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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8월 16일 병진 6번째기사 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양역의 폐단에 관한 지평 홍우전의 상소문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개량(改量)하는 일은 시작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곧 다시 정지하여 거의 아이들 장난과 같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국체(國體)가 손상됨을 염려함은 진실로 그럴 만하였습니다. 단지 생각하건대,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니, 시험삼아 당시의 폐막(弊瘼)을 헤아려 본다면, 어찌 양역(良役)의 폐단만 하겠습니까? 대저 양역의 폐단은 팔도(八道)가 똑같아서 옛날의 부호(富戶)가 지금은 모두 파산(破産)하였고, 옛날의 부성(富盛)했던 촌락(村落)이 지금은 절반이나 황폐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국가의 계책(計策)을 담당한 자들은 이러한 위급함을 구제함에 있어 마땅히 물이 새는 독을 들어 바닥이 타는 솥에 쏟아붓듯이 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여가가 없어야 할 것인데, 바야흐로 또 급하지 않은 전정(田政)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가령 양역(量役)을 곧 마치고 새 양안(量案)을 곧 이룬다고 한다면 단지 민생(民生)의 곤췌(困悴)만 더할 것이고, 국가의 위급한 형세에는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양남(兩南)에서 양전하는 일에 대해 또한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갑술년358) 양전했을 때의 구척(舊尺)은 진실로 법척(法尺)을 준수(遵守)하는 데에 어긋나는 바가 있었지만, 그 당시 균전사(均田使)가 조정에 계품하자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한 후에 선왕(先王)께서 아랫사람을 이롭게 하시는 어짊으로써 그대로 장척(長尺)을 쓰도록 허락하셨으니, 한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척(新尺)과 구척의 길고 짧음을 다투는 것이 반촌(半寸)에 지나지 않아 비록 지극히 작은 듯하나, 양남(兩南)에서 자[尺]를 고쳐서 더 얻게 되는 수량을 통계(通計)하면 거의 3, 4만 결에 이릅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법척(法尺)을 준용(遵用)하는 데만 힘쓰고 결부(結負)를 많이 얻는 데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를 믿겠습니까? 또 듣건대, 개량(改量) 때 쓴 양식(糧食)·늠료(廩料)·지(紙)·필(筆)·묵(墨)의 값을 모두 환모(還耗)에서 가져다 쓴다 합니다. 이는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여러 가지 잡비(雜費)는 논할 것도 없이 다만 지지(紙地)만을 계산하더라도 대읍(大邑)에서 응당 받아들이는 것이 2천여 냥의 전(錢)에 밑돌지 않고, 중읍(中邑)·소읍(小邑) 또한 4, 5백 냥에서 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 고을의 환모(還耗)가 반드시 많이 부족(不足)할 것이니, 형편상 다시 원환(元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경우 계사년359) ·갑오년360) 이후에 대부분 받아 들이지 못했는데, 허다(許多)한 양전(量田)의 비용을 다시 환곡(還穀)에서 판출(辦出)한다면 삼남(三南)의 환곡은 또 장차 거의 다 없어질 것이니, 불행하게도 갑자기 군사를 이바지하거나 흉년에 진휼(賑恤)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어디에서 판출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개량하는 정사를 우선 한편으로 치워버리고 풍년이 들기를 조금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여 거행하되, 만약 개량하는 데 힘쓰던 뜻을 양역을 변통하는 정사에 옮겨서 좋은 계책을 강구(講究)하여 시행한다면, 피로하여 병든 백성을 오히려 구제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양역의 폐단이 생기는 원인은 진실로 양정(良丁)을 얻기 어려운 데에 있고, 양정을 얻기 어려운 것은 도망하고 회피(回避)하는 방도가 많은 데에 말미암습니다. 그런데 이는 대개 각도(各道)와 각영(各營)의 장인(匠人)·군관(軍官)과 각 관사(官司)와 각청(各廳)의 사장(私匠)·보인(保人)의 역(役)이 가벼워서 백성들이 모두 그쪽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고을의 교생(校生)·원생(院生)에 이르러서는 연줄을 타서 함부로 입속(入屬)하니, 까닭 없이 한유(閑游)하는 자가 가장 많은 고을의 경우 혹 4, 5백 명에 이릅니다. 지금 만약 도신(道臣)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고 각 고을에 엄중히 신칙(申飭)하여 사실대로 조사해 내고 속이거나 숨기지 못하게 한 후에 마땅히 액수(額數)를 헤아려 정하여 본영(本營)과 본관(本官)에 획급(劃給)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사로 뽑게 한다면, 양정이 오히려 수십만에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인족(隣族)이 괴로움을 당하는 위급함을 어찌 구제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72책 6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농업-양전(量田)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持平洪禹傳上書。 略曰:

今玆改量之擧, 經始有年, 旋復停寢, 殆同兒戲。 朝家之慮損國體, 誠有然者, 而第念事有緩急。 試究當時之弊瘼, 豈若良役之弊哉? 夫良役之弊, 八路同然, 昔之富戶, 今皆破産, 昔之盛村, 今半爲墟。 爲今日國家計者, 救此之急, 宜若奉漏沃焦, 不暇他顧, 而方且汲汲於不急之田政。 藉令量役卽畢, 新案卽成, 只益民生之困悴, 無補國勢之危也。 臣於兩南量尺事, 亦有訝惑者。 甲量舊尺, 誠有違於遵守法尺, 而其時均田使, 啓稟於朝, 至使大臣議得, 然後先王推益下之仁, 許令仍用長尺, 非一時做錯之事也。 新舊尺長短所爭, 不過半寸, 雖似至微, 通計兩南, 改尺加得之數, 幾至三四萬結。 朝家雖曰只務法尺之遵用, 無所利於結負之多得, 人孰信之? 且聞改量時所費糧料、紙筆墨之價, 皆以還耗取用。 此出於爲民除弊, 然勿論雜費, 只計紙地, 大邑應入, 不下二千餘兩錢, 中、小各邑亦不減四五百兩。 各邑還耗, 必多不足, 其勢不得不更許元還。 如兩湖, 則癸甲以後, 未捧居多, 數多費入, 若復倚辦於還穀, 則三南還穀, 且將盡矣。 不幸而猝有供軍、賑荒之擧, 則何從責出乎? 臣謂改量之政, 姑爲倚閣, 一邊稍俟年穀豐登, 徐議擧行, 而若以銳於改量之意, 移之良役變通之政, 講究善策而行之, 則痼瘵之民, 猶可及救。 良役起弊之源, 實在於良丁之難得, 良丁難得, 由於逋逃之有藪, 躱避之多門。 蓋各道、各營匠人、軍官, 與各官、各廳之私匠、保人, 役俱最歇, 民皆願趨。 至於各邑校生、院生, 夤緣冒屬, 無端閑游者, 最多之邑, 或至四五百。 今若別諭道臣, 嚴勑各邑, 使之從實覈出, 毋得欺隱, 然後量宜定額, 劃給本營、本官, 而其餘竝令簽軍, 則良丁尙不下數十萬矣, 隣族倒懸之急, 豈不可救哉?

世子下之廟堂。


  • 【태백산사고본】 72책 6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농업-양전(量田)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