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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4월 30일 임신 3번째기사 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정언 홍현보가 상서하여 향사할 때 선품하는 일과 김종서의 죄적 등의 일을 논하다

정언(正言) 홍현보(洪鉉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대사(大事)는 제사(祭祀)에 달려 있으니, 진실로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遵守)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신제(忌辰祭)와 오명일(五名日) 절사(節祀)의 선품(饍品)을 단지 유과(油果)와 포탕(泡湯)만을 가지고 설행(設行)하니, 매우 미안(未安)합니다. 전해 듣건대, 국초(國初)에 예제(禮制)를 정한 대신(大臣)이 훗날의 폐단(弊端)을 염려하여 이로써 정식(定式)을 삼았다고 하는데, 소선(素饍)의 제도를 경전(經傳)에서 상고하고 사전(祀典)에서 질정(質正)해 보았으나 모두 근거가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가 처음 창건(創建)하던 초기에 멸망된 나라[高麗]의 불교(佛敎)를 숭상하던 여습(餘習)210) 을 인습(因襲)한 데 지나지 않는데, 막중(莫重)한 사전(祀典)을 이 제도로 준용(遵用)하고 있으니, 어찌 혈식(血食)211) 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만약 소선(素饍)이 예의(禮意)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태묘(太廟)의 제사도 마땅히 이 제도를 준용(遵用)해야 할 것인데, 태묘는 삭망제(朔望祭)와 대제(大祭)에 모두 희생(犧牲)을 바치는 제전(祭典)을 쓰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예제(禮制)에 없는 예(禮)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소선(素饍)을 고쳐 육선(肉饍)을 쓰면 경비(經費)를 지탱하기 어렵다.’ 하나,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봉상시(奉常寺)에서 봉진(封進)하는 소선(素饍)의 공물가(貢物價)는 그 액수가 매우 많지마는, 반수 이상은 유밀과(油密果)에 들어간 유청(油淸)·진말(眞末)212) 의 값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유밀과는 예가(禮家)에서 숭상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승려(僧侶)와 속인(俗人)이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또 태묘(太廟)에 올리고 있으니, 이를 줄이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선조(先祖)에서 쓴 것이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면 그 그릇의 수효를 반감(半減)하고, 그 줄인 값을 계산하더라도 오히려 적지 않으니, 육선(肉饍)의 값을 족히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혹시 대뢰(大牢)에 부족(不足)하더라도 오히려 소뢰(小牢)는 판비(辨備)할 수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부족(不足)할 경우에는 단지 장포(長脯)만 쓰더라도 소선(素饍)을 베풀어 불교(佛敎)의 습속에 따르는 그릇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벗겨 원한을 풀어주는 것은 나라를 보유(保有)하는 선무(先務)입니다.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선위(禪位)를 받을 즈음에 스스로 그 군주(君主)를 위해 일찍이 반룡부봉(攀龍附鳳)213) 하지 않고 모두 극화(極禍)를 입고서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성조(聖祖)214) 께서 여러 사람을 죽인 일은 대개 위의(危疑)를 평정(平定)하고 대권(大權)을 행하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미 등극(登極)하신 후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험난(險難)함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泰平)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인데, 네가 나의 한 일에 구애받아 변통(變通)할 줄을 모른다면, 이른바 둥글게 뚫은 구멍에 모난 장부[枘]를 끼우려 하는 것이다.’ 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그 뜻을 칭찬하시고 그 죽음을 불쌍히 여기신 큰 뜻을 이에게 볼 수 있습니다. 성조(聖祖)의 뜻을 오늘날에 비로소 시행하여 그 관직을 회복시킨다면 어찌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이 더욱 성조께 빛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글의 말미에 벼슬을 팔아 진휼(賑恤)에 보태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과, 조정(朝廷)의 상전(賞典)을 믿지 않는다는 것, 문관(文官)·음관(蔭官) 출신의 수령(守令)으로서 도둑을 막지 못한 자는 마땅히 논죄(論罪)해야 된다는 것, 윤장(尹樟)·남세진(南世珍)이 춘방관(春坊官)에 의망(擬望)된 것은 외람되다는 것, 유집일(兪集一)이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까다롭고 잗달았다는 등의 여러 일들을 덧붙여 논핵(論劾)하였는데, 세자(世子)가 그 글을 해조(該曹)에 내렸다. 이후에 향사(享祀) 할 때의 선품(饍品)에 대한 일은 예조(禮曹)에서 갑자년215) 의 판부(判付)를 【무릇 공사(公事)에서 글을 내려 상교(上敎)를 낸 것을 판부라고 일컫는다.】 끌어대고는 복주(覆奏)하여 쓰지 않았다.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에 대한 일은 이조(吏曹)에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병자년216) 의 여러 신하들은 거의 영락 때 방효유(方孝儒)·철현(鐵鉉)보다 심하나,217)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 등은 오늘날의 난신(亂臣)이나, 후세(後世)에는 충신(忠臣)이다.’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욱이 계유년218) 의 여러 신하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동궁(東宮)께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시려면 먼저 연좌(緣坐)된 2백여 인을 용서해야 할 것이니, 만약 성지(聖志)의 미치는 바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성교(聖敎)가 있었겠습니까? 또 신이 삼가 듣건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일찍이 거둥하셨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그 때 절의 중이 재(齋)를 베풀어 원통하게 죽은 혼령(魂靈)을 위로하고 있었고, 이른바 초혼기(招魂記)라는 것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여러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니, 죽은 이가 만약 알고 있다면 여러 신하들도 이미 성조(聖祖)의 불쌍히 여기신 어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간신(諫臣)이 인용(引用)한 세조(世祖)께서 예종(睿宗)께 보이신 훈사(訓辭)에 이르기를, ‘나는 험난한 때를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한 때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네가 나의 자취에 구애받아 변통(變通)할 줄 모른다면, 이른바 둥글게 판 구멍에 네모난 장부를 끼우려 하는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잊지 말도록 하라.’ 하셨는데, 우리 성조(聖祖)의 유교(遺敎)가 명확하여 막힘이 없으니, 지금 어찌 반드시 그 뜻을 이어받지 않고 도리어 그 자취에 구애받겠습니까? 신설(伸雪)하는 것이 계술(繼述)하는 효도(孝道)에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장릉(莊陵)을 복위(復位)한 후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은 모두 포장(褒奬)의 은전(恩典)을 받았는데, 유독 두 신하만 지금까지 억울함을 품은 채 누명(陋名)을 벗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고도 불쌍합니다. 억울함을 풀어 주어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는 것이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의 의논과 같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장릉(莊陵)을 복위(復位)하고,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도 또한 포장(褒奬)을 가하신 것은 이미 천고(千古)의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두 사람만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으니, 마땅히 여정(輿情)이 오래 갈수록 더욱 답답해 할 것입니다. 신은 이에 대해서 별다른 의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에 다시 묻도록 명하였다. 행 공조 판서(行工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신이 근년에 감히 이 일을 전석(前席)에서 우러러 계달(啓達)하였는데, 곧 재신(宰臣)이 소장(疏章)을 올려 논박(論駁)한 의논으로 인하여 【민진후가 지난해에 이 일을 진청(陳請)하였는데, 김진규(金鎭圭)가 상소(上疏)하여 불가(不可)함을 말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마침내 정지되고 시행되지 않았었으니, 감히 다시 참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은 말하기를,

