이는 대개 고인(古人)의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살아계신 것을 본뜬다.’는 뜻을 적용한 것이다.
왕은 흉년든 해에 민생(民生)의 고달픔을 깊이 진념(軫念)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군포(軍布)의 절반을 경감해 주었고, 신해년112) 이전 환상(還上)으로 지적해 징수할 곳이 없는 것과 함경도(咸鏡道)의 임자년113)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것 등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였다.
12월 임인(壬寅)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을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발인(發靷) 때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했고 반우(返虞)114) 때는 교외(郊外)에서 맞이해 곡하였다.
을묘년115)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경사전(敬思殿)의 삭망(朔望) 배제(陪祭) 때 신료(臣僚)들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백포(白袍)·백모(白帽)·백대(白帶)로 제례(祭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를 드렸다. 가을에 산릉(山陵)을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하고 수령이 사조(辭朝)할 때 반드시 인견(引見)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하문(下問)하였으며, 또 입을 벌리기를 좋아하거나 명예를 노리지 말도록 하였다. 간혹 그 적합하지 않은 자를 살펴 체직시키기도 하며, 하교(下敎)하기를, ‘「수목(守牧)은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전조(銓曹)에서 잘못 의망(擬望)한 죄를 무겁게 진다.」는 것을 일찍이 이미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는데, 봉행(奉行)하는 것이 정차 해이해져 능히 가려서 임명하지 못한 나머지 근래에 방백(方伯)이 아뢰어 파직시키는 일과 대각(臺閣)의 탄핵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 별도로 거듭 밝힌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여 경칙(警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오늘이 나의 생일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짐(朕)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서글픈 느낌을 이루니, 어찌 연락(宴樂)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자로(子路)는 일찍이 백리(百里) 밖에서 쌀을 져다가 부모(父母)를 봉양했는데, 부모가 죽자 항상 쌀을 져오던 날을 생각하였다. 지금 나는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니, 어찌 편안하게 그대로 탄일(誕日)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평일처럼 봉(封)할 수 있겠는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제작하게 했는데, 친히 글을 짓고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느날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뒤에 배가 편안하고, 신하가 현명(賢明)한 뒤에 임금이 편안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그림의 의미를 체득하여 보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도(道)의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의 백성을 위하는 일념(一念)은 자나깨나 느슨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늘 쌀 한 알 한 알이 신고(辛苦)임을 생각하고, 옷 한 벌을 입을 때마다 늘 방적(紡績)의 노고를 생각한다. 근년의 기근(飢饉)은 8도(八道)가 모두 다 그러한데, 기전(圻甸)·양서(兩西)·영서(嶺西)·영북(嶺北)이 더욱 시급하다. 반드시 미리 요리(料理)한 연후에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거의 구렁에 떨어지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십행(十行)의 천찰(天札)에 말뜻이 애절하니, 중외(中外)에서 그것을 듣고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음홍(淫虹)이 해를 꿰뚫음으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신하들을 칙려(飭勵)하였으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병진년116) 에 수의(繡衣)를 나누어 보내어 수령(守令)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살피도록 하였다. 빈사(儐使)의 장계(狀啓)로 인해 한 현리(縣吏)가 치적(治績)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포상을 준 것을 알고 마침내 어사를 처벌하였다.
개성부(開城府)에 화재(火災)가 나서 5백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주진(賙賑)하도록 하였다.
8월에 현묘(顯廟)의 대상(大祥)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8일 정축(丁丑)에 산릉(山陵)을 전알(展謁)하였다. 10월에 담제(禫祭)를 거행하고 12월에 친히 편전(便殿)에서 대정(大政)을 거행하였다.
정사년117)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文武)를 시험하여 뽑았다.
혜패(彗孛)118) 의 재앙 때문에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대책을 적어 올리게 하였다. 시절이 오랫동안 가뭄이 든 것을 걱정하여 친히 사직단에 기도하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감하며,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하였다. 영희전(永禧殿)을 중수(重修)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무오년119) 에 왕이 병환을 앓으시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나았다. 예관(禮官)이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쳐 드려 마음이 몹시 황송했는데, 어찌 칭경(稱慶)하는 일에 안심(安心)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극력 청하니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그래도 외방(外方)에서는 단지 하전(賀箋)만 올리고 방물(方物)은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왕위를 욕되게 한 후로 한재와 수재가 서로 연속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양맥(兩麥)120) 이 타서 말라 죽고 온 들판에 푸른 식물이 없는데, 우박과 천둥, 얼음덩이의 변이 여름철에 계속 발생하니,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건대, 실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않다. 오늘부터 정전을 피하여 더욱 경외(敬畏)를 더할 것이니, 아! 그대들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각각 서로 공경과 화합을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상선(常膳)을 감하고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 또 양국(兩局)과 병조(兵曹)에 명하여 아약(兒弱)을 충정(充定)한 경우 물고자(物故者)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종류를 분명히 조사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몸소 종묘(宗廟)에 기도하고 다시 하교(下敎)하여 직언(直言)을 구하기를, ‘오늘의 이 한발(旱魃)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혹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옥송(獄訟)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궁금(宮禁)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언로(言路)가 막히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아닌가? 과매(寡昧)한 나의 득실(得失)과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각각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기미년121) 에 인조조(仁祖朝) 공신(功臣)의 아내로서 서울에 있는 이를 호조(戶曹)로 하여금 월름(月廩)을 주게 하고, 시골에 있는 이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주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돈은 한 나라의 통화(通貨)이고 백성들 역시 즐겨 사용하니 계속해서 주전(鑄錢)하여 성과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 동철(銅鐵)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을 정지하는 날이 많다. 이제 동철 1백 근(斤)을 내리니, 주전에 보태는 자료로 삼으라.’ 하였다.
승도(僧徒)를 조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를 쌓았다. 하교하기를, ‘강도는 나라의 보장(保障)이니, 돈대를 설치한 것은 사전에 대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다만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여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비록 징발되어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다 해도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농사를 방해하는 우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근시(近侍)를 보내어 진휼(軫恤)하는 뜻을 선포하고 금년의 전조(田租)122) 를 하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 1만 명에 가까운 승도가 멀리서 부역하니, 쌀 1석(石) 3승(升)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만일 함부로 소란을 떨며 시골 마을에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을 경우 군율(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간(臺諫)은 군주(君主)의 이목(耳目)이므로 하루라도 잠시 비워둘 수가 없는데, 근일 대간(臺諫)이 혹은 추고(推考) 때문에 인피(引避)하기도 하고, 또는 벼슬을 임명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기도 하여,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체직(遞職)되니 매우 고례(古例)에 어긋난다. 이제부터는 실지로 병이 있는 자가 아니면 사직 단자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양사(兩司)에서 서로 감추(勘推)하도록 하라. 조관(朝官)의 부모가 연로(年老)하면 식물(食物)을 하사(下賜)하는데 유독 종척(宗戚)·의빈(儀賓)에 대해서는 추은(推恩)의 은전이 없으니,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에게는 의자(衣資)와 식물을 똑같이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격쟁(擊錚)123) 이 분운(紛紜)한 것은 반드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사정(私情)에 끌리고 형세에 구애되어 잘못된 줄을 알면서 그릇 판결한 소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다면 백성들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추조(秋曹)124) 의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된 경우가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 간혹 사사로운 뜻에 견철(牽掣)되어서 세월을 지연시키며 곧바로 회계(回啓)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종전의 버릇을 답습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다시 법령(法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중죄(重罪)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에 노량진(露梁津)에 나아가 대열(大閱)125) 하고, 강(江)가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묘소(墓所)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흉인(凶人) 이유정(李有湞)이 이름을 숨기고 돈대를 쌓는 일에 대해 투서(投書)하였는데, 말한 바가 몹시 불측하므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은 법을 시행함에 차등이 있었다. 종실(宗室) 이혼(李焜)·이엽(李熀) 형제가 이름이 흉서(凶書)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마지못해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는데, 늠료(廩料)와 의자(衣資)를 후하게 주고 부리는 사람을 정해 주었다. 그 어린 나이에 형제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겨 같은 곳에 송치(送置)하였고, 어머니와 아내로 하여금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의원(醫員)을 보내 구호(救護)하고, 현관(縣官)은 차례로 말을 주고 먹을 것을 주도록 하였다. 뒤에 양이(量移)126) 를 명하였고, 갑자년127) 에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 때 있었던 반사(頒赦)로 인해 특별히 방유(放宥)를 명하였다.
왕은 유교(儒敎)가 폐이(廢弛)되었다며 경상(慶尙)·전라(全羅) 양도(兩道)에 4명의 계수관(界首官)과 제독관(提督官)을 다시 설치했고,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材)를 하고 겸하여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은 마땅히 구례(舊例)에 따라 돈을 더 지급해야 하지만, 돈이 지금 부족하여 형세가 장차 계속하기 어려우니, 6품 이상의 감(減)한 녹봉에 대하여 먼저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니 하교하기를,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재변이 순음(純陰)의 달에 나타났으니, 조용히 나의 허물을 생각하건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마땅히 더욱 경척(警惕)을 더할 것이나,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습관을 말끔히 없애고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에 힘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사(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내어 약간인(若干人)을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홍범(洪範)의 글을 강(講)하는데,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여 이륜(彛倫)을 펴게 했고, 동방(東方)에 봉해지자 크게 교화(敎化)를 밝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연하여 기술할 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신년128) 에 하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묘정(廟庭)에 대신(大臣)을 배향(配享)하는 일이 없었던 세대가 없었다. 그런데 선왕(先王)의 묘정에만 유독 대신이 없으니, 선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불만족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세종조에 태종(太宗)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셨는데, 남은(南誾)·조준(趙浚)·조인옥(趙仁沃)을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남은은 국가 자손 만세(萬世)의 원수」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를 빼버렸다가 뒤에 태종의 하교(下敎)로 인해 결국 추배(追配)하였다. 고려(高麗) 시조묘(始祖廟)의 네 신하129) 도 또한 추배하였는데, 그때 당 태종(唐太宗)의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이 일은 비록 고례(古例)가 없다 하더라도 의리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미 선조(先朝) 때 시행한 성전(成典)이 있고, 또 당조(唐朝) 고사(古事)의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빈청(賓廳)으로 하여금 권점(圈點)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빈청에서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로 권점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정태화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으로 배향(配享)을 의정(議政)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정태화를 빼버렸다가 이때에 와서 추배하였다. 뒤에 또 대계로 인해 조경을 빼버렸다.
하교하기를, ‘재이(災異)가 연달아 닥쳐 어려움과 근심이 눈에 가득하고, 와언(訛言)이 물끓듯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으니, 연곡(輦轂)130) 의 친병(親兵)131) 의 장수는 나라의 지친(至親) 중에서 지위가 높은 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즉시 훈련 대장(訓鍊大將)에 제수하여 곧 그날로 병부(兵符)를 받아 임무를 살피도록 하고, 또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摠戎使)에 제수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132) 는 전국(戰國)의 선비였으나, 오히려 국가의 위급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사적인 원수를 뒤로 미루었다. 과인(寡人)의 여러 신하들은 사당(私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국가는 뒤로 미루어 공도(公道)는 상실되고 사의(私意)가 크게 유행한다.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오로지 한쪽편의 사람들만을 등용하여 권세(權勢)가 편중되고 교만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해지니, 결코 태아(太阿)133) 의 자루를 거꾸로 쥐어주어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고립되고 당여(黨與)는 아래에서 더욱 치열하게 만들 수 없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원정(李元禎)을 우선 먼저 삭탈 관작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라.’ 하였다.
여러 역적들을 토벌하고 보사공(保社功)을 녹훈(錄勳)하였다. 왕이 사복(嗣服)한 초기에 여러 소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王室)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여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건청(建請)하였다. 대개 친잠을 하면 마땅히 빈어(嬪御)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의 딸을 들여보내 중궁을 동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미 길일(吉日)을 가려 장차 거행하려 하였는데, 하늘에서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니, 바람에 단선(壇墠)134) 과 장막이 마구 흔들려 부수어지고 찢어지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역종(逆宗) 이정(李楨)·이남(李柟)·이연(李㮒) 형제는 모두 효묘와 현묘 양조(兩朝)의 권애(眷愛)를 받아 궁중에 출입하며 한도가 없었는데, 점차 더욱 교만하고 음란해졌다. 현묘의 대상(大喪)이 처음 났을 때 남(柟)이 또 대전관(代奠官)으로서 빈전(殯殿)에 기거하면서 양궁(兩宮) 사이를 엿보며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넘겨다보았는데, 제구(諸舅)135) ·형제·빈객(賓客)들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우익(羽翼)이 되었다.
