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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4월 18일 경신 1번째기사 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여러 기로신들에게 잔치를 내려 주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 주었다. 왕세자(王世子)의 좌석(座席)을 어좌(御座) 왼쪽에 설치하고, 기로(耆老)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황흠(黃欽)·강현(姜鋧)·행사직(行司直) 홍만조(洪萬朝)·이선부(李善溥), 한성 판윤(漢城判尹) 정호(鄭澔)·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방(任埅)이 잔치에 참여하였다. 이날 사시(巳時)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소여(小輿)를 타고 숭덕문(崇德門)을 거쳐 나가니, 고취(鼓吹)가 시작하여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여(輿)에서 내려 경현당(景賢堂)에 나가니, 내시(內侍)가 궤장(几杖)을 받들어 어좌(御座) 곁에 두고 상서관(尙瑞官)이 어보(御寶)를 받들어 안(案)에 놓았다. 근시(近侍)와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이 각각 자리에 나아가고, 왕세자(王世子)가 여러 기로신들을 거느리고 모두 네 번 절하고 자리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번에 석연(錫宴)195) 의 음악 절차는 한결같이 진연(進宴) 때의 예에 의거하였는데, 다만 진연 때에는 제1작(第一爵)과 2작(二爵) 때 탕(湯)을 바치는 절차가 없이 단지 만두(鏝頭)만 바치고 2작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탕을 바치는 절차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려주는 잔치이므로 1작(爵)부터 5작(爵)까지 잇따라 탕을 다섯 차례나 바치도록 하였으며, 음악 절차는 당초에 장악원(掌樂院)에서 마련한 것과 조금 다르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주기(酒器)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俯伏)하였다.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휘건함(揮巾函)을 받들어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자 음악이 시작되고, 내시(內侍)가 꿇어앉아 휘건(揮巾)을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찬안(饌案)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었는데, 또 별행과(別行果)를 바쳤다.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의 찬탁(饌卓)을 배설(排設)하니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여러 장수에게 자리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근시(近侍)가 화반(花盤)을 받들어 어좌(御座) 앞으로 나아가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俯伏)하고 내시(內侍)가 꽃을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염수(鹽水)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제조가 공안(空案)을 찬안(饌案)의 오른쪽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도로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공안을 왕세자의 오른쪽에 놓고, 보덕(輔德)이 왕세자에게 꽃을 올리고,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꽃을 나누어 주었다. 내시가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전내(殿內)의 시위(侍衛)에게 모두 자리를 내려 주도록 하라.’하였다. 제조가 소선(小饍)을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으며, 바치기를 마치니 자리에 돌아갔다. 부제조(副提調)가 왕세자에게 선(饍)을 올리고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선(饍)을 베푸니 음악이 그쳤다. 내시가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별운검(別雲劍) 이하의 관원에게 자리를 내려주어 보검(寶劍)을 체대(遞代)하게 하라.’하였다. 전악(典樂)이 창(唱)하기를, ‘악장(樂章)을 존숭(尊崇)하라.’하여 유천지곡(維天之曲)을 마치자, 제조가 제1작(爵)에 술을 따르고 내시가 전해 받들어 안(案)에 놓으니, 음악을 천년만세(千年萬歲)를 연주하고 무동(舞童)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술을 올리고 집사자가 여러 기로신들에게 술을 돌리자 임금이 술잔을 들어 세 번 마셨다. 제조가 나아가서 작(爵)을 받아 점(坫)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고기를 베어 꿇어앉아 찬안(饌案)의 오른쪽에 바치자 음악은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를 연주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다. 제조가 만두(饅頭)를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탕(湯)을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다.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에 돌아갔다. 제2작·제3작·제4작을 바칠 때 탕을 바치는 의식(儀式)은 모두 전과 같게 하였는데, 제2작 때에는 음악을 정읍만기(井邑慢機)를 연주하고 아박무(牙拍舞)를 무동(舞童)이 들어와서 추었으며, 탕(湯)을 바치자 음악은 청평곡(淸平曲)을 연주하였다. 제3작 때에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을 연주하고 향발무(響鈸舞)를 무동이 들어와서 춤추게 하였으며, 탕을 바치자 음악은 하운봉(夏雲峰)을 연주하였다. 제4작 때 음악은 천년만세(千年萬歲)를 연주하고 무고(舞鼓)를 무동이 들어와서 추었으며, 탕을 바치자 음악은 낙양춘(洛陽春)을 연주하였다. 마침내 어좌(御座) 앞에 푸른 휘장을 내리고 임금이 조금 쉬었다가, 잠시 후에 휘장을 걷어치웠다. 내시가 한 은배(銀杯)를 받들어 내놓고 임금의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제5작은 이것으로 술을 돌리고, 인하여 술잔을 기로소(耆老臣)에 내릴 것이니, 술잔 가운데에 ‘사기로소(賜耆老所)’ 네 글자를 새기도록 하라."