"성조(聖朝)께서 당일의 훈사(訓辭)에 이미, ‘나는 험난한 때에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한 때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유시(諭示)하셨으니,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仁德)을 보이심으로써 이미 구애받지 말라는 미의(微意)를 보이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성조의 뜻을 본받고 성조의 인덕(仁德)을 미루어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을 내려서 유원(幽冤)을 풀어주는 것이 존엄(尊嚴)한 분의 일을 숨기는 뜻에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은 특별히 아뢰는 말이 없었다.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은 말하기를,

"이 일은 모두 상량(商量)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김종서(金宗瑞) 등은 당초의 죄안(罪案)에 이미 이용(李瑢)219) 을 추대(推戴)하여 불궤(不軌)220) 를 모의(謀議)한 것으로 연좌되었고, 우리 세조(世祖)께서는 실제로 그 훈명(勳名)이 책록(策錄)되었는데, 지금 만약 김종서 등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일컬어 복관(復官)하기에 이른다면 그것이 성조의 훈명에 어찌 크게 방애(妨碍)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한 후라고 말하더라도 육신(六臣)과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 견주어 본다면 그 체단(體段)221) 이 자연히 같지 않으므로, 신의 중부(仲父)인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는 일찍이 중신(重臣)이 이 일을 건백(健白)한 데 대해 그 불편(不便)함을 상소(上疏)하여 논박(論駁)하고, 인하여 관청에서 유사(遺祀)를 짓는 데 도와주고 후손(後孫)을 견발(甄拔)하라는 청에 미치었으니, 대개 복관(復官)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두 신하가 수립(樹立)한 공적(功績)을 모두 마땅히 민몰(泯沒)시킬 수는 없으니,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하고, 또 남아 있는 자손들을 채용(採用)하여 사족(士族)에 낄 수 있게 한다면 가엾게 여겨 용서하는 뜻이 저절로 그 사이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副修撰) 조상건(趙尙健)은 말하기를,