허적(許積)의 얼자(孼子) 허견(許堅)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오랫동안 딴 뜻을 품어왔는데, 그 간교하고 기만적인 일이 드러나자 크게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부자가 더욱 급하게 계책을 꾸며서 체찰사(體察使)에 제수되어 군무(軍務)를 통괄할 것을 도모하고, 유혁연(柳赫然)과 서로 교분을 맺어 멋대로 사병(私兵)을 만들려고 했다. 드디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함께 밤낮으로 모의하여 화(禍)가 조석(朝夕)에 닥쳤다. 왕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처리하여 먼저 병권(兵權)을 빼앗는데, 한 두 폐부(肺腑)의 신하가 그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하는 것을 살폈으므로 적(賊)이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원로(鄭元老)가 상변(上變)하여 남(柟)과 허견(許堅)을 고발(告發)하니, 자백을 받아 허견이 처형되었다. 왕이 특별히 종친(宗親)를 후대(厚待)하는 의리를 미루어 남(柟)은 경전(磬甸)되었다. 즉각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줄 것을 명하였다. 허적과 유혁연이 차례대로 처형되었다. 또 이원성(李元成)이 추가로 고발한 것으로 인해 흉얼(凶孼) 중에서 법망(法網)을 빠져 나갔던 오정창·최만열(崔晩悅)·정원로 등이 복법(伏法)되었다. 책훈(策勳)하여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 등에게 보사 공신(保社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왕에게 아뢰기를, ‘송준길(宋浚吉)은 오랫동안 서연(書筵)의 반열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보도(輔導)하였고, 허적(許積)의 사람됨을 소론(疏論)하며, 「이필(李泌)이 노기(盧杞)를 논한 일」136) 을 인용해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허적의 죄악이 밝게 드러났으니, 그의 말이 과연 증명이 된 것입니다. 송준길이 비록 매얼(媒孼)137) 하는 자가 죄를 얽어 물리친 것 때문에 끝내 〈벼슬을〉 추삭(追削)당하기는 했지만, 성심(聖心)이 이제 이미 개오(開悟)하셨으니, 마땅히 그 작의를 추복(追復)하고 사제(賜祭)하여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빈신(儐臣) 오시수(吳始壽)가 통관(通官)의 거짓 공갈로 인해 거기에 구어(口語)를 더 보탰는데, 말이 선조(先朝)를 침범했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이 말을 듣고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수상(首相)에게 명해 통관(通官)의 말이 나온 곳을 가서 힐문하도록 하자, 빈신이 빙자해 환혹(幻惑)시킨 단서가 모두 폭로되었다. 또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이 이정(李楨)·이연(李㮒)이 궁인(宮人)과 교란(交亂)한 정상을 소론(疏論)하니, 흉당(凶黨)이 급히 구대(求對)하여 캐물으며 반좌(反坐)138) 하려고까지 하였다. 명성 왕후께서 대신(大臣)을 발[簾] 앞으로 불러서 격절(激切)하게 교유(敎諭)하니, 유사(有司)가 비로소 정·연의 죄상을 신문하였으나, 반드시 동조(東朝)를 동요시켜 간계(奸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윤휴(尹鑴)가 이에,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한다.’는 말을 연중(筵中)에서 공공연히 말하니, 나라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왕이 오시수와 윤휴를 죄주고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강도(江都)·남한(南漢)의 신해년139) 이전의 환상(還上)으로 봉납(捧納)하지 못할 것을 탕척(蕩滌)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찬(撰)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대학(大學)》에 근본하고, 《연의(衍義)》에서 요약하여 거세(巨細)와 정조(精粗)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宣祖)께서 크게 칭상(稱賞)하셨습니다. 만일 소대(召對)할 즈음에 수시로 강론(講論)하고 또 한가하신 가운데 예사로 즐겨 찾아보신다면 그 공효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본관(本館)에서 올린 《대학연의(大學衍義)》는 내가 일찍이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여 펼쳐 보기 어려운 점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이제 들건대, 《성학집요》가 진실로 절실하다고 하니, 즉시 써서 올리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원임(原任) 2품 이상,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밤에 서운관(書雲觀)의 초기(草記)를 보았더니, 「어떤 별이 태미 서원(太微西坦) 밖으로 들어갔는데, 꼬리 부분의 자취가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므로 경(卿) 등을 불러서 재앙을 방지할 방도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외람되게 큰 기업을 계승하여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부합되지 못하니, 인애(仁愛)스러운 하늘이 이런 재앙을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아픔이 몸에 있는 듯하니, 승지(承旨)는 나를 대신해 교서(敎書)를 초(草)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소(大小)의 여러 신하들은 능히 자신의 직무를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신해(辛亥)에 중궁(中宮)이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 기염(氣焰)이 하늘을 뒤덮던 시기를 당하여 혹은 형세를 조성(助成)한 자도 있었고 또한 사론(邪論)에 붙었던 자들도 있었으니, 이런 무리들은 이미 사방의 변방으로 추방하여 악(惡)을 징계하는 형벌을 분명하게 보였다. 이 밖의 나머지 사람들로 능히 스스로 퇴파(頹波)140) 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또한 어찌 족히 무겁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이제 경중의 구별이 있으니,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 되었다. 양(陽)에는 펼치고 음(陰)에는 참담하며 봄에는 살리고 가을에는 죽이나니, 인주(人主)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큰 권한을 가졌다. 이처럼 재이(災異)가 빈번히 발생하고 인재(人才)가 아주 적은 시기를 당하였으니, 즉시 경중에 따라 거두어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유년141) 에 하교하기를, ‘방백(方伯)은 명령을 받들어 교화를 베푸는 자이다. 한 도(道)에 강기(綱紀)를 세워서 다스리고 군(郡)·읍(邑)을 총괄하여 살피니, 그 책임이 생각하건대 중대하지 않겠는가? 비록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들어 시행할 줄 알지 못한다면 조정[朝家]의 은택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순리(循吏)나 오관(汚官)이 있다 하더라도 등용과 축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고적(考績)142) 의 정사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현재 여러 도(道)의 방백을 신중히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재망(才望)과 위중(威重)을 가지고 그 직책을 다한 자가 드물어서 내가 매우 개탄(慨歎)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자급(資級)과 이력(履曆), 그리고 일찍이 있었던 죄루(罪累)를 물론하고 별도로 초천(抄薦)·저양(儲養)하여 악목(岳牧)을 위임하는 뜻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척화(斥和)한 세 신하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의 사당을 세우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부류에게 연역(煙役)143) 을 감해 주고 나이 80세가 된 자들에게는 식물(食物)을 하사하였으며,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는 구제(舊制)를 따라 5승(升) 35척(尺)으로 법식을 정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차자(箚子)를 올리고 물러나 귀향(歸鄕)하니, 중신(重臣)을 보내어 머무르는 곳에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2월 병오(丙午)에 인경 왕후(仁敬王后)를 익릉(翼陵)에 장사하고, 고양군(高陽郡)의 춘수미(春收米)를 특별히 감해서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드니 소결(疏決)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정상과 죄질이 모두 무거운 자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겠지만, 죄상은 무겁고 정상은 가벼운 자는 반드시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푼 뒤에라야 깊을 원한을 풀어주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다. 비록 그렇지만 경중을 따지지 않고 혼동하여 석방한다면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희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정상과 죄범(罪犯)을 참작하고 적당히 헤아려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5월 2일에 민씨(閔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이다. 이때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뒤 대신(大臣)·경재(卿宰)·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물었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을 칙려(勅勵)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논하기를, ‘중궁(中宮)의 상(喪)에 연제(練祭)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의 의논 가운데 「폐각(廢却)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은 자못 예(禮)를 사랑하여 양(羊)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144) 는 설이 옳다. 대저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며 15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것은 고금(古今)에 바꿀 수 없는 제도이다. 지금 만일 변제(變除)하는 절목이 없다는 핑계로 연제를 거행하지 않는다면 정리상 그리고 예의상 부족함이 있다. 비록 이미 상복을 벗었으니 3년의 의리를 완전히 폐(廢)할 수는 없으니, 연제와 담제의 절목을 즉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연제를 지내는 날 드디어 혼전(魂殿)에 친림(親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국가에 일이 많고 또 흉년(凶年)을 만났기 때문에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지 못한 지 이제 이미 5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이제 경릉(敬陵)을 전알하고 이어서 새 능을 참배하여 슬픈 심회를 풀고자 하니, 도로나 교량(橋梁)을 절대로 대단하게 수리(修理)하지 말라. 또한 식거(植炬)145) 도 하지 말고, 도성(都城)에 머무는 군병(軍兵)을 징발(徵發)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기보(圻輔)는 상번(上番) 어영군(御營軍)으로 숙위(宿衞)하게 하라.’ 하였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치자 왕이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야대는 비단 밤의 기운이 고요할 뿐만 아니라 강론(講論)이 재미가 있다. 한 당(堂)에서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애연(藹然)히 가족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기 때문에 일찍이 효묘조(孝廟朝) 때는 자주 야대하시고 술을 권하며 즐거워하셨다. 그대들은 지금 각각 안심하고 주량(酒量)대로 술을 마시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들러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학교의 행정이 폐이(廢弛)해졌으니, 모름지기 닦아 밝힌 뒤에야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가져다가 오늘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참작해 강정(講定)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궁중에 불경(佛經)을 유치(留置)한 일이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분명 이교(異敎)에 유의(留意)하시지 않겠지만 외부 사람들은 생각건대 혹시 의심을 두기도 할 것이니, 마땅히 내어주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경(卿)에게 내어주고자 한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군상(君上)은 높은 자리에 계시니, 어찌 능히 민간 일의 고생과 어려움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䎘)의 집에 옛 화병(畫屛)이 하나 있는데, 우리 나라 민간(民間)의 사시(四時) 농공(農功)을 자못 상세히 그렸습니다. 마땅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모화(摹畫)해 들여오도록 하여 예람(睿覽)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빈풍(豳風)146) 의 화병을 만들어서 보았는데, 이제 듣건대, 이 병풍은 우리 나라의 농공을 그렸다고 하니 더욱 보고 살필 만한 것이다. 대내(大內)로 들이도록 하여 본 뒤에 이모(移摹)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술년147) 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왕이 보신(輔臣)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하늘의 재앙이 거듭되는데, 이제 무지개의 재변이 또 이와 같으니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못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백골(白骨)·인족(隣族)·아약(兒弱)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폐단을 많이 말하여 호포(戶布)를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니, 대신(大臣)·비당(備堂)·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신역(身役)의 편중(偏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으니, 균역(均役)으로 폐단을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로 호포법(戶布法)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절목(節目)이 결정되기도 전에 듣는 사람들이 먼저 놀라고, 민정(民情)이 소란스러우며 조의(朝議)가 떠들썩하니, 아무리 양법(良法)·미정(美政)이 있더라도 형세상 과단성 있게 시행할 수가 없다. 지금 우선 정지하여 부의(浮議)를 눌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는 바탕으로 삼고, 연사(年事)를 천천히 보아서 조용히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진백(陳白)하기를, ‘올해의 흉황(凶荒)은 기호(圻湖)가 더욱 극심합니다. 기전(圻甸)은 이미 대동(大同)을 감(減)해 주었는데, 이제 만일 호서(湖西)까지 감해 주는 것을 허락한다면, 해청(該廳)의 수용(需用)이 바닥이 날 것이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일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혀 견감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자못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니니, 더욱 극심한 고을 다음가는 고을에 대해서 똑같이 1두(斗)씩 감해 주라.’ 하였다.
평양(平壤) 민가(民家)에 화재(火災)가 발생하여 3백 40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쌀 5백여 석(石)을 하사하여 나누어 진휼(賑恤)하게 하고, 그 신역(身役)을 감해 주게 하였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다가 비가 내리자 ‘희우시(喜雨詩)’란 시제(詩題)를 내어 승지(承旨)·옥당(玉堂)에 명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어사(御史)를 남한(南漢)에 보내어 시재(試才)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군제(軍制)를 변통해야 함을 전후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은 형세상 갑자기 크게 변경하기 어렵다.’ 하고, 이에 별대(別隊)와 정초(精抄)를 합설(合設)하여 금위영(禁衞營)을 만들었다. 이는 대개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을 채용한 것이다.
문묘(文廟)의 사전(祀典)을 수정(修正)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종향(從享)된 분 가운데 수장후(壽長侯) 공백요(公伯寮)·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기양백(歧陽伯) 가규(賈逵)·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사공(司空) 왕숙(王肅)·사도(司徒) 두예(杜預)·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임천백(臨川伯) 오증(吳澄)을 출향(黜享)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중에서 첩향(疊享)으로 인해서 신당을 빼버렸으며, 건령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숭안백(崇委伯) 채침(蔡沈)은 서열(序列)이 잘못되었다 하여 위치(位置)를 개정하였고, 송조(宋朝)의 장락백(將樂伯) 양시(楊時)·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과 본조(本朝)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새로 성무(聖廡)에 배향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종사(從祀)해야 된다는 주청(奏請)은 인조조(仁祖朝) 을해년148) 부터 시작되었는데, 선조(先朝) 무신년149) 무렵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유생들이 다시, ‘송조(宋朝)의 3현(三賢)을 함께 배향해야 된다.’는 의논을 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보(章甫)150) 가 누차 호소하니,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다 함께 승배(陞配)하게 하였다. 또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으로 인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한결같이 명(明)나라 제도에 의해 산출(刪黜)하고 개정하도록 했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 우의정 김석주가 말하기를, ‘지난 경인년151) 무렵에 조정에서 사람을 뽑아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뒤 명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사람을 보내와서 선천(宣川)에 머물며, 이어 더불어 교역(交易)하였습니다. 뱃사람 중에 서(徐)씨 성을 가진 자가 시종 왕래하면서 통신(通信)하였는데, 청(淸)나라 사람이 사문(査問)할 때 그 사람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으니 포상(褒賞)의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천한 사람으로 무식하지만 능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충성이 칭찬할 만하다. 그의 자손 중에 등용할 만한 자는 녹용(錄用)하고, 역(役)이 있는 자는 그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152) 한 군병으로 나이 70 이상 되어 가자(加資)한 자에게 요미(料米)를 주었다.
혜성(彗星)이 견기(見幾)153) 하였다가 두 달 만에야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 말에 「천하(天下)를 가지고 그 어버이에게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근래에 해마다 연이어 흉년(凶年)이 들었으므로 풍정(豊呈)의 성대한 예식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였기에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금년 농사 또한 풍년이 들지 못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처럼 나라가 조금이나마 평안한 때에 위로 두 분 자전(慈殿)을 받들고 새해에 장수(長壽)를 비는 축원을 올린다면, 이것이 어찌 풍형 예대(豊亨豫大)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전적으로 자식으로서 애일(愛日)154) 하는 지극한 정에 말미암은 것이다. 풍정에 대한 절목(節目)을 조속히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진연(進宴)의 절목은 자전(慈殿)의 하교에 따라 간략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지금 하늘이 경계를 보여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금년의 풍재(風災)는 태고적부터 없던 것이다. 일기(日記)155) 를 살펴보면 을해년156) 과 신묘년157) 의 풍재(風災)가 실로 기왕의 분명한 증험이다. 그 응험이 반드시 그때와 같을는지 비록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근심스러운 단서(端緖)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일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양향(糧餉)이 가장 시급한데,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저축이 텅 비어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듣건대, 호조(戶曹)에서 저축해 놓은 포목(布木)이 있어 그 수량이 꽤 넉넉하다고 하니, 이것을 돌려 쌀로 사들이든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조치하라는 뜻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경기(京畿)의 대동미(大同米)와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를 합한 1만 석을 강도(江都)에 수송할 것을 명하였다. 훈국(訓局)의 포보(砲保)158) 와 공조(工曹)의 장포(匠布) 역시 쌀로 바꾸어 수송하도록 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진상품인 인삼(人蔘)은 특별히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김환(金煥)이 상변(上變)하여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처형되었다. 바야흐로 설국(設鞫)하는 날 김중하(金重夏)와 전익대(全翊戴)가 유명견(柳命堅)·수윤(秀胤) 등의 일을 은밀하게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에게 말하니, 김익훈이 계달(啓達)하였다. 국문해 보니, 일이 허황하고 거짓된 것이 많았으므로, 김중하와 전익대는 사형(死刑)을 감하여 유(流) 3천 리에 처하였다.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의 진백(陳白)에 의해 각릉(各陵)의 기제(忌祭)에 쓰이는 채화(綵花)159) 를 줄였다. 어사(御史)를 삼남(三南)과 북도(北道)에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겸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령(政令)의 시조(施措)가 점차 끝까지 잘된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여 곧은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곤궁한 것인가? 사치가 풍속을 이루어 쓸데없이 허비함이 너무 많은 것인가? 등용하고 버림이 공정하지 못하여 사의(私意)가 제멋대로 전파되는 것인가?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백관들이 직무에 태만한 것인가? 옥송(獄訟)이 정체됨이 많아서 원망과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것인가? 바른 말을 널리 구하여 혹시라도 숨김이 없도록 하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은 맑고 깨끗한 한 마음으로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고, 자기 한 사람의 사심(私心)을 끊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장관들에게 인재(人才)를 천거하도록 하고, 내수사(內需司)의 호초(胡椒)·단목(丹木)·백반(白礬)·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특별히 내려주어 진휼 자금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내국(內局)160) 에는 청대죽(靑大竹)을, 내농포(內農圃)에는 가출마(加出馬)를 감하여 주었고, 훈국(訓局)·군기시(軍器寺)의 월과(月課)와 내궁방(內弓房)의 활 만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주방(酒房)의 주미(酒米)를 경감하고, 반사(頒賜)하는 이엄(耳掩)과 초피(貂皮) 또한 절반으로 감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유(韓愈)의 글 가운데 하번(何蕃)의 전기(傳記)를 읽어보고, 또 송(宋)나라의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적(事蹟)을 보았는데,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무릇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 어찌 다만 그들로 하여금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이들 세 사람을 성균관(成均館) 곁에 작은 사당을 따로 세워 제사지내고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만들었으면 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계해년161) 에 태묘(太廟)에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전부터 종묘(宗廟)의 영녕전(永寧殿)을 참배할 때 계단 아래서 배례(拜禮)를 행하고 물러나왔는데, 정리상 몹시 부족함을 느꼈다.’ 하고, 이에 배례를 마치자 그대로 영녕전 안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에 대신(大臣)이 새해들어 면계(勉戒)한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계하여 가르침이 간절하고 지극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정과 뜻이 서로 진실한 것이 중요한데, 근래에 밖으로는 옥송(獄訟)이 공평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논의가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고 착하게 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으니, 오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사의(私意)를 버리고 다함께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를 생각한다면, 나도 또한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하교하기를, ‘한발(旱魃)의 참상이 갈수록 더욱 혹독해지니, 며칠 안으로 만약 비가 흠뻑 적시는 은택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천리(千里)가 적지(赤地)162) 가 됨을 면치 못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말을 하다 이에 미치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싶다. 내가 마땅히 나의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드릴 것이니, 인구(引咎)·자책(自責)하는 뜻으로 각별히 말을 만들어 제문(祭文) 가운데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를 수행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집사관(執事官) 이하는 부디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그 몸을 목욕하고, 그 의복을 깨끗이 씻은 뒤 경건하게 재숙(齋宿)163) 할 것이며, 혹시라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팎 각처의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들을 각별히 깨끗이 청소하라.’ 하고, 드디어 태묘에 비를 내려 주기를 기도하였다. 또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하는 일이 착하지 못한 것이 많았기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게 만들었다.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상재(霜災)가 너희들의 화곡(禾穀)을 해쳐 나의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심장이 칼로 베는 듯하고 너희들의 위에 임할 면목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고 아내와 자식들을 보전하여 혹시라도 유랑(流浪)하거나 이산(離散)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바야흐로 입고 먹는 것을 깎고 줄여 너희들을 구해 살릴 계책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여기지 말라. 아!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냐? 부모가 비록 혹 가난하여 제 자식을 양육하지 못할지라도 어찌 그 자식으로서 부모를 버리고 떠나가는 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간혹 굶주림에 몰려 도적이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것이 본심(本心)이겠는가? 실로 내가 너희들의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지 못한 데서 말미암아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또 평소의 교화(敎化)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다. 너희 할아비와 너희 아비부터 우리 조종(祖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그 전리(田里)를 보전하며 편안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해 온 지 이제 3백 년이 되었다. 지금 비록 곤궁하고 급박하더라도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유랑하여 이산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찌 착하지 않은 마음을 싹틔워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건대 경대부(卿大夫)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스스로 보통 백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각기 이웃 마을에 권유하여 혹시라도 유랑하여 이산하거나 절도(竊盜)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고 만약 서로 도와줄 형편이 되면 함께 서로 나누어 먹고 혼자만 살려 계획하지 말라. 서명(西銘)164) 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하였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물(物)에 대해서도 도리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동포에 대해서이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애통한 말을 꺼내니, 마땅히 나를 가엾이 여겨 생각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하기를, ‘아! 그대 방백(方伯)들은 혹시라도 편안히 앉아 있지 말고, 여러 고을을 순력(巡歷)해 그 고을 수령을 직접 만나 함께 흉년을 구제할 대책을 의논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만나 조정의 힘써 구휼하려는 뜻을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서 유랑하여 이산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내가 주자(朱子)가 절강성(浙江省) 동쪽의 구황사(救荒使)가 되었을 때 그 문인(門人)이 기록한 것을 보았더니, 이르기를, 「공(公)이 백성의 괴로움을 캐내고 찾아 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잠자는 일과 먹는 일까지 폐하기에 이르렀고, 깊은 산골짜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탔고,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을 물리쳤으며, 자신에게 소용되는 물품은 스스로 싸가지고 다니니, 관할 구역 안에서도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관리(官吏)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신칙해 늘 사자(使者)가 경계 안으로 들이닥치는 듯 여기니, 이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후 입견(入見)하였을 때 효종(孝宗)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절동(浙東)에서 애쓴 수고를 짐(朕)이 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첨사(僉使)·만호(萬戶)·찰방(察訪)과 같은 경우에도 또한 각기 소속된 군사와 백성이 있으니, 각각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굶주림처럼 여기고, 백성들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처럼 여기는 마음을 먹는다면, 어찌 서로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왕이 천연두에 걸렸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걸린 질환이 며칠 안 가서 바로 나았으니, 이는 실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몰래 도우신 데 힘입은 것으로, 특별한 위열(慰悅)의 행사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얼어붙는 계절에 죄수들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이하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뒤에 왕이 말하기를, ‘대개 「사(赦)」란 소인(小人)에게 요행이 되는 것으로 옛 사람이 「삼가 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 임금에게 진계(陳戒)하였다.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 인심(人心)이 각박하고 악한 때는 더욱 전에 없는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어 간사한 사람들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열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위중한 병이 조금 나았을 때 다만 위열(慰悅)이 급한 줄로만 알고 뒷날의 폐단이 한없으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여 경솔하게 뒤섞어 석방하였으므로, 뒤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비록 다시 가두고 추핵(推覈)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혹시라도 일시적인 특교(特敎)로 인해 뒷날 전례로 끌어다 응당 행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 전례로 끌어대지 말도록 할 일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를 망하게 하고 몸을 잃는 화(禍)가 진실로 한 가지 길이 아니지만, 고금(古今)서 찾아보면 술에 빠진 나머지 그 덕(德)을 뒤집어 엎은 데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조종(祖宗)께서 깊이 근심하고 먼 장래를 생각하여 간곡하게 효유(曉諭)하셨는데, 근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이 다만 모여서 술마시는 것만을 일삼아 위로는 나라일을 치지 도외(置之度外)하고, 아래로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근심 걱정을 끼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날은 군신(君臣) 상하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히 노력해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감히 술에 빠져 일을 폐할 수 있겠는가? 아! 그대 신하들은 능히 이 뜻을 체념하여 모여서 술마시는 일을 경계하고, 그대들의 직무에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 시대의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에 왕대비(王大妃)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명성(明聖)’이라 하였다. 갑자년165) 4월 명성 왕후를 숭릉(崇陵)에 부장(祔葬)하고, 양주(楊州)의 대동미(大同米)를 2두(斗)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천연두를 앓을 적에 무녀(巫女)가 대궐로 들어가 기도하였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여 논했다. 그래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형벌을 가해도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갑옷 만드는 사람은 다만 사람이 다칠까 두려워하고, 무당과 관(棺) 만드는 목수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무녀가 궁중에 들어와 기도하고 축원한 것은 참으로 지극히 불경스러운 일로, 비록 항양(桁楊)166) 아래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아깝게 여길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들이 만약 스스로 「남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또한 좋지 않을 일일 듯하다.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4월 3일에 왕대비(王大妃)의 상(喪)을 발인(發靷)하였다.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지송(袛送)하였고, 반우(返虞)할 때에는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공경히 맞았다. 하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이다. 일찍이 따로 풍정(豊呈)을 베풀어 경하를 표시하려고 하였으나, 생각하건대, 내가 이러한 도독(荼毒)167) 을 당해 애일(愛日)의 정(情)을 펼 수 없어 기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닥치니, 나의 감회가 어찌 한있겠는가? 여염집의 경우로 말한다 해도 만약 이런 경사를 만나면, 비록 상중(喪中)에 있더라도 반드시 별도로 위열(慰悅)하는 행사가 있을 것이다. 이번 자의전(慈懿殿)의 탄신일(誕辰日)에는 대내(大內)로부터 장차 설공(設供)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궁중의 시어(侍御)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모두에게 반사(頒賜)하는 은전이 있을 것이니, 진상(進上)하는 물건을 평년(平年)에 비하여 더 진상(進上)하도록 하고, 반사(頒赦)도 또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으로 인해 진하(陳賀)를 거행하지 않았다.