하자, 여러 기로신들이 돌려가며 구경하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제조가 제5작을 바치자, 음악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고 광수무(廣袖舞)를 무동이 들어와서 춤추었다. 바치기를 마치자 제조가 소선(少饍)을 물리고 대선(大饍)을 바치니, 음악은 태평년(太平年)을 연주하고, 인하여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는데, 처용(處容)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무릇 술잔을 바치고 탕을 바치면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고, 바치기를 마치면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임금 앞에 탕(湯)과 선(饍)을 바치고,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탕과 선을 올렸다. 집사자가 여러 기로신들의 찬탁(饌卓)을 거두어 치우기를 마치자,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중궁(中宮)의 환후(患候)가 이미 완쾌(完快)되셨으니, 마땅히 경사(慶事)를 치르는 절목(節目)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전(內殿)의 환후(患候)는 이미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는 절차를 거행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여러 기로신들이 마침내 어전(御前)에 나아가 각각 감축(感祝)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 또한 위로하고 면려하기를 매우 우악(優渥)하게 하였다. 기로(耆老)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오늘은 성상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셨으니,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은 다시 내려주신 은배(銀杯)를 가지고 기로소의 작은 모임에 나아가 남은 기쁨을 다하여 성상의 은혜를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원(梨園)196) 의 법악(法樂)은 감히 청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만, 다시 한 번의 승사(勝事)를 도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악부(樂部)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자리에 돌아가자,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모두 네 번 절하였다. 통례(通禮)가 예(禮)를 마쳤음을 아뢰자, 공인(工人)이 축(柷)을 두드리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통례가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내시(內侍)가 궤장(几杖)을 받들어 따르자, 공인(工人)이 어(敔)를 두드리고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숭덕문(崇德門)을 지나 궐내(闕內)로 돌아오니, 고취(鼓吹)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왕세자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가니, 해엄(解嚴)197) 하고 의장(儀仗)을 해산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윤리-강상(綱常)

  • [註 195]
    석연(錫宴) : 내려주는 잔치.
  • [註 196]
    이원(梨園) : 당(唐)의 현종(玄宗)이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던 곳. 여기서는 궁중(宮中)을 이른 말.
  • [註 197]
    해엄(解嚴) : 경계를 해제함.