"황보인·김종서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남겨져 있어서 억울함이 저승[泉壤]에 맺혀져 있는 지 거의 2백여 년이나 되어 여정(輿情)의 근심하고 답답해 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억울함을 풀어주고 관작(官爵)을 추복(追復)시키는 일을 진실로 그만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 두 신하의 죄는 이용(李瑢)을 추대(推戴)하려 했다는 것으로 명분(名分)을 삼았으니, 이제 만약 두 신하의 일을 억울하다고 여긴다면 용(瑢)도 또한 마땅히 두 신하와 다름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연고가 있어서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상세히 계문(啓聞)하니, 세자(世子)가 영(令)을 내리기를,

"다시 이 일을 가지고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였더니, ‘두 신하의 일은 이제 장차 수백여 년이 되어 가는데도 유원(幽冤)을 씻지 못하고 있으니, 탄식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간신(諫臣)이 논열(論列)한 바는 지극히 절실(切實)하다고 이를 만하지마는, 다만 정난(靖難)의 훈공(勳功)을 생각하건대, 이에 크게 방애(妨碍)되는 바가 있으니, 복관(復官)하는 한 가지 일은 마침내 중난(重難)한 데에 관계된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두 신하의 후예(後裔)를 거두어 임용(任用)해서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하다.’고 하교(下敎)하셨다.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재정-국용(國用)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 [註 210]
    여습(餘習) : 옛부터 남아 전해 내려온 풍습.
  • [註 211]
    혈식(血食) : 희생(犧牲)을 올리고 제사지냄.
  • [註 212]
    진말(眞末) : 밀가루.
  • [註 213]
    반룡부봉(攀龍附鳳) :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움.
  • [註 214]
    성조(聖祖) : 세조(世祖)를 가리킴.
  • [註 215]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 [註 216]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217]
    영락 때 방효유(方孝儒)·철현(鐵鉉)보다 심하나, : 영락(永樂)은 명(明)나라 성조(成祖)의 연호(年號). 성조가 연왕(燕王)으로 있을 때 명 태조(明太祖)가 죽자 군사를 일으켜 경사(京師)를 함락하고 즉위하였는데, 방효유(方孝儒)에게 조서(詔書)를 짓도록 하였으나 방효유가 이를 거절하였고, 철현(鐵鉉)은 회수(淮水)에서 연왕의 군사를 막다가 붙잡히니, 모두 뜻을 굽히지 않고 거열형(車裂刑)을 받았음.
  • [註 218]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219]
    이용(李瑢) : 안평 대군(安平大君).
  • [註 220]
    불궤(不軌) : 반역(反逆).
  • [註 221]
    체단(體段) : 체모(體貌)와 구분(區分).

○正言洪鉉輔上書。 略曰:

國之大事在祀, 則固當一遵禮制, 而忌辰祭及五名日節祀饍品, 只以油果、泡湯設行, 其爲未安甚矣。 傳聞國初定禮之大臣, 爲慮後弊, 以此定式, 而素饍之制, 考之經傳, 質諸祀典, 皆無所據。 此不過我國新創之初, 因襲勝國崇佛之餘習, 莫重祀典, 遵用此制, 惡在其血食之義哉? 若曰素饍不悖於禮意, 則太廟之祭, 當用此制, 而太廟則朔望曁大祭, 皆用薦牢之典, 此誠無於禮之禮也。 議者以爲: "改素用肉, 經費難支", 亦有不然者。 臣聞奉常寺封進素饍貢物之價, 其數夥然, 而太半入於蜜果所入油淸、眞末之價云。 蜜果非禮家所尙, 實是僧俗之所貴, 而又薦於太廟, 減之可也。 若以先朝所用, 其來已久, 不可猝然全廢, 則半減其器數。 以其所除之價計之, 猶且不少, 足當肉饍之價。 雖或不足於大牢, 猶可辦小牢, 此而不足, 只用長脯, 其不愈於設素饍從佛習之爲謬乎? 雪冤伸枉, 有國之先務。 皇甫仁金宗瑞等, 當我世祖大王受禪之際, 自爲其主, 不早攀附, 俱被極禍, 尙在罪籍。 聖祖誅鋤諸人之擧, 蓋出於定危疑行大權之義, 而旣於登極之後, 製訓辭以示睿宗曰: "予當屯, 汝當泰。 事隨世變, 汝拘於吾跡而不知變, 所謂圓鑿而方枘也。" 聖祖之嘉其志、憫其死之大旨, 此可見矣。 聖祖之意, 始行於今日, 使復其官, 則豈非繼述之美, 而益有光於聖祖耶?