좌참찬(左參贊) 이단하(李端夏)가 선조조(宣祖朝)의 보감(寶鑑) 다섯 책(冊)을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嘉尙)하게 여기고, 이어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를 부르라고 명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계책을 하문(下問)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사이 선비들의 풍습이 날이 갈수록 더욱 들뜨고 경박해지니, 그 허물은 전적으로 부형(父兄)들에게 있다. 집안에 엄격한 부형이 없고 조정에 훌륭한 스승과 선비가 없으면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을 것이니, 훗날에 입신(立身)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 대사성(大司成)은 반드시 문학(文學)이 있고, 전중(典重)하며 과묵(寡默)한 자를 골라 차임(差任)하여 선비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을축년168) 에는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쌀과 면포(綿布)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청백리(淸白吏)를 가려 뽑을 것을 명하였다. 또 음관(蔭官) 중에서 곤임(閫任)에 적합한 자와 무신 당상(武臣堂上)을 골라 효종조(孝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개강(開講)할 때 번갈아가며 입시(入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옥(獄)이란 천하의 큰 명맥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경할진저 공경할진저! 오직 형벌(刑罰)은 신중히 다룰지니라.」 하였고, 《논어(論語)》에 또한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알아내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하였으니, 주언(奏讞)할 즈음에 상세하고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자식이 부모를 숨겨준다거나 아내가 남편을 숨겨준다거나 손자가 조부모(祖父母)를 숨겨주는 등의 송사는 다스리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전대(前代)의 아름다운 뜻이었다. 그리고 또 법률(法律)을 상고해 보니, 또한 「모반(謀叛)과 반역(反逆) 외에 자손·처첩(妻妾)·노비(奴婢)가 그 부모나 가장(家長)을 고발한 경우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조문(條文)이 있다. 그런데 근래 외방(外方)의 형옥 문안(刑獄文案)을 보건대, 사건이 그다지 중대하지 않음에도 간혹 자손으로 하여금 그 부모나 조부모를 증거대게 하거나 처첩에게 그 가장을 증거대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부자가 함께 죄를 범했다거나 처첩이 모두 나쁜 짓을 한 경우는 똑같이 추치(推治)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외방에 지체된 옥사(獄事) 중에는 심지어 여러 해를 경과한 경우도 있다 하는데, 만일 의옥(疑獄)으로서 처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감사(監司)가 즉시 계문(啓聞)하여 재처(裁處)할 것을 청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름지기 조속히 처결할 일을 각도(各道)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천원옥력(天元玉曆)》의 글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람과 구름, 별 등의 재앙과 상서에 대해서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기상(氣象)을 관측하고 점(占)을 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시대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이점이 있으니, 똑같이 운대(雲臺)169) 에 비치(備置)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한 건(件)을 내리니, 혹은 사들여 오고 혹은 잘 베껴 써서 보관해 두라.’ 하였다.
극심한 한발 때문에 궁인(宮人) 25명을 내보냈다. 이때 여름부터 가을이 되기까지 가뭄이 더욱 혹독해졌으므로 여러 차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왕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제문(祭文)에다 나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말이 몹시 소략하였으므로, 도로 내주어 고쳐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수향(受香)이 조금 늦어질까 염려스러워 관례에 따라 계하(啓下)하였으므로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이제 삼각산(三角山)에 대한 제문(祭文)을 보니, 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약간 언급했지만, 간절하고 급박하게 슬피 호소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다시 고쳐지어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였으며,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최복(衰服)을 벗고 임시로 길복(吉服)을 입은 채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기도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고 대단한 가뭄은 갈수록 심해져 논밭이 텅텅 비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둥지둥하며 고통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니, 이제 막 직접 기도했다 하여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남교(南郊)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제문(祭文)은 대제학(大提學)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는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뜻을 각별히 덧붙여 넣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번 가뭄은 옛날에 없던 것이다. 만약 며칠이 더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곡식조차 장차 다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애타게 근심한 나머지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몰라 구언(求言)의 교지(敎旨)를 내린 지 이미 30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잠잠하게 있을 뿐이다. 진언(進言)을 해도 써 주지 않는다면 군상(君上)의 잘못이지만, 구언을 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책임이 군하(群下)에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고,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함께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민충단(愍忠壇)170) 및 전사(戰死)한 사람과, 경신년171) ·신유년172) 에 굶어 죽은 사람 등에게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폐문(閉門)·천시(遷市) 등의 일 또한 즉시 거행하였다. 대신(臺臣)이 아뢰기를, ‘외간(外間)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금중(禁中)에서 새로 몇 개의 괴석(怪石)과 깎은 돌을 얻어 세워놓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처럼 어렵고 걱정스러운 날 자질구레한 노리개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성명(聖明)께 바라던 바가 절대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 말은 사실 지나친 점이 없지 않으나, 옛 말에 「과실이 있으면 고치고 과실이 없으면 더욱 노력하라.」고 하였으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예원(隷院)의 단자(單子)를 보았더니, 송사(訟事)를 접수한 지 3년이 되도록 판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태만한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당랑(堂郞)을 추고(推考)하라. 여러 관사(官司)의 관원들이 묘사 유파(卯仕酉罷)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실려 있고, 계하 공사(啓下公事)를 3일 만에 복계(覆啓)하는 것도 또한 수교(受敎)가 있는데, 백관(百官)들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완급(緩急)을 살피지 않고 대부분 지체시키니, 아울러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8월에 숭릉(崇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슬픈 안색과 애절한 곡읍(哭泣)에 보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12월에 친히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병인년173) 2월에 몸소 담제(禫祭)를 행하였다. 3월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차 선비들을 시험하려 했는데, 짓밝혀 죽은 거자(擧子)가 6, 7명이나 되었다. 왕이 놀라 슬퍼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험을 물려 보였다. 연신(筵臣)이 궁금(宮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진백(陳白)하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신칙(申飭)을 더하는데도 대궐 안의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워 만약 무단 출입하며 대궐 안의 말을 전파하는 자가 있다면 연설(筵說)을 누설한 죄와 똑같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에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에 풍정(豊呈)을 올렸다. 왕이 말하기를, ‘삼가 상수(上壽)의 예(禮)를 거행해 자손들이 모두 모여 밤이 다하도록 잔치를 벌이고 술잔을 들어 장수를 경하하여 화기(和氣)가 무르녹으니, 이는 실로 보기 드문 행사이다. 어찌 기쁨을 금할 수 있으랴? 지존(至尊)의 주갑(周甲)보다 더 큰 경사가 있을 수 없으니 휘호(徽號)를 받들어 올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5월에 ‘강인(康仁)’이란 존호(尊號)를 올렸다. 왕이 무오년174) 에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죽은 이애경(李愛卿)의 아들이 나이가 지금 83세인데, 효행이 탁이(卓異)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8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하교하기를, ‘예사롭지 않은 재앙이 끊이지 않고 거듭 나타나니, 근심스럽고 두려워 날이 갈수록 전전 긍긍한다. 비록 보통 해일지라도 절약해서 쓴 뒤에야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흉년에는 더욱 마땅히 절약하고 줄여야 한다. 호남(湖南)의 삭선(朔膳)을 내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덜어내어 줄여주고, 삼명일(三名日)175) 의 진상(進上)도 또한 정지하도록 하라. 여정(餘丁)에게서 거두는 포(布)를 정파(停罷)하고 첩가미(帖價米)를 없애며, 신해년176)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을 재량하여 줄이도록 하라. 그리고 소금 5백 석(石)을 제주도(濟州島)에 보내어 구휼품에 보태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년177) 에 대신(大臣)의 청에 따라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한 여러 현인들의 자손을 모두 녹용(錄用)하고 그 벼슬을 대대로 물려받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사유(師儒)의 말에 따라 연산(連山)·남포(藍浦)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서 전란을 겪은 뒤 지부(地部)로 귀속시켰던 것을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보냈다.
서도(西道)에 별과(別科)를 베풀었다. 법전(法殿)에 나가서 친림(親臨)하여 여러 종친(宗親)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강릉(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단(射壇)에서 군용(軍容)을 관람한 뒤 다섯 대장(大將)에게 구마(廐馬)를 하사하고, 군병(軍兵)들에게는 상(賞)을 내려 주었다. 만수전(萬壽殿)에 불이 나서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만수전의 화재(火災)는 실로 전사(前史)에 보기 드문 재변이다.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니, 진실로 내가 재덕(才德)이 천박하고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아주 천심(天心)에 맞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예사롭지 않은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미앙궁(未央宮)의 재앙178) 은 한(漢)나라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옛 말에 이르기를, 「사치의 해독은 하늘의 재앙보다 심하다.」 하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두려움이 갑절이나 더하다. 마땅히 정부(政府)에서는 널리 바른 말을 구하여 나의 부족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대소 신료는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며 부지런히 힘써서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릉(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언젠가 술사(術士)가, ‘장릉의 택조(宅兆)가 이롭지 않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산릉(山陵)을 옮기는 것은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반드시 봉심(奉審)한 다음 결정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하교하기를, ‘50년이나 된 능침(陵寢)을 하찮은 결점이 있다 하여 단지 풍수설(風水說)만 믿고 경솔하게 옮길 수는 없다.’ 하였다. 그 뒤로 그에 대한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특별히 고양(高陽)과 파주(坡州)의 금년 세태(稅太)179) 를 감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부터 왕위를 이은 임금의 기원(紀元)은 반드시 즉위한 다음해부터 시초(始初)로 삼았으니, 옛 역사를 두루 보더라도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이번 전시(展試)의 책제(策題)에다 「이제 14년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개점(改點)하여 내려 준다.’ 하였다.
야대 때 강관(講官)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이르기를, ‘이 술은 주량(酒量)대로 마시고 사양하지 말라. 하지만 술의 해독을 내가 상세히 알고 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또 그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하며 직무에도 피해가 있으니, 엄중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시(詩) 한 절구(絶句)를 내려 계칙(戒勅)하는 뜻을 보이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화합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훌륭한 인재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고, 등용하고 퇴진시키는 권한은 전조(銓曹)에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태평 무사할 때의 늘 하는 주의(注擬)일지라도 오히려 면려(勉勵)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지금처럼 나라일에 어려움이 많아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의(情意)를 유통시키는 때이겠는가? 반드시 자기의 사의(私意)를 떨쳐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절의(節義)를 포창하고 덕행(德行)을 숭상하며,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고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틔워 줄 것을 생각하고 용동(聳動)시키고 진작(振作)시키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관안(官案)을 살펴보고 결원이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들이고 의망한 대로 점하(點下)한다면, 한 사람의 정관(政官)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찌 친히 대정(大政)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정을 파한 뒤 선온(宣醞)하였다.
경기(京畿)·공홍(公洪)180) ·강양(江襄)181) ·황해(黃海)·함경(咸鏡) 5도(道)의 세태(稅太)의 절반을 제감(除減)해 주고, 여러 도(道)의 춘수미(春收米)를 재실(災實)을 구분하여 차등있게 면제해 주거나 경감해 주었다.
무진년182) 정월 초하루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은 뒤에 또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삼사(三司)의 금란(禁亂)·징속(徵贖)183) 의 제도를 개정할 것과 서로(西路)의 성지(城池)가 무너진 곳을 허물어지는 대로 즉시 보수할 것을 명하였다.