○庚申/上出御景賢堂, 錫耆老諸臣宴。 王世子設座于御座之左, 耆老領中樞府事李濡、領議政金昌集、判中樞府事金宇杭、行知中樞府事黃欽姜鋧、行司直洪萬朝李善溥漢城判尹鄭澔、右參贊申銋、知中樞府事任埅與宴。 是日已時, 上具翼善冠、袞龍袍, 乘小輿, 由崇德門出, 皷吹作, 奏《與民樂》。 降輿御景賢堂, 內侍奉几杖, 置于座側, 尙瑞官捧寶, 置于案。 近侍及侍衛將士, 各就位, 王世子率耆老諸臣, 皆四拜就位。 禮曹判書閔鎭厚曰: "今番錫宴樂節, 一依進宴時例, 而但進宴則第一爵、二爵, 無進湯, 而只進饅頭, 二爵旣卒之後, 始有進湯之節矣。 今番則爲諸臣錫宴, 故自一爵至五爵, 連進湯五次, 而樂節與當初樂院所磨鍊小異矣。" 上頷之。 司饔院提調進酒器, 樂作,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進訖, 樂止。 提調捧揮巾函, 詣座前, 樂作, 內侍跪進揮巾訖, 樂止。 提調進饍案, 樂作, 又進別行果。執事者設耆老諸臣饌卓, 樂止。 上命侍衛諸將賜座。 近侍捧花盤, 詣座前, 樂作。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內侍進花訖, 樂止。 提調進鹽水, 樂作, 提調以空案, 置於饌案之右, 樂止。 王世子以下, 還就位。 提調以空案, 置王世子之右, 輔德供王世子花, 執事者散耆老諸臣花。 內侍宣敎: "殿內侍衛, 皆賜席。" 提調進小饍, 樂作,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進訖, 還位。 副提調供王世子饍, 執事者設耆老諸臣饍, 樂止。 內侍宣敎: "別雲劎以下賜席, 寶劍遞代。" 典樂唱尊崇樂章《維天之曲》訖, 提調酌酒第一爵, 內侍傳捧置于案, 樂奏《千年萬歲》, 舞童入作。 副提調供王世子酒, 執事者行耆老諸臣酒, 上擧爵, 三吸。 提調進受爵, 復於坫, 樂止。 提調割肉跪進于饌案之右, 樂奏《五雲開瑞朝》,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提調進饅頭, 進訖, 樂止。 王世子以下, 還就位。 提調進湯, 樂作,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進訖, 樂止, 王世子以下還就位。 第二、第三、第四進爵, 進湯, 竝如前儀, 而第二爵, 樂奏《井邑慢機》, 牙拍, 舞童入作。 進湯, 樂奏《淸平曲》。 第三爵, 樂奏《少虛子令〔步虛子令〕, 響鈸, 舞童入作, 進湯, 樂奏《夏雲峰》。 第四爵, 樂奏《千年萬歲》, 舞皷, 舞童入作。 進湯, 奏《洛陽春》。 遂垂靑帳於御前, 上少休, 頃之撤帳。 內侍捧出一銀杯, 宣上敎曰: "第五爵, 以此行酒。" 仍以杯, 賜耆老所, 杯心鐫賜耆老所四字。 耆老諸臣, 傳玩叩謝。 提調進第五爵, 樂奏《與民樂》, 廣袖, 舞童入作。 進訖, 提調退小饍, 進大饍, 樂奏《太平年》, 仍奏《與民樂》, 處容入作。 凡進爵進湯, 王世子以下, 離位俯伏, 進訖, 還位。 提調進上前湯饍, 副提調供王世子湯饍。 執事者撤耆老諸臣卓訖, 禮曹判書閔鎭厚言: "中宮患候, 今已快復, 宜有稱慶之節。" 上曰: "內殿患候, 旣不設議藥廳, 則告廟頒赦之節, 不宜擧行矣。" 耆老諸臣遂進前, 各陳感祝之辭, 上亦慰勉甚渥。 耆老領議政金昌集奏曰: "今日自上特施異恩, 耆老諸臣, 欲更以所賜之杯, 就耆司小集, 以盡餘歡而侈上恩。 梨園法樂, 非敢請之物, 而欲更圖一番勝事耳。" 上曰: "樂部帶去好矣。" 諸臣退復位, 王世子以下, 皆四拜。 通禮啓禮畢, 工鼓柷樂作。 通禮啓請乘輿, 內侍奉几杖隨之, 工戞敔樂止。 上由崇德門還內, 皷吹奏《與民樂》。 王世子以下諸臣皆出, 解嚴放仗。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윤리-강상(綱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