書末附論賣爵補賑之不可, 朝家賞典之不信, 文、蔭守令之不能止盜者宜論罪, 尹樟南世珍見擬春坊之濫猥, 兪集一 燕行時苛瑣諸事, 世子下其書于該曹。 是後, 享祀饍品事, 禮曹援甲子年判付, 【凡公事下書, 出上敎者, 稱判付。】 覆奏不用。 金宗瑞皇甫仁事, 吏曹請議于大臣, 行判中樞府事李頣命以爲: "丙子諸臣, 殆甚於永樂, 而聖敎乃曰: ‘三問等, 今日之亂臣, 後世之忠臣。’ 此而尙然。 況於癸酉諸臣乎? 是以, 東宮參決庶務, 則首釋其緣坐二百餘人, 若非聖志所及, 何以有此? 且臣伏聞公州 東鶴寺, 光廟所嘗臨幸, 而世傳: ‘伊時寺僧設齋, 以慰其冤死之魂。’ 所謂招魂記者尙存, 而皆錄諸臣之名云。 死者如有知也, 諸臣已識聖祖惻怛之仁矣。 今者諫臣所引光廟所示睿宗之訓辭, 有曰: ‘予當屯, 而汝當泰。 事隨世變, 若汝拘於吾迹, 而不知變通, 則所謂圓鑿而方枘矣。 汝須毋忘。’ 我聖祖遺敎, 洞然無礙, 則今何必不承其志, 而反拘其迹? 伸而雪之, 允合繼述之孝。" 行判中樞府事趙泰采以爲: "莊陵復位之後, 守義諸臣, 擧蒙褒奬之典, 而獨二臣, 至今抱冤, 未得昭雪, 誠甚憫傷。 伸枉復爵, 實爲成德事。" 領議政金昌集、行判中樞府事金宇杭、右議政李健命, 與頣命議同。 領中樞府事李濡以爲: "莊陵復位, 守義諸臣, 亦加褒奬, 旣是千古聖德事, 則獨此兩人, 尙在罪籍, 宜乎輿情之久而愈鬱。 臣於此, 無容別議。" 上又命更問于六卿、三司。 行工曹判書閔鎭厚以爲: "臣於頃年, 敢以此事, 仰達前席, 旋因宰臣, 陳章 【鎭厚於年前, 以此事陳請, 金鎭圭上疏, 言其不可, 事遂寢。】 (䮕)〔駁〕 議, 遂寢不行, 不敢更爲容喙。" 兵曹判書趙道彬以爲: "聖祖當日之訓, 旣以當屯當泰爲諭, 則有以見惻怛之仁, 已示毋拘之微意。 今若體聖祖之志, 推聖祖之仁, 特賜愍典, 以雪幽冤, 恐無歉於諱尊之義。" 吏曹判書權尙游、禮曹判書李觀命, 無別白語。 副校理金雲澤以爲: "此事儘有可以商量者。 宗瑞等當初罪案, 旣坐於推戴、謀不軌, 而我世祖實策其勳名。 今若以宗瑞等之死, 稱其冤枉, 至於復官, 則其於聖祖之勳名, 豈不大有所妨礙耶? 雖以莊陵追復後言之, 比諸六臣及守義諸臣, 其體段, 自有不同, 故臣仲父故判書鎭圭, 嘗於重臣之建白此事也, 疏論其不便, 仍及官助遺祠, 甄拔後孫之請, 蓋以爲復官, 則有不可輕議, 而若其兩臣之樹立功伐, 皆不宜泯沒, 特施隱恤之典, 且錄其遺息, 俾得齒於士族, 則愍隱寬宥之意, 自寓於其間耳。" 副修撰趙尙健以爲: "皇甫仁金宗瑞名留罪籍, 冤結泉壤者, 殆將二百有餘年, 輿情愍鬱, 愈久愈甚, 則伸枉復鬱, 實是不可已之擧。 且兩臣之罪, 以推戴爲名, 今若以兩臣爲冤, 則亦不宜異同。" 兩司諸臣, 皆有故不得獻議。 該曹具聞, 世子下令曰: "更以此事, 仰稟大朝, 則兩臣之事, 今將數百餘年, 而幽冤未雪, 嗟傷不已。 諫臣論列, 可謂切至, 而第念靖難之勳, 大有所妨礙, 復官一節, 終涉重難。 着令銓曹, 收用兩臣後裔, 以示愍冤慰枉之意爲宜, 爲敎。 依此擧行。"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재정-국용(國用)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