금루군(禁漏軍)이 대궐문이 닫힌 뒤 담을 넘어 들어왔으므로 병조(兵曹)에서 법에 따라 일죄(一罪)184) 로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매하고 용렬한 군사를 굳이 심하게 다스릴 필요가 없으니, 종중(從重)하여 곤장으로 다스리라.’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법(法)으로 간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법은 비록 이와 같지만 정상을 보면 용서할 만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차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하자, 우의정(右議政) 이숙(李䎘)이 차자(箚子)를 올려, ‘흉년에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고 또 전염병이 많다.’며 뒷날로 물려 행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옛적에 동한(東漢)의 명제(明帝)가 원릉(園陵)을 참배하려 할 때 밤에 선제(先帝)와 태후(太后)가 평상시처럼 즐거워하는 꿈을 꾸고 비통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책력을 살펴 좋은 날을 가리고 곧바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능(陵)에 올라가 참배하였다. 내가 일찍이 꿈에 효묘(孝廟)를 뵈니 효묘께서 손을 맞잡고 기뻐하시며 옥음(玉音)이 정녕(丁寧)하셨다. 깨어나니 눈물이 흘러서 양볼을 적셨으며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여 실로 스스로 억누르기 어려웠다. 신도(神道)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의 정리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한 정리가 있는 곳에는 하늘도 반드시 가엾이 여겨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런즉 저들이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령한 백성들이니, 어찌 이번의 행차가 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영릉에 거둥하였다. 광주 산성(廣州山城)의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왕이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병자년185) 에 주필(駐蹕)186) 하셨던 곳을 이제 마침 와서 보니 슬픈 감회를 가눌 길이 없구나!’ 하고,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네 고을의 봄철 대동미(大同米)를 면제해 주었으며, 여주 지역 안에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였다. 온왕(溫王)187) 의 사당과 영창 대군(永昌大君)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와 여양(驪陽)·광성(光城) 두 국구(國舅)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또 쌍수(雙樹)와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사망한 장졸(將卒)들과 신해년188) 에 굶어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곳에 사제(賜祭)할 것을 명하였다. 왕이 쌍수령(雙樹嶺)을 지나다가 어가(御駕)를 멈추고 묻기를, ‘이곳이 싸움터인가? 민영(閔栐)·허완(許完) 등이 천리(千里)의 먼 길을 달려 근왕(勤王)하고 여기에서 싸우다 죽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자 더욱 슬픔이 복받친다. 두 사람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전사(戰死)한 신성립(申誠立)과 전공(戰攻)이 있는 서흔남(徐欣男)의 자손을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 성(城)이 포위되었을 때 관속(官屬)으로서 생존한 자에게는 음식물을 제급하고, 가자(加資)하지 않은 자에게는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수용(睟容)189) 을 전주(全州)로부터 받들고 와서 강가에 도착하니, 왕이 나루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리고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를 모사(摹寫)한 신본(新本)이 완성되자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다. 화상을 모시고 지나온 각 고을의 봄 대동미를 재량하여 감면해 주고, 민전(民田)으로서 연로(沿路)에 떼어져 들어간 곳이나 각 고을의 주전(廚傳)에 지공(支供)한 것은 모곡(耗穀)으로 보상해 주도록 하였다.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증세가 위독해지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묘사(廟社)190) 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를 드렸고,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자의 대비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 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이라 하였다.
어떤 술사(術士)가 투소(投疏)하여, ‘쌍유 병결(雙乳並結)의 혈(穴)을 구하거나 아니면 일강 상하(一岡上下)의 땅을 골라 장릉(長陵)을 옮겨 모시어 두 능(陵)이 구역(區域)을 같이하는 계획을 세울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직접 살펴보고 단정(斷定)할 일이며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그 사람을 처벌하였다.
상원(祥原) 사람이 상소하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낱낱이 아뢰니, 즉시 폐지할 것을 명하였다.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어미가 옥교(屋轎)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니, 대관(臺官)이 그 교자(轎子)를 불사르고 그 하인들을 추치(推治)하였다. 왕이 ‘그들에게 출입(出入)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논계(論啓)도 하지 않고 멋대로 형벌을 가했다.’고 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금리(禁吏)와 소유(所由)191) 를 죄주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많이 간쟁하니, 왕이 말하기를, ‘당초 형신(刑訊)하게 한 것은 대개 한때의 지나친 행동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들으니 두 사람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후회스러워 실로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다시 헌신(憲臣)의 상소에 답하기를, ‘칠정(七情) 가운데서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생각건대 분노가 가장 심하다. 나의 병통은 언제나 여기에 있고, 지난번의 일 또한 한때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이런 전에 없는 과오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실로 함양(涵養) 공부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으로, 나 자신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백공(呂伯恭)192) 은 한낱 필부(匹夫)였지만 문득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각성하여 이에 그 기질(氣質)을 변화시켰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자는 또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반드시 본원(本源)이 되는 곳에 뜻을 더하여 능히 존양(存養)의 공부를 이룬 뒤에라야 거의 거칠고 사나운 병통을 떨어버리고 빈번한 후회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으로써 내 마음에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나, 어찌 밖으로 뉘우치는 단서를 보이면서 안으로 분노를 품어 사람들에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5일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발인(發靷)이 있었고, 16일에 반우(返虞)하였는데, 왕이 동교(東郊)에서 곡하며 전송했고 곡하며 맞이하였다.
기사년193) 정월(正月)에 원자(元子)의 위호(位號)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원자는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소생이다. 장씨를 봉하여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왕이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출신(出身)하는 첫길인데, 근래 과거를 치른 뒤에 언제나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고 시관(試官)을 승정원(承政院)에 불러오게 하여 ‘공정(公正)하게 사람을 뽑으라.’고 신칙(申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봄바람이 불어 얼음이 풀리고 흙의 맥박이 막 움직이니,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는 뜻을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5월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도록 하고,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올려 왕비(王妃)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가뭄 때문에 소결(疏決)하였다.
경오년194) 에 서흥현(瑞興縣) 일대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니,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 본현(本縣)의 사단(社壇)과 경내(境內)의 명산(名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6월에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였다. 10월에 장렬 왕후(莊烈王后)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삼남(三南) 지방과 경기(京畿) 각 아문(衙門)의 무진년195) 이전의 결딴난 증미(拯米)196) 6천여 석을 탕감(蕩減)해 주었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친 다음 선온(宣醞)을 명하고, 손수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이르기를, ‘막막한 천지 한이 없는데,[天地茫無垠] 이 한 몸은 너무나도 작구나.[眇然有一身] 타고난 성품은 본래 착한 것,[秉彝本自善] 물욕이 유혹해서 진성(眞性)을 잃게 되네.[物誘乃亡眞] 마음잡고 놓는 것은 호리(毫釐)에서 판가름나고,[操舍毫釐判] 성인(聖人)과 미치광이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네.[聖狂俄頃臻] 사심(邪心)을 막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고,[閉邪莫若敬] 사욕(私慾)을 극복하면 날마다 덕이 새로워진다.[克己日維新]’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도록 하였다.
신미년197) 에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그 전에 환시(宦侍)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 내수사(內需司)의 일을 진달(陣達)하였는데, 그 말이 선조(先朝)에 관련되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들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쓰라.」고 하였다. 내조(內朝)와 외조(外朝)는 옛부터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므로, 원래 마땅히 서로 더불어 수작하거나 선조(先祖)를 평론(評論)할 수 없는데, 이런 말을 가지고 또 진달하였으니, 지극히 터무니가 없다. 김덕원을 파직(罷職)하라.’ 하고, 곧이어 내시부(內侍府)에 명을 내려 그 환관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아울러 그 자서(子婿)들의 적(籍)까지 삭제해 버리게 하였다.
어제(御題)로 반유(泮儒)198) 에게 책문(策問)으로 시험을 보이고 한 방(榜) 모두 급제(及第)를 주었다.
정릉(貞陵)을 전알(展謁)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199) 의 사당에 들어가 손을 들어 읍(揖)하였다. 이어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동남(東南)쪽의 사당이 훼손된 곳을 즉시 보수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지나는 길에 여기에 들른 것은 실로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무사(武士)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아! 그대 여러 장수들은 부디 나의 이러한 의도를 체념하고 더욱 충의(忠義)에 힘써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단(射壇)에 주필(駐蹕)하고 관병(觀兵)한 뒤 다시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보리 이삭이 두세 갈래 혹은 너댓 갈래로 난 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하여 봉진(封進)하니,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호조(戶曹)에 바칠 세태(稅太) 1만 2백여 석과, 쌀 9천 5백 60여 석, 선혜청(宣惠廳)에 바칠 쌀 3만 4천 5백 60여 석을 탕감해 주고, 삼남(三南)에 주진곡(賙賑穀) 10만여 석을 이전(移轉)하여 주었다.
친히 천자문(千字文)의 서문(序文)을 짓고 세자(世子)에게 이것으로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이때 각 영문(營門)의 군졸(軍卒)들을 징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중사(中使)200) 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기를, ‘너희들이 직접 판삽(版鍤)201) 을 잡고 있으니 노고(勞苦)가 실로 많다. 나의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다만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202) 이에 나의 뜻을 선유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석뇌(錫賚)203) 를 더하였다. 또 어주(御酒) 60병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모두에게 두루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대개 또한 투료 음하(投醪飮河)204) 하는 뜻이다.’ 하였다. 또 수령(守令)들에게 명하기를, ‘군졸 중에 만약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민간(民間)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이어서 선비를 시험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회유(誨諭)하기를,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만들어 사방(四方)의 선비를 양성하는 까닭은 대개 바른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선(善)을 택해서 자신을 닦으며,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고 물리(物理)에 밝게 하고자 함이니, 어찌 단지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옛날 전손(顓孫)205) 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능히 학문이 넓고 선택이 정밀하며 조수(操守)가 간요(簡要)하다면 벼슬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찾아올 것이다. 가만히 살펴 보건대,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같이 않아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단정하여 정치의 방법에 밝게 통달한 사람은 적고, 문사(文詞)를 숭상하고 녹리(祿利)를 추구하는 자들만 넘실대니, 이것이 어찌 조종(祖宗)의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신 본뜻이겠는가? 옛적에 안정(安定) 호공(胡公)206) 이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敎授)가 되었을 적에 부지런히 바르게 계칙(戒勅)하니,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훌륭한 여러 선비들이 지척에 있고 위와 아래의 정(情)과 뜻이 막힘없이 통하니, 유액(誘掖)하고 격려하는 바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의 훈계를 공경히 들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잃지 말라.’ 하였다.
임신년207) 에 군신(群臣)들에게 교칙(敎飭)하기를, ‘백성들의 괴로움을 찾아 묻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업을 권면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서쪽 오랑캐가 큰 개를 바치자 군석(君奭)208) 이 글을 지어 무왕(武王)을 경계하였다. 이번에 연신(筵臣)들이, 「이상한 물건을 물리치고 검소한 덕을 밝히라.」고 누누이 진달(陣達)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그 주청을 옳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은서피(銀鼠皮)로 만든 어구(御裘)를 내려 주니,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라.’ 하였다.
연신(筵臣)들에게 말하기를, ‘조송(趙宋)209) 은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웠지만 그래도 장리(贓吏)를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장법(贓法)이 엄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그 해독을 입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마씨(司馬氏)는 문지(門地)210) 를 앞세우고 재예(才藝)를 뒷전으로 하였으니, 실로 인재를 선택하는 방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도 또한 그러하여 전적으로 문벌(門閥)로 사람을 뽑으니, 이 때문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잃는 한탄이 있다.’ 하였다.
또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공자(孔子)·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朱子)는 모두 이름을 휘(諱)하면서 유독 증자(曾子)에 대해서는 이름을 휘하지 않으니, 옳은 일이겠는가? 모두 휘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날 태종조(太宗朝)에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壁) 위에 그려 놓을 것을 명하였고, 성종(成宗)은 역대(歷代)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병장(屛障)에 그리도록 명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 저녁으로 관람(觀覽)하여 권선 징악에 대비(對備)하려고 하였던 것이니, 어찌 자손이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선(善)으로 제요(帝堯)가 어진이를 신임하여 선치를 도모한 것과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211) 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212) 과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213) 과, 중종(中宗)214) 이 덕으로 상상(祥桑)을 없앤 것215) 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216) 과,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217) 과, 선왕(宣王)이 간언(諫言)에 감동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을 뽑아서 8폭(八幅) 병풍을 모사(摹寫)해서 만들고, 또 경계할 만한 악(惡)으로 태강(太康)이 사냥하며 즐기다가 덕망을 잃은 것과,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시리(市里)에 미행(微行)한 것과, 애제(哀帝)가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어진이를 죽인 것과, 영제(靈帝)가 서저(西邸)에서 관직을 판매한 것과,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양거(羊車)를 타고 잔치에서 노닌 것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물을 긁어모아 사치한 것과, 의종(懿宗)이 성내어 간하는 신하를 유배시킨 것과,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간적(奸賊)을 임용(任用)한 것 등을 뽑아서 또한 8폭 병풍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놓아 두고 성찰(省察)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주문(主文)의 신하에게 각각 율시(律詩)를 지어 병풍 머리에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하(夏)나라 우왕(禹王) 시절에는 백성들이 호호(皡皡)218) 하였는데도 오히려 당우(唐虞)만 못하다고 깊이 스스로 각박하게 꾸짖었으며, 심지어 수레에서 내려와 죄인을 보고 울기까지 하였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일찍이 세 번 반복하여 흠탄(欽歎)해 마지않았다. 지금 세속(世俗)은 타락하고 백성의 습속은 퇴패한 나머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전연 알지 못하고, 인륜에 어긋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날로 달로 붙어나고 있는데, 호서(湖西)에서 또 자식을 살해하는 변고가 생길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아!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사랑하니, 이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떳떳한 성품이다. 저들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본래의 성품을 잃어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차마 못할 짓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유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보잘것없는 나 소자(小子)가 일찍이 덕(德)과 예(禮)로 인도할 줄 알지 못하고, 단지 법제(法制)와 형벌(刑罰)만으로 그들이 죄를 멀리하기를 구차하게 기대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가볍게 법을 범(犯)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날로 강상(綱常)은 무너져서 나라는 뒤따라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과매(寡昧)가 스스로 책망하고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가 어찌 다만 대우(大禹)가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그러나 조종(祖宗)의 깊은 사랑과 큰 은택이 사람들의 살갗에 젖어 있음을 생각하건대, 무릇 우리 백성들이 누가 흥기하고 감동하지 않겠는가? 아! 너희들 크고 작은 백성들은 나의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이 오로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음을 체념하고, 착한 마음을 감발(感發)시켜 각자 격려하며 나의 교유(敎諭)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올해 회양(懷襄)219) 의 참혹함은 옛적에 없던 일이다. 여러 도(道)에서 엄사(渰死)220) 한 사람이 거의 6백 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무엇이 이보다 놀랍고 비참하랴? 비록 관례대로 휼전(恤典)의 명을 내리긴 하였으나 별도로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은 사람들 중에 신역(身役)을 다 바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눈이 내린 뒤 추위가 기승을 떠는데, 저들 궁성 밖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졸(軍卒)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견뎌내는지 염려스럽다. 입직(入直)한 군사는 대내(大內)에서 이미 술과 음식을 대접했으나, 안과 밖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자시(內資侍)로 하여금 더운 술을 대접하게 하고, 사재감(司宰監)으로 하여금 마른 안주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계유년221) 에 목릉(穆陵)에 거둥하여 그 길로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수찰(手札)로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읍(圻邑)의 춘수미(春收米)를 가을까지 기다려 물려 받도록 하고, 양주(楊州)의 정묘년222) 조의 환상(還上) 중에서 거두지 못한 것은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또 진휼청(賑恤廳)에 호(戶)마다 소미(小米)223) 한 말씩을 주라고 명하고,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리(藥理)를 아는 사람을 골라 보내 호서(湖西) 지방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료(救療)하도록 명하였다.
후릉(厚陵)에 전알한 다음 송도(松都)에 주필(駐蹕)하고 관원을 보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능(陵)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서원(書院)에도 모두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경덕궁(敬德宮)224) 의 목청전(穆淸殿)에 비(碑)를 세웠다. 만월대(滿月臺)에 친림(親臨)하여 문과와 무과를 베풀고, 겸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라고 명하고,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과 각 아문(衙門)에서 칙수(勅需)로 빚낸 것들을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의 쌀 1천 석을 내어 지나온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고도(故都)에 친림(親臨)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것이다. 이에 어제시(御製詩) 세 수를 내리니, 세종조(世宗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입시(入侍)한 우상(右相)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되, 전말(顚末)을 갖추어 싣고 판(板)에 새겨서 남문(南門)의 문루(門樓)에 걸게 하라.’ 하였다.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축조하였다.
갑술년225) 에 헌릉(獻陵)을 전알(展謁)하고, 승지에게 부로(父老)들을 불러모아 민간(民間)의 고통(苦痛)을 물어보라고 명하였다. 경신년226) ·신유년227) 두 해의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였다. 이때 간사한 소인들이 멋대로 정권을 농락하여 흉도(凶徒)들을 유혹하고 위협해서 무옥(誣獄)을 일으켰다. 밤낮 단련(鍛鍊)228) 하여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화(禍)가 호흡지간에 닥쳤는데, 왕이 그 간사한 정상을 살피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주모(主謀)한 대신 민암(閔黯)과 국문(鞫問)에 참여한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을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했다. 그리고 드디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의징(李義徵)의 병부(兵符)를 빼앗아 신여철(申汝哲)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기사년229) 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절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곤픽(悃愊)230) 을 살피지 못하고 어진 보필을 잘못 의심하여, 급기야 은례(恩禮)가 쇠하고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깊은 밤중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궁구하던 끝에 환히 깨닫고 크게 후회하면서 자나깨나 고민해 온 지 어언 몇 년이 되었다. 이번에 윤음(綸音)을 환발(渙發)231) 하여 곤위(壼位)를 다시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회복하고 종사(宗社)의 은밀한 도움에 힘입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6월 1일에 다시 중궁(中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하였다. 고묘(告廟)하고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회태(回泰)232) 하여 중곤(中壼)이 복위(復位)되었으니,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고 이어 희빈(禧嬪)이란 구작(舊爵)을 내려 세자(世子)에게 정성(定省)233) 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으니 무슨 말을 숨기겠는가? 아! 증자(曾子) 어머니의 어짊으로도 투저(投杼)234) 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옛부터 처리하기 어려운 바로서 부자(父子)의 사이만큼 어려운 것이 없고, 쉽사리 감동(感動)하는 바도 또한 부자의 사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었다. 애당초 세자를 세우던 날 유위한(柳緯漢)의 상소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또 「질병이 있어야 비로소 책봉(冊封)한다.」는 등의 설이 있었다. 내가 전대의 역사에 대해 대략 이미 열람(閱覽)했으므로, 틈을 엿보아 공동(恐動)하는 수단이 언제나 이러한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의 병통이 항상 거칠고 사나운 데 있었으니, 지난날 처분(處分)이 정도에 지나쳤던 것도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조용하고 한가할 때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 세자를 세운 것은 종사(宗社)의 큰 계획이고, 오늘날의 신하들은 대대로 녹(祿)을 받는 구신(舊臣)이니, 만약 패리(悖理)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유위한의 흉계(凶計)는 실현된 것이 아니며 여러 신하들의 본심은 드러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항상 후회한 것은 신명(神明)도 아는 바이다. 또 가만히 저들 무리의 짓거리를 살펴본다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무시(無視)하며 도리에 반대되고 윤리를 거역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결코 함께 나라일을 처리할 수 없다. 이제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들이 군부(君父)를 기만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 한 계획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때를 당해 만약 전도(顚倒)될 것을 염려하고 확청(廓淸)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실을 알면서도 과실을 고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지난일을 경계하고 뒷일을 삼갈 방도는 바로 마땅히 사의(私意)를 아주 끊고 의심과 막힘을 통렬히 제거하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보여 불휘(不諱)235) 의 문을 개방하고 충직(忠直)한 의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신(維新)하여 태평(太平)을 이루기를 기약하는 것이 국가의 복(福)이다. 아! 그대 군공(群工)들은 공경히 들으라.’ 하였다. 또 기사년236) 에 죽음으로 간(諫)한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고, 뒤에 강가에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화란을 선동하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뒤 또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제도로 만들어 빈어(嬪御)는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복향(復享)하였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들이 두 현신(賢臣)을 복향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므로, 그 일을 예조(禮曹)에 내리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두 현신의 도학(道學)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처음에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리들에게 속고 가려져 출향(黜享)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항상 뉘우치고 한스럽게 여겨 왔다.’ 하고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박세채(朴世采)의 건의로 인해 ‘대고(大誥)237) 에 의거하여 교문(敎文)을 짓고 붕당(朋黨)을 타파(打破)하라.’는 뜻으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이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장령(掌令) 김호(金灝)가 속히 동원(東垣)의 누각(樓閣)을 허물 것을 상소로 청했는데, 이것은 바로 반궁(泮宮)에 행차할 때 대내(大內)에서 올라가 관첨(觀瞻)하는 곳이다.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고비(皐比)238) 를 하사해 포상하였다.
을해년239) 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을 전배(展拜)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묘(私廟)를 전배하니 감창(感愴)이 어찌 한이 있으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그 장자(長子)에게는 벼슬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악무목(岳武穆)240) 의 일에 이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영유현(永柔縣)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여 백대(百代)의 풍성(風聲)을 수립(樹立)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남교(南郊)에 나아가 비를 빌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어공(御供)을 줄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였으며, 8도(八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주진(賙賑)에 힘을 쏟아 민간에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또 내수사(內需司)의 쌀·포(布)·녹비(鹿皮)·단목(丹木)·백반(白礬) 및 은자(銀子) 1천 냥을 진휼청(賑恤廳)에 내려 주었다. 함흥(咸興)에 이른바 본궁(本宮)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태조(太祖)의 잠저(潛邸)로서 익조(翼祖) 이하 네 분 대왕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영흥(永興)도 또한 그러했으니, 대개 한(漢)나라원묘(原廟)241)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부(追祔)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두 궁(宮)에는 미처 다 봉안하지 못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의 진백(陳白)에 의하여 즉시 거행하라고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려보냈다. 그리고 본관(本官) 본전(本殿)의 참봉(參奉)을 제관(祭官)으로 차정(差定)하고, 별감(別監) 차지(次知)가 제사지내던 관례를 폐지시켰다.
병자년242) 에 8도(八道)의 감사(監司)에게 하교하기를, ‘금년은 바로 병자년이다. 지나간 해를 돌이켜 보고 우리 백성들의 일을 생각해 볼 때 더 심함이 있다. 창과 칼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때일지라도 오히려 재난을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8도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므로,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감사와 수령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각별히 주진(賙賑)을 더하도록 하라. 만약 재리(財利)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죽음을 서서 구경만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노륙(孥戮)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도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체포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먼저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여 안정시키고 모이게 하라. 그리고 또 농사는 천하(天下)의 근본이니,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백성들의 축말(逐末)243) 을 금하고, 힘들여 논밭을 가꾸도록 하여 가을에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곡제(祈穀祭)를 거행하였다.
요적(妖賊) 이홍발(李弘渤)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여, 세자(世子) 외가(外家)의 묘소(墓所)에 흉예(凶穢)한 물건을 묻어 두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여철(申汝哲)의 집안 종의 호패(號牌)를 훔쳐다가 그 곁에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는 묘지기로 하여금 주워 오게 한 뒤 급히 강오장(姜五章)을 사주해 장주(章奏)를 올려 고하게 하였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구문(究問)할 것을 명하자 단서가 약간 드러났는데, 채 구핵(鉤覈)하지 않아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과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참국(參鞫)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진달(陣達)하자 모두 석방하여 보냈다. 삼사(三司)에서 극력 간쟁하니,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명하여 이에 죄인이 밝혀지고 여러 역적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창릉(昌陵)을 전알하고 이어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묘소에 나아갔다. 지나는 길에 인조(仁祖) 잠저(潛邸) 때의 별서(別墅)에 들러 비각(碑閣)을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둘 것을 명하였다. 영희전(永禧殿)에 전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따라갔다. 태묘(太廟)를 전알하였는데, 고례(古禮)를 처음으로 시행하여 중궁(中宮)과 세자빈(世子嬪)이 수행해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다.
강도(江都)의 수령(守令)이 진소(陳疏)하기를, ‘내년 1월 22일은 바로 청(淸)나라 사람이 성(城)을 함락시킨 날입니다.’ 하니,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내리고, 성 밖에다 땅을 다듬어 제단(祭壇)을 설치해 나라를 위해 죽은 이와 전쟁에 죽은 사민(士民)에게도 모두 제사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정축년244) 에 왕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한(漢)나라 때는 고을을 제일 잘 다스리는 사람이면 관질(官秩)을 승진시켜 탁용(擢用)하였다. 우리 나라의 순리(循吏)를 장려하여 등용하는 방도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간혹 진휼(賑恤)을 잘하여 초자(超資)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옛날과 같지는 않다. 경(卿)은 부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유의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도신(道臣)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선유(宣諭)하기를, ‘부디 밤낮으로 강구(講究)하고 형편에 따라 일을 하되, 만약 변통(變通)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즉시 치주(馳奏)하도록 하라. 서토(西土)245) 와 북관(北關)246) 의 기근(饑饉)이 예사롭지 않은데, 혹 죄가 특별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도 묻어 두거나, 자신이 지극한 원한을 품고 있는데도 풀지 못하는 일이 있어 그런 것인가? 각별히 찾고 물을 것이며, 아울러 백성의 고통과 함께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봄을 맞이하여 권농(勸農)하는 것」은 《예기(禮記)》에 기록되었고, 「근본에 힘쓰고 백성들이 축말(逐末)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한사(漢史)》에 실려 있다. 지금 8도(八道)에 거듭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춘궁(春窮)의 진대(振貸)를 진실로 그만둘 수 없겠지만, 권농이 가장 시급한 일이 된다.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권농하는 것이 부지런한가 아니한가를 가지고 전최(殿最)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하늘이 상란(喪亂)을 내리시어 기근(饑饉)이 거듭 닥쳤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길바닥에서 굶어죽는 자가 즐비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에 참담한지라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아! 이번에 아비가 자식을 죽인 일이 생겼으니 윤상(倫常)이 무너졌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었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백성이 용과 뱀으로 변하여 곳곳에서 무리를 불러모으니, 이것이 어찌 본래의 성품이 악(惡)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내가 감싸주고 보호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한탄하며 임금 노릇이 즐겁지 않다. 지금 온 땅이 시뻘겋게 타들어 가고 많은 백성들이 훌쩍이며 울고 있다. 상림(桑林)에서 대신 희생(犧牲)이 되고 스스로 몸을 불사르려는 정성이 간절하지만,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하늘을 바라보면 어슴푸레할 뿐이니, 오늘날 나라일은 정신이 없는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임진년247) 에 나라가 어지러워진 나머지 굶어죽은 시체가 날마다 쌓여만 가니, 선조(宣祖)께서, 「그들보다 먼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교까지 하셨는데, 지금 소자(小子)의 심정이 바로 선조의 그 당시의 심정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공경하고 조심할 것이니, 정부(政府)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도록 하라. 아! 오늘날 조정의 의논은 분열이 극도에 달하였다. 각자가 문호(門戶)를 세우고 경알(傾軋)이 습성을 이루어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을 들으면 마치 기화(奇貨)나 얻은 듯 가지와 마디가 거듭 생겨나고, 반복해서 고질(痼疾)이 되어 화해를 기약할 수가 없다. 심복(心腹)이 먼저 무너지고서 그 나라가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성스럽게 계회(戒誨)하면서도 한결같이 느슨하여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긴다면 이것이 무슨 도리(道理)이겠는가? 《주역(周易)》의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겹겹이 둘러싸인 토굴 속에 포로가 있다. 그 마음이 성실하고 행실도 가상하다.」 하였다. 이와 같이 험난하고 어려운 날 그 마음이 성실하지 않은데, 오히려 어찌 고난을 벗어나 형통함을 이루기를 바라겠는가?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나의 훈계를 분명히 듣고 너희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가져 「한발의 재난을 우연한 것이다.」, 「당론(黨論)은 타파(打破)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삼가 공경히 받들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단으로부터 환궁(還宮)할 때 금오(金吾)의 앞길에 연(輦)을 멈추고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죄수들이 어가의 앞에 나와 엎드리니, 왕이 그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형상을 보고 가엾이 여기며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그 애초에야 무엇이 달랐겠느냐? 그런데도 지금 저들은 다 귀신 꼴이 되었으니, 참혹하도다. 하(夏)의 우왕(禹王)이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진정 그러했겠구나!’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 계사년248) ·갑오년249) 두 해의 흉년 때 어공미(御供米)를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셨다. 지금도 또한 참작해 어공미를 덜어내어 율도(栗島)의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물자에 보태게 하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관서(關西)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무지개의 변괴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고, 제사를 내렸다.
무인년250) 에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 주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도(道)에 선유(宣諭)하여 진대(振貸)하고 권농(勸農)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가(國家)가 불행하여 동인(東人)·서인(西人)을 표방(標榜)한 이래 백 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痼疾)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門閥)을 숭상하여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 근원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실은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로 위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하여 이렇게 된 것이므로, 내가 나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바야흐로 따스한 봄이 돌아와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니, 시절과 함께 모두 새로워질 때가 어찌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그대들 여러 신하들은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 하던 것처럼 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다스려 나갈 계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는 백성의 부모가 되는 것이니, 백성들의 굶주림은 자신의 굶주림과 같다. 더구나 지금 굶어죽은 사람이 날마다 저자 거리에 쌓여가는데도 구원하지 못하니, 어찌 가슴 아픔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휼(濟恤)을 더하게 하고, 다시 여러 관청에 신칙(申飭)해 착실히 시신(屍身)을 묻어주어 나의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서(湖西)에 보냈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행차하여 문과·무과를 시험하여 뽑았으며, 대신(大臣)을 보내어 여단(癘壇)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단종(端宗)을 추복(追復)하여 제주(題主)251) 할 때 왕이 장차 친림(親臨)하려고 하니,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가 전염병이 극심하다며 친히 거둥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왕이 특별히 그를 파직시키고, 정원(政院)의 복역(覆逆)에 답하기를, ‘나의 소신(所信)이 사리에 통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무식한 말이 논사(論思)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경계하고 꾸짖는 조처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답하기를, ‘옛 사람 중에 전염병이 아주 극성을 떨어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도 혼자 남아서 떠나지 않은 사람252) 이 있었다. 부로(父老)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능히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주는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국가(國家)의 막대 막중한 의례(儀禮)에 당면하여 전염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에,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개 필부(匹夫)의 소신보다도 못한 것이다. 조상우는 도리어 아녀자나 하는 짓을 본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리에 통한 군자(君子)가 조용히 살펴본다면 반드시 나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53) 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고, 죽을 뻔하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전에 없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다. 서쪽 변방에서 시작하여 8도(八道)에 두루 번져, 마을에는 온전한 집이 없고 백 명에 한 명도 치료되지 못했다. 살아남는 백성이 없다면, 나라는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근심스럽고 조급하여 먹어도 쉬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으나, 신(神)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신령한 감응은 더욱 까마득하기만 하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 난로(鑾輅)254) 를 타고 봄을 맞이하니, 화창한 기운이 애연(藹然)하여 초목과 곤충이 모두 우로(雨露)의 은택에 휩싸여 있는데, 온 동토(東土)의 억만(億萬) 백성들은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져 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안으로는 경조(京兆)와 밖으로 도(道)를 다스리는 신하들은 각별히 칙유(勅諭)를 더하여 약품을 공급해 구료(救療)하고 시신(屍身)을 거두어 묻어주도록 하라.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민망하고 측은히 여김을 보여주어 조금이나마 번민하고 원통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문종조(文宗朝)의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단종(端宗)의 상복(喪服)을 입고, 제수(除授)하는 명령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충의(忠義)가 육신(六臣)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특별히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시습(金時習)의 절의(節義)는 지금의 백의(伯夷)입니다.’ 하니, 즉시 증직(贈職)하고 제사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집에 임하여 문병(問病)하고, 초상(初喪)이 나자 곡림(哭臨)하였다. 김응하(金應河)와 이순신(李舜臣)의 자손으로 입조(立朝)한 자를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고, 그 제사를 폐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버지 권전(權專)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경진년255) 에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才)하고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겨울에 천둥이 친 변괴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二品)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각자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게 하였다. 여러 도(道)의 처음부터 파종(播種)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대동미(大同米)를 감하여 주었고, 양서(兩西) 지방의 대동미가 없는 곳에는 대동법(大同法)의 관례대로 재량해 감면해 주었다. 계성묘(啓聖廟)를 명륜당(明倫堂)의 곁에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사년256) 이제묘(夷齊廟)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렸는데 ‘청성(淸聖)’이라 하였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특별히 어필(御筆)로 사액(賜額)하여 오로지 천년 뒤 존경심을 일으키는 뜻을 표현한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하교하기를, ‘옛적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초옥(楚獄)에 함부로 처리된 것이 많다 하여 밤에 일어나 방황하다가 친히 낙양(洛陽)의 감옥에 나아가 판결해 내보낸 것이 많았다.257) 지금 금오(金吾)에 시수(時囚)258) 가 매우 많으니, 막히고 답답한 기운이 어찌 위로 하늘의 조화를 범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비상한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연(輦)을 타고 금오를 지나며 친히 가서 녹수(錄囚)259)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여 구언(求言)하였으니,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줄였다.
8월 14일에 왕비(王妃)가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현(仁顯), 능호(陵號)를 명릉(明陵), 전호(殿號)를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대신(臺臣)이 약(藥)을 의논한 여러 의관(醫官)들을 죄줄 것을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다.」 하였다. 사람의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존귀함이겠는가? 지금 전적으로 여러 의관들만 책망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는가? 옛적에 당(唐)의 의종(懿宗)은 공주(公主)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의인(醫人)을 죽였고, 황명(皇明)의 마황후(馬皇后)는 붕어(崩御)할 적에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일러 경계하였으니,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내가 일찍이 이것을 내전(內殿)에게 말했더니 나의 말에 깊이 감복(感服)하였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친히 무고옥(巫蠱獄)을 국문(鞫問)하여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되었다. 역종(逆宗)260) 이항(李杭)이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정상이 이미 갖추어지니, 특별히 경전(磬甸)하라 명하고 또 거두어 장사지내 주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내가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해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즐거이 하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아아! 세자의 정사(情事)를 내가 어찌 염려하지 않겠으며, 여러 신하들의 춘궁(春宮)을 위한 간곡한 정성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처분을 버리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에 나의 뜻으로 좌우(左右)에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임오년261)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10월 3일에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계미년262) 에 하교(下敎)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해내(海內)가 편안한 때에도 언제나 조령(詔令)을 내려 곧 백성들을 진념(軫念)하였다. 더욱이 지금은 8도(八道)의 민생(民生)이 이제 막 굶주림과 전염병을 겪어 채 소생하지 못하였는데, 신역(身役)이 침노하여 지치게 만들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되어 만물이 자라는데, 불쌍한 우리 죄없는 백성들만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흉년에는 권농(勸農)에 더욱 마땅히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유사(攸司)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혹시라도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라. 이어서 생각건대, 임금은 백성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니, 자식에게 고질병이 있다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이 어찌 서서 그 죽음을 바라보기만 하고 급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생민(生民)의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단지 시간을 미루어대는 것만 일삼아서 물불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이번 새봄부터 부디 조속히 변통(變通)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미리 대비하면 근심이 없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이다. 요즈음 보건대,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 도성(都城)이 지척(咫尺)인 곳에서 범이 마구 나다니니, 범은 전쟁의 형상이다. 그 병졸(兵卒)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빨리 불우(不虞)의 일에 대비를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전송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나아갔다.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무안왕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을 평소 깊이 사모하였는데, 칙사를 전송한 뒤 유묘(遺廟)가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지금 와서 우러러 읍(揖)하니, 드넓은 심회(心懷)가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263) 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차출(差出)하고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관장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급히 할 만한 것은 급히 하고, 늦게 할 것은 늦게 하여 완급(緩急)에 각기 차례가 있게 하라. 일을 혹시 너무 급히 하면 폐단(弊端)이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생각을 두고 게을리하지 않으며 점차 다스려 나간다면 저절로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64)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와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1만 1천여 구(口)의 도고(逃故) 공포(貢布)를 탕척(蕩滌)해 주었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갑신년265)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였다. 그리고 이정청(釐正廳)의 여러 신하들에게 신칙(申勅)하여 지난날처럼 대충대충하지 말게 하였다. 해마다 2월에 바치는 궐내(闕內)의 뜰에 까는 솔잎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고자 하였으나, 논의(論議)가 서로 달라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염희(恬憘)266) 하며 세월만 보내니, 진실로 매우 답답하다. 그러니, 대계(大計)를 빨리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도성(都城)을 잘 보수하면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고 인민(人民)이 여기에 있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그 부모와 처자(妻子)를 위해 반드시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할 것이요, 또 적에게 제 무기를 빌려줄 근심도 없을 것이니, 계획을 정하여 수축(修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은 모두 바로 보장(保障)의 땅이니 끝내 버릴 수 없다. 남한 산성의 경우 연이어 수선(修繕)하였고, 강도의 경우 토성(土城)을 쌓은 것은 뜻한 바 있는데, 올해 겨우 쌓아놓으면 내년에 즉시 무너져 공력(功力)을 잇기가 어려우니, 내성(內城)을 견고하게 쌓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사은사(謝恩使)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와서 해적(海賊) 장비호(張飛虎)의 일을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고사(古事)로 보건대, 먼저 연호(年號)를 세운 자는 그 형세가 장구(長久)하지 못했다. 이 해적이 먼저 연호를 세웠으니, 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태묘(太廟)에 나아가 비를 빌었는데, 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으며,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고, 술을 금하였다. 친히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기묘년267)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 1백 87동(同)과 쌀 2천 5백여 석(石), 돈 1천 5백여 관(貫)을 탕척(蕩滌)해 주었다. 수재(守宰)로서 장법(贓法)을 범한 무리는 양전(兩銓)에 기록해 보내 외직(外職)에 제수(除授)하지 말게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신(近臣)을 한강(漢江)과 저자도(楮子島)에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을유년268) 봄에 큰 눈이 왔다. 하교하기를, ‘옛부터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사(人事)의 과실에 연유한 것인데, 하늘에 인애(仁愛)하는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재앙을 만나고도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면 화란(禍亂)이 뒤따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바로 늦은 봄철에 양기(陽氣)가 피어올라 온갖 초목이 죄다 싹을 튀우는데, 큰 눈이 며칠 동안 계속 내려 날이 춥고 쌀쌀하다. 봄 날씨가 겨울 날씨 같으니, 그 응험이 아름답지 못하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봄철의 얼음을 밟고 건너는 듯하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수성(修省)하기에 겨를이 없지만, 다만 생각건대, 지금의 간절하고 급박한 근심은 조정의 의논이 분열된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전후(前後)에 걸쳐 칙려(勅勵)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누적되어 온 고질적인 병폐는 구료(救療)하기 쉽지 않으므로, 내가 몹시 답답하게 여긴다. 상하가 뇌동(雷同)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니, 이것을 군신(群臣)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일을 의논할 때 각자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가부(可否)를 서로 도와 경알(傾軋)하는 습성을 통절히 버린다면, 조정(朝廷)이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힘써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는 데 힘을 다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경녕전(敬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병술년269)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북관(北關)과 영동(嶺東)에 나누어 보내고 영동의 아홉 군(郡)의 대동포(大同布)를 특별히 감해 주었다. 한성부(漢城府)에 명해 전후(前後)의 굶어죽은 사람 가운데 땅에 드러난 해골(骸骨)을 묻어주게 하였다.
8월에 왕이 법전(法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무관(武官)이 해가 지도록 모시고 잔치하였다. 지난해에 군신(群臣)들이 왕이 즉위(即位)한 지 30년이 되었다며 휘호(徽號)를 올리고, 진연(進宴)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겸읍(謙揖)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장보(章輔)들이 상소(上疏)하여 청하였으나, 심지어 언지(言志)의 글을 내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이은 지 이제 29년이다. 그동안 해마다 연이어 농사에 병이 들어 백성들이 죽마저 제대로 못 먹었다. 나라일이 매우 위급하고 천재(天災)가 날이 갈수록 또 더욱 심해지니, 칭경(稱慶)이란 말은 꺼내지 말고, 다만 스스로 밤낮으로 조심하라.’ 하였다. 세자가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진청(陳請)하였으나,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大臣)이 누차 청하여 마지 않으니, 단지 진하와 진연만 허락하되, 힘써 간약(簡約)함을 따라 외연(外宴)에는 여악(女樂)을 쓰지 말게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날짜를 잡아놓고 미처 행하지 아니하였는데, 풍재(風災)로 인해 특별히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예(禮)를 거행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진연이 내가 어찌 즐겨 하겠는가? 춘궁(春宮)의 세 번에 걸친 상소와 공경(公卿)의 간청을 끝내 굳이 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예대(豫大)에 가까우니, 단지 부끄럽고 두려움만 더할 뿐이다. 연례(宴禮)를 이미 지냈으니, 마땅히 추은(推恩)의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족(士族) 80세 이상과 상한(常漢) 90세 이상에게 가자(加資)하고, 부녀(婦女)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 기로(耆老)의 여러 신하 중 2품 이상에게는 별도로 의자(衣資)와 쌀·고기를 하사하고, 3품 이하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무인년270)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고, 도하(都下)의 상한(常漢) 중 기로(耆老)로서 80세 이상인 사람 수백 명을 널찍한 곳에 모아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악(聲樂)을 갖추어 술과 고기를 대접하게 하였다.
정해년271) 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고 이어 문신(文臣)을 정시(庭試)하였다. 그때 마진(麻疹)272) 이 기승을 떨어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일찍이 무진년273) ·기사년274) 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죽은 경우에 대해 휼전(恤典)을 거행한 일이 있었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 의지할 데 없는 무리는 이번에도 또한 뽑아 내어 휼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제사를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일찍이 내가 한때의 희로(喜怒)로 인해 법을 받드는 아전을 함부로 죽였는데, 참회(懺悔)해도 소용이 없다. 그가 비록 미천했지만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고, 받들던 바가 법(法)이었는데, 변수(駢首)275) 하여 운명(殞命)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가엾이 여긴다. 그의 처자에게 미포(米布)를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중외(中外)의 관리들에게 감히 희로로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계칙(戒飭)하였다.
강연(講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정(鄭)의 양소(良霄)가 집에 굴(窟)을 파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는 그 몸을 망쳤으니276) , 술의 화(禍)는 옛부터 그러하였다. 「문왕(文王)이 소자(小子)277) 와 유정(有正)278) ·유사(有事)279) 에게 교훈하시기를, 항상 술을 마시지 말라고 교훈하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되 다만 제사 때만 마시니 덕(德)이 있어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비록 술을 마시더라도 이 옛 훈계를 생각하여 경계할 바를 안다면 어찌 술의 해(害)가 있겠는가? 관리의 직책이 있는 자가 모여서 술을 마시면 직무(職務)를 포기하고 심한 자는 부모가 금하여도 그치지 아니하여 몸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자년280) 에 왕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논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정청(釐正廳)의 경우를 보건대, 대저 변통(變通)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우니, 일의 이해(利害)를 반드시 확실하게 따져본 연후에야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날마다 개혁하여 성급하게 다스리기를 구한다면 이익은 없고 폐해만 또 더욱 심해질 것이니, 옛부터 잘 변통하지 못하고 번쇄(煩碎)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생민(生民)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렸으니, 수령은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적에 당(唐)의 선종(宣宗)은 이행언(李行言)의 이름을 대궐의 기둥에 써붙여 놓았다.281) 내가 일찍이 하나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이름을 대주첩(代柱帖)이라 하고, 별도로 포폄(褒貶)을 받은 수령(守令)을 기록하여 때때로 상고로 열람하였는데, 다만 빠진 자가 없지 않으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순전히 포상을 받은 수령만 골라서 뽑아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삼남(三南)에 전염병이 극심하게 번졌으므로 약물을 보내 구료(救療)하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하고,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통을 일찍이 스스로 점검하여 보니, 희로가 중도(中道)에 맞지 않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못하고, 시조(施措)가 정당함에서 어긋나고, 실혜(實惠)가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政府)에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어가(御駕)가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시(近侍)를 보내 쌍령(雙嶺)의 전사한 곳에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동(關東)의 인삼(人蔘)의 폐단을 말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늘 변통(變通)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옛적에 송(宋)의 인종(仁宗)은 밤에 구운 양고기가 생각이 나도 주림을 참고 먹지 않았는데282) , 하물며 그보다 더 큰 민폐(民弊)야 말해 무엇하랴?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재량하여 감해 주게 하라.’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로 인해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음우(陰雨)에 대비할 것을 신칙(申飭)하였다.
기축년283)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황일호(黃一皓)의 일은 온 세상에서 다만 그가 원통하게 죽은 줄로만 알고, 그가 사절(死節)한 줄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황윤(黃玧)의 상(喪) 때 성상께서 사절한 사람의 아들이라 하여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을 제급(題給)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성감(聖鑑)이 보통 사람의 소견보다 아주 탁월하십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일이 존주(尊周)에 관계되었는데 끝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특별히 증직(贈職)·증시(贈諡)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기자(箕子)가 동방(東方)에 봉(封)해지자 8조(八條)의 가르침을 펼쳐 남겨진 교화가 수천 년 이래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근시(近侍)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별도로 수호(守護)를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平壤)을 수복(收復)한 뒤 선묘(宣廟)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후(前後) 승패(勝敗)의 다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먼저 온 북방(北方)의 여러 장수들은 오로지 오랑캐를 막는 전법(戰法)을 썼기 때문에 패배를 초래했고, 뒤에 온 장수들은 능히 척장군(戚將軍)284) 의 왜구를 막는 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승(全勝)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선묘께서 그 책을 구득(購得)하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연습하게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건대, 활법(活法)285) 이 없다. 상량(商量)하여 변통(變通)할 점이 없지 않으니, 병졸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활법을 강구(講究)하게 하라.’ 하였다.
경인년286)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기민(饑民)을 진휼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여러 달 위예(違豫)하다가 평복(平復)되니, 여러 신하들이 누차 칭경(稱慶)의 거행을 청하였다.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한참 뒤에야 억지로 따랐다.
4월 25일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올리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무관(武官)들이 모시고 벌여서서 차례로 헌수(獻壽)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문과·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강원도(江原道)의 양전(量田)을 마친 다음 영서(嶺西) 지방의 수미(收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연신(筵臣)이 혹 ‘인재(人才)가 아주 적다.’고 말하면, 왕이 말하기를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말세(末世)여서 인재가 없기 때문이겠는가? 옛부터 창업(創業)한 임금은 모두 승국(勝國)287) 의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에 이르렀으니, 어느 시대인들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알아보지 못함으로 인해 쓰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신묘년288)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왕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북한산(北漢山)에 성(城)을 쌓는 것의 편부(便否)를 진달하게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都城)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修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전에는 샘물을 염려했지만 지금 들으니 샘물도 또한 풍족하다고 한다.’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백성의 고통을 진념(軫念)하여 이제 막 변통(變通)하도록 하였는데, 한편 궐액(闕額)을 보충하고 한편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니, 결단코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로 차마 할 바가 아니다. 신묘년289) 이전의 군병(軍兵)과 노비(奴婢) 중 도망한 자들의 징포(徵布)를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진년290)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하고, 특별히 기전(畿甸)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춘수미(春收米)를 세 말씩 감해 주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나의 마음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 간절하지만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 극기(克己)의 공부가 철저하지 못한 바 있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한 바 있어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퇴폐와 타락의 근심은 더욱 심해지고, 실공(實功)에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위(虛僞)의 습관은 오히려 많아지니, 모두 나의 과실이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하늘을 공경히 섬기는 정성을 돈독(敦篤)하게 할 것이니, 마땅히 정부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경(六卿)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가 과연 능히 용사(用捨)를 공정하게 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한다면, 관사(官司)는 적임자를 얻고 조정은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방악(方岳)291) 의 신하가 출척 유명(黜陟幽明)292) 하는 것이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고, 절진(節鎭)의 장수가 항상 진루(陣壘)를 대한 것처럼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면, 조가(朝家)에서 위임한 중임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293) 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294) 만약 지극한 원한을 펴지 못한 자가 있으면 중외(中外)의 관원들은 상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옥사(獄事)를 판결하고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는 데 이르러서도 세력의 강약(强弱)을 보아 입락(立落)하지 말고, 한결같이 사실의 곡직(曲直)에 따라 처리한다면, 소민(小民)들이 거의 원통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근래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염우(廉隅)가 너무 승(勝)하여 벼슬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갈수록 심해진다. 옛날 임진년295) ·계사년296) 병란(兵亂) 뒤 잿더미만 눈에 가득한 날 사대부들이 감히 노고(勞苦)를 말하지 못하고 다 연곡(輦轂)297) 에 모여서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지금의 사대부들은 이와 다르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계사년298) 에 하교하여 권농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즉위(即位)한 지 40년이 되었으므로 종묘에 고(告)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반교(頒敎)·반사(頒赦)하였다. 대신(大臣)과 문무(文武)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사복(嗣服)하신 이래 성덕(聖德)과 홍업(洪業)으로서 마땅히 유양(揄揚)299) 하고 크게 칭찬해야 할 것을 참으로 일일이 손꼽아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에서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났고, 곤위(坤位)가 거듭 바로된 데서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였습니다. 신종(神宗)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추모하고, 효종(孝宗)의 「지통(至痛)하다.」는 하교(下敎)를 체념하여 단(壇)을 쌓아 향사(享祀)하자,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천명(闡明)되고 풍성(風聲)은 온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실로 지극한 덕(德)과 크나큰 공(功)이 있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이 우러러 존호(尊號)를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 끝내 받으셨습니다. 대개 어찌 옳지 못한데도 성조(聖祖)께서 구차스럽게 받으셨겠습니까? 신 등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또한 오직 성조께서 행하신 바를 따르는 데 있고, 감히 예대(豫大)의 설(說)을 만들어 성상(聖上)의 겸손을 지키시는 덕(德)에 누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비록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했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덕이 없는 내가 감히 바랄 바가 아니다. 결단코 윤허하여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이에 대신(大臣)이 누차 아뢰어 간청하고, 또 백료(百僚)를 거느리고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세자(世子)가 상소(上疏)하여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고, 두 왕자(王子)가 여러 종친(宗親)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청하니, 왕이 뒤에 마지못해 따랐다. 군신(群臣)이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라 올렸다.
하교하기를, ‘어약(御藥)에 쓰이는 생우황(生牛黃) 때문에 며칠 안에 수백 마리의 많은 소를 도살하였다. 비록 축물(畜物)이긴 하지만 마음에 측은하다. 도살을 5일까지 한하여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시험보였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금액(禁掖)300) 안에서 노래하고 떠드는 소리가 있으니, 정성(鄭聲)301) 의 훈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간신(諫臣)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한 일을 어찌 알았겠는가? 모여서 노래하고 떠든 자들을 조사해 내어 엄중히 징계하고, 구사(丘史)로서 궐정(闕庭)에 출입하는 자들을 모조리 엄금(嚴禁)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홍계적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남(湖南)에 보냈다. 하교하기를, ‘내탕(內帑)의 은자(銀子) 1천 냥을 호서(湖西)에, 8백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라. 그리고 강도(江都)의 쌀 1만 석(石)을 호남(湖南)에, 연해(沿海)의 곡식 1만 석을 제주(濟州)에 옮겨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기 때문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다.
갑오년302) 에 하교하기를, ‘진정(賑政)과 권농(勸農)을 바로 이때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질병(疾病)이 이와 같아서 친히 스스로 별도로 하유(下諭)할 수 없으니, 정원(政院)에서 문장의 문구(文句)를 만들어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유수(留守)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위예(違豫)한 가운데 있었는데, 약원(藥院)에서 물오리를 올리니, 왕이 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둥지를 엎지 않으며, 새끼와 알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옛 성인(聖人)이 생육(生育)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봄이 화창하여 만물(萬物)이 생육하는 때를 당해서 차마 상해(傷害)할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하는 데 절로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어찌 꼭 이것을 취해야 하겠는가? 다시는 들이지 말라.’ 하였다.
재차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차비문(差備門) 밖에 불러서 진정(賑政)과 백성의 고통을 상세히 물었다. 전염병이 극성을 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약물(藥物)을 내려 보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송조(宋朝)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소강철(邵康節)·주회암(朱晦庵) 등 여섯 현인(賢人)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고, 반교(頒敎)하였다. 9월 19일에 군신(群臣)들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을미년303)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빈청(賓廳)에서 회의(會議)하여 품지(稟旨)해서 체수(滯囚)를 재처(裁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도(珍島) 한 군(郡)에 10년 동안 흉년이 들어 남아 있는 백성들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다 하니, 해외(海外)의 피폐한 백성이 혹 원한을 품고 펴지 못한 나머지 위로 천화(天和)를 범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서 물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신년304)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양전(量田)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계(經界)가 바르지 않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한다.」 하였다. 반드시 8도(八道)에 풍년이 들어 한꺼번에 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기약이 없을 것이니, 이에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제주(濟州)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드러난 뼈를 가려 주고, 썩은 살을 묻어준다.」 하였으니, 대개 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미치는 것이다. 더구나 탐라(耽羅) 한 지역의 백성들이 전후로 굶어 죽은 자가 수천에 이른다 하니, 거두지 못해 들판에 뼈를 드러내 놓은 시신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나도 몰래 측은한 생각이 드니,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묻어주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가뭄이 들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훈칙(訓勅)하였다. 은자(銀子) 2천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주고 진자(賑資)에 보태 쓰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계복(啓覆)305) 을 행하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었다. 혹은 범죄(犯罪)가 지극히 중한데 법(法)을 집행하기 전에 경폐(徑斃)306) 하기도 하고, 혹은 정리로 보아 용서할 점이 있는데도 한결같이 판결이 지체되기도 하므로, 작년에 이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시행하고자 했지만, 나의 병 증세가 더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결단코 시행하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9월에 계복하여 그 계동(季冬)을 기다려 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유년307) 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에게 하교하여 권농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병으로 앓는 동안에도 오로지 생각은 모두 백성에게 있다. 이 말은 입에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심복(心服)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때 왕이 여러 해 위예(違豫)했는데, 눈병과 다리의 마비 등의 증상으로 가장 괴로와하였다. 그래서 장차 온천(溫泉)에 목욕하려고 호서(湖西)의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묻고 행재(行在)308) 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3월에 온천에 거둥하여 경기(京畿)·호남(湖南) 두 도(道)의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사족(士族)과 상한(常漢)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감사(監司)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물었다. 관원을 보내 송시열(宋時烈)·이귀(李貴)·김집(金集)·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의 묘소(墓所)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집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재차 유개(流丐)309) 를 갯가에 모아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환궁한 뒤 도신(道臣)에게 차원(差員)을 정해서 거처를 잃은 유개에게 계속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호서(湖西)의 병신년310)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근래에 궐내(闕內)에서 술을 파는 자가 있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형률을 상고하여 과죄(科罪)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사기(四紀)311) 에 직접 만기(萬機)를 관장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중신(中身)312) 을 지나자, 나쁜 병이 끊이지 않으니, 지난 을유년313) 에는 춘궁(春宮)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춘궁이 상소(上疏)하여 굳이 사양하고, 종친(宗親)·대신(大臣)·문무 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방민(坊民)의 기로(耆老)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다투어 간(諫)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명(成命)을 정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5년 동안 고질(痼疾)을 앓는 나머지 눈병이 더 심해졌다. 물건을 보면 더욱 어두워 수응(酬應)하기 점점 어려워지니, 나라일이 염려스럽다.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해 세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라.’ 하였다. 세자가 진장(陳章)하여 극력 사양하니, 답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고질을 앓은데다 눈병이 또 심하여 사무(事務)가 지체되니, 병으로 앓는 동안 걱정이 대단하였다. 너에게 명하여 노고(勞苦)를 대신하게 하니, 이것은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다. 네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아! 부탁(付託)하는 것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라. 공경과 게으름의 구분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에 나뉘어지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오로지 한 생각으로 시종 학문에 종사하라.」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재차 올린 상소에 답하기를, ‘어제 비지(批旨)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하고 조심스레 받들어서 다시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또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명백하여 백세(百世) 뒤라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흔들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하던 유현(儒賢)이라 하여 왕이 빈사(賓師)로 대접했는데, 그 문도(門徒) 윤증(尹拯)이 역적 윤휴(尹鑴)에게 빌붙어 오래 전부터 송시열에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찬술할 때 유양(揄揚)한 바가 그의 기대에 맞지 않자, 윤증은 이 일로 인해 유감을 품고 제 마음대로 고쳐서 물리쳤다. 또 송시열에게 보내는 의서(擬書)를 지어 죄상(罪狀)을 늘어놓으니, 이에 유림(儒林)은 분열되고, 조정의 의논은 마구 흩어져 반세(半世) 동안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데로 쏠렸다. 왕도 또한 그 일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일찍이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고 하교(下敎)하였는데, 병신년314) 에 이르러 묘문(墓文)과 의서(擬書)를 직접 얻어 읽어 보자 비로소 그 빙자하여 허구날조한 정상을 살피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설(說)을 일찍이 이미 하교하였으나, 한 번 의서와 묘문을 상세히 본 뒤로 내가 깊이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시비(是非)가 크게 정해졌으니,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나의 자손된 자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따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비지(批旨)에다 춘궁(春宮)을 교유(敎諭)하니, 반복된 정녕(丁寧)한 가르침이 일성(日星)처럼 밝게 걸려 만세(萬世)에 연익(燕翼)의 계획을 남겨주었다. 사륜(絲綸)이 한 번 전파되자 사림(士林)이 모두 펄쩍 뛰며 경하하였다. 왕이 또 손수 화양(華陽)·흥암(興巖) 두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인주(人主)가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사설(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조두(俎豆)하는 곳이고, 흥암은 곧 송준길(宋浚吉)을 조두하는 곳이다.
무술년315)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평안도(平安道)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강봉서(姜鳳瑞)의 격쟁(擊錚)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내가 평소 강씨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 하였다. 임창군(臨昌君)은 소현(昭顯)의 혈손(血孫)으로서 그 자손들의 번연(蕃衍)316) 함이 당(唐)의 분양(汾陽)317) 에 비길 만하니,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분명하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 그가 어진 재상이었던 것을 알았고,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昭顯)의 사당을 바라보고 그 신도(神道)의 외롭고 단출함에 서글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 건의 일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절구(絶句) 셋을 지었다. 작년에 수상(首相)이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일을 진달(陳達)했을 적에 마음에 망설이는 바가 있어서 능히 다 말하지 못하고 단지 관작의 회복만을 허락했는데, 대개 강석기가 화(禍)를 입었던 것은 단지 그 딸에게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옛적 을미년318) 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함을 남김없이 말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된 것이라서 감히 의논할 수가 없다.」고 하교하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침내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해 주셨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헌의(獻議)하는 여러 대신(大臣)들은 이 뜻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또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원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공의(公議)도 크게 같으니, 신리(伸理)의 은전(恩典)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하라.’ 하였다. 이에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그 묘소를 봉(封)하였다. 강석기와 김홍욱에게는 제사를 내리고 증직(贈職)하였으며,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고질이 되어 계복(啓覆)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으니, 집마다 옥사(獄事)의 판결이 지체되어 유사(瘦死)319) 할 뿐이다. 계복 역시 형인(刑人) 가운데 있으니, 변통(變通)의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辟)320) 으로 처단(處斷)할 즈음에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세자가 스스로 마땅히 면품(面稟)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형인(刑人)의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은 일체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성황단(城隍壇)과 여단(癘壇)에 제사를 내렸다.
기해년321) 에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향년(享年)이 일흔을 넘긴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인데,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은 없으나,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와 김육(金堉)이 찬(撰)한 서문(序文)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두 그 일을 기록하고 있고, 또 본소(本所) 서루(西樓)의 제명(題名)한 곳에 사롱(紗籠)322) 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청한 일은 이미 고사(故事)에 근거하고 있고, 왕세자(王世子)의 희구(喜懼)하는 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아 쉰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쉰을 넘었으니, 항상 「태조께서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으니, 나도 만약 그 나이가 되어 성조(聖祖)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거룩한 일이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세자(世子)가 이 일을 누차 청하니, 내가 그 희구하는 정을 생각하여 이에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에 기로소에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을 봉안(奉安)하였다.
4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술잔을 하사하였다. 또 음악을 내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기사(耆司)에서 잔치를 벌였다.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혹은 2, 3년 간격으로 혹은 4, 5년 간격으로 하는 것이 고례(故例)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해 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설행(設行)하지 못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명관(命官)으로 하여금 대신해 거행하여 위열(慰悅)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삼남(三南)에 균전사(均田使)를 나누어 보냈다. 연령군(延齡君)의 상차(喪次)에 친히 곡림(哭臨)하였다.
경자년323) 에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6월에 왕의 환후(患候)가 더욱 무거워지니, 세자가 재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사(宗社)·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8일 진시(辰時)에 왕이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군신(群臣)을 버리니, 춘추(春秋) 예순이었다. 이날 경성(京城)의 모예(旄倪)324) ·여대(輿儓)325) 들까지 궐하(闕下)에 달려나와 마치 부모처럼 곡(哭)하였고,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 바삐 달려와서 호읍(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궁(中宮)이 원상(院相)에게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평일의 거룩한 덕행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무(政務)에 수응(酬應)하시느라 누차 침식(寢食)을 폐하셨고, 하늘을 공경히 섬겨 재앙을 만나면 공구(恐懼)하셨다. 사시(四時)의 기후가 간혹 고르지 못하거나 우설(雨雪)의 절기가 만일 시기를 잃어 무릇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곧 근심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가 하는 것 등을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여시(女侍)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하셨다. 백성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근로하심이 시종 하루와 같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상된 나머지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게 된 것이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이르러서는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일찍이 조치한 바가 있었다. 모든 여러 가지 제기(祭器)는 이번에 내려 주는 은자(銀子)로 만들도록 하고, 또 이 3천 7백 금(金)은 대행 대왕께서 진휼의 자금으로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인데, 이제 지부(地部)에 내려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한다. 습렴(襲殮)의 의대(衣襨)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쓸 것이니, 만일 부족한 것이 있을 경우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써서 보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여 평일에 백성을 구휼하고 경비를 절약하던 지극한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습렴(襲殮)할 때는 대신(大臣)·예관(禮官)·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왕은 영명(英明)·특달(特達)·관홍(寬弘)·근검(勤儉)하였으며, 효성(孝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와 시선(視膳)할 때부터 기쁜 낯빛으로 모시는 도리를 다하였다. 사복(嗣服)하자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여 자의(慈懿)·명성(明聖) 두 동조(東朝)326) 를 받들어 섬겼는데, 새벽과 저녁으로 승환(承歡)하여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였다.
해마다 태묘(太廟)에 친히 향사(享祀)하고 봄·가을로 반드시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여러 능(陵)을 두루 참배했는데, 더러는 두세 차례에 걸쳐서 하기도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풍성한 공렬(功烈)이 드높고 빛났으며, 관덕(觀德)의 묘우(廟宇)와 숭보(崇報)의 의전(儀典)이 거의 모두 이룩되었는데도, 왕은 오히려 미진하게 여겼다. 효사(孝思)를 미루고 넓혀서 말하기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존주(尊周)의 의리이니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자수(字數)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여러 묘우의 예(禮)가 마땅히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렸고,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므로, 높여서 세실(世室)로 삼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선위(禪位)한 이후 수백 년 동안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열성(列聖)이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는데, 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서둘러 욕의(縟儀)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전례(典禮)가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인(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별도로 중종(中宗)의 신비(愼妃)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였다. 한가로이 보내는 여가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經傳)·사서(史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 우리 동방(東方)의 문집(文集)까지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을 열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도 자주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였으며, 글에 임하여서는 이치를 분석하여 견해가 분명하고 투철하였다. 일찍이 《심경(心經)》의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고 발동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주역(周易)》의 ‘납약(納約)’의 설을 논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때를 당해 마지못하여 이런 방도를 쓸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해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다. 대유괘(大有卦)의 구사효(九四孝)를 논하기를, ‘강하고 부드러움이 중도(中道)를 얻은 연후에야 밝혀 비추고 강건하여 결단할 수 있다. 만일 혹시라도 단지 부드럽기만 하고 엄(嚴)하지 않거나 단지 엄하기만 하고 부드럽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그 소유한 대중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육오효(六五爻)를 논하기를, ‘너무 부드러우면 인심(人心)이 해이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엄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중용(中庸)》에 이른바 「강함을 나타내고 꿋꿋하여야 고집함이 있기에 족하다.」는 것은 위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역대(歷代)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327) 하늘에 응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328) 군주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난 역사를 보니 실로 소인(小人)인 줄 알지 못하고서 쓴 사람도 본래부터 있었지만, 더러는 소인인 줄 알면서 쓴 사람도 또한 있었으니, 이는 대개 사의(私意)를 제거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주에게 신하가, 아비에게 아들이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부소(扶蘇)가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이것을 부소의 과실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악했을지라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다면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공(功)은 없을지라도 그렇게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은 세째 아들을 죽이고 자부(子婦)를 궁인(宮人)으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바르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임어(臨御)하신 지 46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하늘을 공경히 섬기려는 정성이 위로 하늘에 이르렀고 여상(如傷)329) 의 인덕(仁德)이 아래로 백성에게 미쳤다. 나라는 남북(南北)의 경보(警報)가 없어 경내(境內)가 편안했고 백성들은 하늘과 땅의 포용해 주는 은혜에 싸여 생업(生業)에 안락하였는데, 왕은 한(漢)·당(唐)의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정치를 비루하게 여긴 나머지 개연히 삼대(三代)의 융성(隆盛)에 뜻을 두어 조처와 사업(事業)이 수신(修身)·제가(齊家)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저(關雎)330) 와 인지(麟趾)331) 의 덕화(德化)가 이미 집안과 나라에 흡족하였고, 주관(周官)의 제도가 찬란히 다시 밝혀졌다.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열조(列祖)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큰 계획과 큰 사업은 후사(後嗣)의 한없는 복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주(神州)332) 가 육침(陸沈)333) 되고 일월(日月)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으나, 한 줄기의 의리(義理)가 좌해(左海)334) 의 지역에서 어둡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비풍(匪風)335) ·하천(下泉)336) ’의 원통함을 안고서 ‘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337) 를 남겼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장차 큰 일을 하시려 하여, ‘지극한 통한이 마음속에 있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귀신을 울릴 만하였다. 흉적(凶賊)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으려는 뜻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하늘이 계획을 기약할 수가 없어 궁검(弓劍)을 갑자기 버리니, 지사(志士)의 분통이 지금까지도 하루와 같다. 그러나 고금을 통해 멸할 수 없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해지자, 왕은 이것을 크게 두려워하며 분연히 한 몸으로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338) 이 거듭 돌아오는 날에 황도(皇都)가 함락된 일을 슬퍼하시어 금중(禁中)에 단(壇)을 설치하여 멀리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제사하였는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때에 출척(怵惕)339) ·참달(慘怛)340) 하여 참으로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친히 보는 듯이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임진년341) 에 재조(再造)한 은혜는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다.’며 궁성(宮城) 북쪽 정결한 곳에 단(壇)을 설치하고, ‘대보단(大報壇)’이라 명명(命名)하여 해마다 태뢰(太牢)로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으며, 친히 ‘지감시(志感詩)’와 서문(序文)까지 지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天下)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이 속히 망한 것은 반드시 동정(東征)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이미 복수(復讎)·설치(雪恥)를 하지 못하였고, 홍광(弘光)342) 이 남도(南渡)한 후에도 또한 막연히 그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늘 개탄하며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종 황제가 선조 대왕에게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여 지금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꺼내 펼쳐보면 처참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명(明)나라의 우리 나라에 대한 은혜가 한집안과 같은데도, 강약(强弱)의 형세에 구애되어 지금 저들을 복종해 섬기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제갈양(諸葛亮)의 일을 논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제갈양이 한(漢)나라를 회복(恢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바 아니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이다. 신종 황제의 생사 육골(生死肉骨)343) 의 은혜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병자년344) 부터 지금까지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심(人心)이 해이해져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한인(漢人)으로서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子孫)은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성화(成化)345) 무렵에 하사한 인적(印跡)을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얻자 왕이 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의 국보(國寶)를 쓰니, 마음이 아직까지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황조의 사본(賜本)은 전획(篆劃)이 어제 쓴 듯하니, 이것으로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이 인조(仁祖)·효종(孝宗) 양조(兩祖)의 뜻을 추념(追念)하여 일생 동안 사모(思慕)하면서 차마 잠시도 잊지 못한 나머지, 또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금보를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며 황조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만들려 한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애달파하는 뜻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단상(短喪)을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최복(衰服)을 입는 제도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수천 년 동안 예(禮)를 좋아하는 군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의 「오모(烏帽)·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에 따라서 이미 개정(改正) 하였으나 단령의(團領衣)·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못하여 고제(古制)에 미진한 바 있다.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으로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상(大喪)이 났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視事)할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착용하여 한 번에 천고(千古)의 오류를 깨끗이 씻고 영원히 후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더욱 왕의 고명(高明)하신 과단(果斷)으로서 삼대(三代)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어찌 한(漢)·당(唐) 무렵에 일컬어지는 명철(明哲)한 군주들이 비슷할 수가 있겠는가? 송유(宋儒)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가 요순(堯舜)보다 낫다는 것은 사공(事功)을 말한 것이다. 요순(堯舜)은 천하(天下)를 다스렸는데 부자가 또 그 도(道)를 미루어서 만세(萬世)에 전하였으니, 요순의 도가 부자를 얻지 않았다면 또한 어디에 근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상제(喪制)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나 삼대(三代)의 제도가 천 년 동안 폐지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시행하여 후세의 왕자(王者)로 하여금 의거하여 법(法)으로 취하게 하였으니, 이 일로 미루어 논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보다 낫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이라 하였으며, 이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 때 왕이 곡장(曲墻)을 치우치게 쌓지 말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복판에 자리잡도록 하여 장릉(長陵)의 우측(右側)을 비워 둔 제도를 모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백성의 힘을 재차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사위(嗣位)한 지 4년 만에 훙(薨)하니, 이 분이 경종 대왕(景宗大王)이다.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1남(男)을 탄생하니 바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이시다. 중궁 전하(中宮殿下)는 서씨(徐氏)로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 명빈(榠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을 낳았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경종(景宗)은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뒤에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다.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시며 하토(下土)를 보살펴 주시어 넓고 넓은 구주(九州)346) 가 오랑캐의 손아귀에 넘어간 지 백 년인데, 기자(箕子)의 봉강(封疆)한 구역만은 8조(八條)의 가르침이 쇠하지 않았다. 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347) 를 당하여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총명(聰明)·예지(睿智)한 자질을 내려주시고 강의(剛毅)·과단(果斷)의 용의(用意)로 도와주시어 왕으로 하여금 종욕(從欲)348) 의 정치(政治)를 성취하도록 하였다면, 장차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여 옛 선왕(先王)의 왕업(王業)에 앞지를 수 있었을 터인데, 선왕께서 반드시 얻어야 할 수(壽)를 내려주지 아니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대성(大成)의 지역에 오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아마 하늘도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이는 바로 천하(天下) 만세(萬世)의 무궁한 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극(皇極)의 바름을 세우고 인륜(人倫)의 어둠을 밝히니,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천지에 세워져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있는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은 장차 천만 세(千萬歲)에 이르도록 더욱 더욱 드러날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10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註 104]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 : 1661 현종 2년.
- [註 105]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106]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107]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108]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09]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110]
연상(練祥) : 소상(小祥).- [註 111]
조전(朝奠) : 장사에 앞서 이른 아침마다 영전(靈前)에 지내는 제사.- [註 11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13]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114]
반우(返虞) : 장사를 치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또는 그 절차.- [註 115]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116]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117]
정사년 : 1677 숙종 3년.- [註 118]
혜패(彗孛) : 혜성.- [註 119]
무오년 : 1678 숙종 4년.- [註 120]
양맥(兩麥) : 보리와 밀.- [註 121]
기미년 : 1679 숙종 5년.- [註 122]
전조(田租) : 전지(田地)의 조세(租稅).- [註 123]
격쟁(擊錚) :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하여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던 일.- [註 124]
추조(秋曹) : 형조.- [註 125]
대열(大閱) : 임금이 친히 행하는 열무(閱武).- [註 126]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邊地)로 멀리 귀양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등(減等)하여 내지(內地)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註 127]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12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29]
네 신하 :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을 말함.- [註 130]
연곡(輦轂) : 임금이 타는 수레. 곧 서울.- [註 131]
친병(親兵) : 임금이 친히 거느리던 군사.- [註 132]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양장(良將) 염파와 상경(上卿)인 상여는 조나라의 두 기둥이었는데, 전공(戰功)이 많았던 염파는 재상으로 있는 인상여를 불쾌하게 생각하였음. 이에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한 인상여는 그를 피해 다녔는데, 이를 듣고 난 염파는 그에게 사과하고서 마침내 문경지교(刎頸之交)를 이루었음.- [註 133]
태아(太阿) : 보검(寶劍)의 이름. 권세(權勢)를 비유한 말.- [註 134]
단선(壇墠) : 제단(祭壇).- [註 135]
제구(諸舅) : 여러 외숙(外叔)과 장인.- [註 136]
「이필(李泌)이 노기(盧杞)를 논한 일」 : 당(唐)의 덕종(德宗)이 이필(李泌)과 더불어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재상들을 논하여, "노기(盧杞)는 충직하고도 강직한 사람인데도 사람들이 그를 간사하다고 하니,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자, 이필이, "사람들이 그를 간사하다고 하는데도 폐하께서는 홀로 그 간사함을 모르시니, 이것이 바로 간사하기 때문입니다."며 구체적 사례를 들어 노기의 간사함을 지적했다는 고사. 이필은 숙종(肅宗)·덕종 때의 현신. 노기는 덕종 때의 간신.- [註 137]
매얼(媒孼) : 죄에 빠뜨림.- [註 138]
반좌(反坐) : 남을 무고(誣告)한 사람은 무고(誣告)당한 사람이 받은 처벌과 동일한 형(刑)에 처하는 제도.- [註 139]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40]
퇴파(頹波) : 무너지는 물결. 즉 쇠(衰)하는 것의 비유.- [註 141]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142]
고적(考績) : 관리의 성적을 상고함.- [註 143]
연역(煙役) : 민호(民戶)에 부과하는 잡역(雜役).- [註 144]
「폐각(廢却)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은 자못 예(禮)를 사랑하여 양(羊)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서 공자가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사랑하노라."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임. 천자(天子)가 항상 계동(季冬)에 내세(來歲) 12월의 월삭(月朔)을 제후(諸侯)에게 반포하면, 제후가 그것을 받아 조묘(祖廟)에 보관하였다가 매월 초하루가 되면 특양(特羊)을 바치고 조묘에 고하여 시행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노(魯)나라 문공(文公) 때부터 이 예는 폐지되었음. 그럼에도 유사(有司)가 양(羊)을 잡아 바치니, 자공(子貢)이 그것을 아깝게 여겨 그만두게 하고자 하였음. 이에 공자가 형식이나마 남아 옛 예의 정신이 보존되는 것을 다행히 여겨 이렇게 말한 것임.- [註 145]
식거(植炬) : 밤에 임금의 거둥이 있을 때에 길 양쪽에 횃불을 죽 세우던 일.- [註 146]
빈풍(豳風) :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하나, 주로 농업(農業)의 근로(勤勞)에 대해 서술하였음. 뒤에 송(宋)의 조맹부(趙孟頫)가 빈풍도(豳風圖)를 그린 일이 있음. 주로 농촌 생활의 괴로움을 나타내는 그림의 주제로 사용되었음.- [註 147]
임술년 : 1682 숙종 8년.- [註 148]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49]
무신년 : 1668 현종 9년.- [註 150]
장보(章甫) : 선비.- [註 151]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152]
호종(扈從) : 어가(御駕)를 모시어 좇음.- [註 153]
견기(見幾) : 조짐을 보임.- [註 154]
애일(愛日) :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효자가 부모를 장구(長久)하게 모시고자 하는 마음.- [註 155]
일기(日記) : 승정원 일기.- [註 156]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57]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58]
포보(砲保) : 군보(軍保)의 하나. 포군(砲軍) 네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군역(軍役)에 복무하고, 세 사람은 그 보(保)로 쌀이나 베를 바치던 일.- [註 159]
채화(綵花) : 비단 조각으로 만든 가화(假花).- [註 160]
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註 161]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162]
적지(赤地) : 흉년이 들어 거둘 것이 없게 된 땅.- [註 163]
재숙(齋宿) :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냄.- [註 164]
서명(西銘) :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지은 인도(仁道)의 원리를 밝힌 명(銘), 서재(書齋)의 서쪽 창(窓)에 걸어 두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註 165]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166]
항양(桁楊) : 형구(刑具).- [註 167]
도독(荼毒) : 심한 고통. 곧 부모(父母)의 상(喪).- [註 168]
을축년 : 1685 숙종 11년.- [註 169]
운대(雲臺) : 관상감(觀象監).- [註 170]
민충단(愍忠壇) :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에 명(明)나라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죽은 것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혼을 제사지내던 곳. 홍제원(弘濟院) 근처에 있었음.- [註 171]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72]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173]
병인년 : 1686 숙종 12년.- [註 174]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註 175]
삼명일(三名日) : 조선조 때의 세 명절(名節). 곧 임금의 생일(生日)·설[正月一日]·동지(冬至). 삼명절(三名節).- [註 176]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77]
정묘년 : 1687 숙종 13년.- [註 178]
미앙궁(未央宮)의 재앙 : 미앙궁은 한(漢) 고조(高祖) 때 장안(長安)에 지은 궁전. 고조가 장안에 없는 동안 소하(蕭何)가 지은 것인데, 고조가 "천하가 아직 어지러운데 왜 이렇게 화려한 궁전을 짓느냐?"고 하자, 소하가 "천자(天子)는 궁실이 장대하고 아름답지 못하면 위엄이 없다."고 대답하였음. 미앙궁이 빌미가 되어 무제(武帝) 때 궁궐을 사치스레 짓게 되었는데, 그뒤 성제(成帝) 때 일식(日食)이 일어난 날 미앙궁에 지진이 일어난 변고가 생겼음.- [註 179]
세태(稅太) : 전세(田稅)로 바치는 콩.- [註 180]
공홍(公洪) : 충청도.- [註 181]
강양(江襄) : 강원도.- [註 182]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183]
징속(徵贖) : 속전(贖錢)을 징수함.- [註 184]
일죄(一罪) : 사형(死刑).- [註 185]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86]
주필(駐蹕) : 임금이 나들이하는 도중에 거가(車駕)를 잠시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일.- [註 187]
온왕(溫王) :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註 188]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89]
수용(睟容) : 임금의 화상.- [註 190]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 [註 191]
소유(所由) : 사헌부의 이속(吏屬).- [註 192]
여백공(呂伯恭) : 남송(南宋)의 유학자 여조겸(呂祖謙).- [註 19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4]
경오년 : 1690 숙종 16년.- [註 195]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196]
증미(拯米) : 물에서 건져 낸 젖은 쌀.- [註 197]
신미년 : 1691 숙종 17년.- [註 198]
반유(泮儒) : 성균관 학생.- [註 199]
무안왕(武安王) : 촉한(蜀漢)의 용장(勇將) 관우(關羽).- [註 200]
중사(中使) : 내시(內侍).- [註 201]
판삽(版鍤) : 판(版)은 흙을 양쪽에서 끼고 쌓는 데 쓰는 판대기. 삽(鍤)은 흙을 파는 데 쓰는 가래 따위. 모두 담이나 성 따위를 쌓는 데 쓰는 도구.- [註 202]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 등 중신(重臣)을 보내어 서하(西夏)의 침범을 막게 했을 때 장졸(將卒)들을 걱정했다는 고사(故事).- [註 203]
석뇌(錫賚) : 하사품(下賜品).- [註 204]
투료 음하(投醪飮河) : 한 병의 술을 강물에 던져 군사들로 하여금 받아 마시게 한다는 뜻으로, 사졸(士卒)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함을 이름.- [註 205]
전손(顓孫) :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 [註 206]
호공(胡公) : 호안국(胡安國).- [註 207]
임신년 : 1692 숙종 18년.- [註 208]
군석(君奭) :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산동 반도(山東半島)의 이족(夷族)을 정벌하여 동방(東方) 경로(經路)의 사업을 이룩했음. 소공(召公).- [註 209]
조송(趙宋) :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나라.- [註 210]
문지(門地) : 문벌.- [註 211]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 :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하늘의 명을 받들어 어느 때이건 힘쓰고 무슨 일이건 빌미를 살펴야 한다.", "신하들이 즐거우면 임금은 흥성하고 모든 관리들도 화락할 것이로다."고 한 노래에서 나온 말로, 이 노래는 순제(舜帝)가 지었다고 함. 즉 순제가 신하들에게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정사에 힘쓸 것을 당부한 것임.- [註 212]
하(夏)나라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 : 우왕(禹王)이 방울을 울려서 직언(直言)을 구하게 한 일. 우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에게 일을 지시할 사람은 방울을 울리라."고 한 고사(故事).- [註 213]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 : 상림 육책(桑林六責)을 말한 것으로, 은(殷)나라의 성탕(成湯)이 7년 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에 비를 빌기 위하여 상림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책망하였는데, 즉, "제가 정치에 절제가 없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까? 제 궁전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여알(女謁)이 성하여 정치가 공정하지 못한 때문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정도(正道)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하여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하였다는 고사(故事).- [註 214]
중종(中宗) : 상(商) 태무(太戊)의 묘호(廟號).- [註 215]
상상(祥桑)을 없앤 것 : 상(祥)은 요괴(妖怪)스러움, 상(桑)은 뽕나무. 은(殷)나라 태무(太戊)가 제위(帝位)에 오르고 이척(伊陟)이 정승이 되었는데, 상상(祥桑)이 조정에 나서 하루아침에 아름드리가 되자, 태무가 두려워하여 이척에게 원인을 물었음. 이척이 ‘요사함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 주상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음. 이에 태무가 그 말을 따라 행하여 덕정(德政)을 펴니, 상상이 말라 죽었다는 고사.- [註 216]
주(周)나라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 : 주문왕(周文王)이 마른 해골을 장사지내 준 것을 말함. 《신서(新序)》에 "문왕은 어질어서 은택이 고골(枯骨)에까지 미쳤으니 더구나 산사람에 대해서이겠는가?"라고 하였음.- [註 217]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 : 주무왕(周武王)이 즉위할 무렵에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풍도(酆都)에 날아와 문왕의 침실 지겟문 위에 놓았는데, 그 글에 "게으름을 이긴 이는 길하고 게으름에 진 이는 멸하니라. 의(義)를 지키고자 하는 이는 순(順)하고 의를 누르고자 하는 이는 흉(凶)하니라……"는 등의 경계하는 말이 있었음.- [註 218]
- [註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