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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4월 10일 임자 3번째기사 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세자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접하여, 경리청 혁파 등을 논의하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난날 영상(領相)이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서 군문(軍門)을 변통(變通)할 일을 논하였는데, 근래에 양역(良役)의 폐해는 이미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구급(救急)하는 방도는 다만 한 군문을 혁파(革罷)하여 도고(逃故)175) 를 채우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일찍이 전에 금위영(禁衛營)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一致)하지 않아서 겨우 혁파하자마자 곧 복구(復舊)하였으니, 이는 갑자기 결정(決定)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하(邸下)께서 시탕(侍湯)하시는 여가에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시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신 다음 조용히 강구하셔서 변통하는 바탕을 삼으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守令)들이 명예를 구하는 폐단(弊端)은 진실로 지난날 수상(首相)의 차자(箚子)와 같습니다. 서울의 각사(各司)에서 응당 상납(上納)해야 하는 여러 가지의 미포(米布)를 혹은 견감(蠲減)해 주기도 하고 혹은 기한을 늦추어 주기도 하면서 백성의 칭찬을 요구하고는 미처 수습(收拾)하지 못한 채 빨리 체차(遞差)되어 돌아가기만 꾀하므로, 월등(越等)176) 으로 법식(法式)을 정하여 이 폐단을 막고자 하였는데, 일찍이 전에 사맹삭(四孟朔)177) 으로 1등을 삼았을 때에는 수령(守令)들이 척념(惕念)하여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근년에 봉료(俸料)를 반급(頒給)한 후부터 월등(越等)하는 것을 매달 등급에 준거(準據)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볍게 범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전의 사맹삭에 등급을 계산하던 것에 의거하면 반드시 징외(懲畏)하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김창집·이건명이 모두 권상유(權尙游)의 말이 옳다고 칭찬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고, 그대로 전에 매달 등급을 계산하던 것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헌납(獻納)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여, 경리청(經理廳)을 혁파하고 일을 맡았던 사람을 논죄(論罪)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설축(設築)하려 하였을 때 세 군문(軍門)에 나누어 맡겨 서로 통섭(統攝)이 되지 않았으므로 경리청을 설치하여 대신(大臣)으로 겸대(兼帶)하게 하였습니다. 아문(衙門)이 존엄(尊嚴)하지 못하면 세 군문을 호령(號令)할 수 없으니, 경리청의 명호(名號)는 혁파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봉료(俸料)를 판비(辦備)한다는 한 절목(節目)에 이르러서는 일을 맡은 사람이 잘 봉행(奉行)하지 못하여 원망을 불러들이고 재물을 소모시켰다고 사람들의 말이 퍼져 소란하므로 진실로 일체 정파(停罷)함이 마땅하나, 일을 맡았던 사람을 만약 갑자기 가두어 죄를 다스린다면 이미 흩어진 재물을 수습(收拾)할 수 없을 것이니, 본청(本廳)에서 기한을 정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경리청은 혁파하지 말고, 차인(差人)의 봉료(俸料)를 판비하는 일은 일체 정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차자(箚子) 가운데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출입(出入)이 일정하지 아니하여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이 여러 번 찾아가도 만나지 못해서 길 떠나는 기한을 여러 차례 늦추니, 청컨대, 신칙(申飭)을 더하도록 하고, 명함을 두고 부임(赴任)하도록 윤허하소서.’ 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만일 이 차자를 보면 반드시 경칙(警飭)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니, 따로 정식(定式)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수령의 하직은 뜻한 바가 있으나 여러 번 찾아가도 만나지 못하여 그 폐단이 매우 많으니, 삼사(三司)에서 만약 이 폐단을 알고서 다시 과실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이 명예를 구하는 것이 풍습(風習)을 이루어 응당 받아들여야 할 물건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으며, 심한 경우는 대동 전세(大同田稅)까지도 또한 제때에 봉납(捧納)하지 않고서 혹 관청(官廳)에서 방납(防納)하여 이로써 명예를 구하고 있어 민속(民俗)이 날로 변하고 있으나, 어사(御史)의 염문(廉問)하는 서계(書啓)에 포장(褒奬)하는 말은 도리어 이것을 앞세우니, 그 전해 내려온 폐단(弊端)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수령의 치적(治績)은 다만 칠사(七事)만 논하고, 그밖의 명예를 구하는 정사(政事)는 서계(書啓)에 거론(擧論)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양전 도감 당상(量田都監堂上)을 처음에 민진원(閔鎭遠)권상유(權尙游)로 차하(差下)하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세 도(道)를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였는데, 구간(苟簡)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를 또한 양전 당상(量田堂上)으로 차임(差任)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 무과(武科)에서 간계(奸計)를 쓰는 차비관(差備官)과 거자(擧子)의 일을 논열(論列)한 바가 있습니다. 근래에 강정(降定)178) 한 수군(水軍)의 무리를 시험에 나아가 참여할 수 있게 되면 탈하(頉下)179) 하도록 허락하셨으므로, 간사한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영상의 말에 의거하여 거자는 본죄(本罪) 외에 영구히 정거(停擧)시키고 차비관은 본죄 외에 영구히 벼슬을 임용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였는데,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옳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영상의 차자 가운데 또 논하기를, ‘경중(京中) 각사(各司)의 포폄(褒貶)이 다만 문구(文具)로 돌아가고, 엄중하게 밝히는 뜻이 전혀 없다.’고 하였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경중의 전곡 아문(錢穀衙門)이나 사송 아문(詞訟衙門)의 포폄(褒貶)의 등제(等第)는 한결같이 외방(外方)의 전례에 의거하여 출척(黜陟)하는 바탕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집일(兪集一)이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전례에 의거하여 모두 제목(題目)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김진상(金鎭商)이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이 전일에 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군위 현감(軍威縣監) 박태진(朴泰鎭)은 종일 술에 몹시 취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전도(顚倒)되고 망령되었으며, 총애하는 기생(妓生)과 마주 춤추기까지 하여 마침내 인근 고을에서 비웃음을 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2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양전(量田)

  • [註 175]
    도고(逃故) : 도망하거나 죽은 것.
  • [註 176]
    월등(越等) : 공무상 과오를 범한 경우 감봉 처분.
  • [註 177]
    사맹삭(四孟朔) : 춘(春)·하(夏)·추(秋)·동(冬)의 첫달.
  • [註 178]
    강정(降定) : 벼슬을 강등하여 군역(軍役)을 시키는 벌.
  • [註 179]
    탈하(頉下) : 사고로 처리함.

○世子引接大臣、備局諸宰。 右議政李健命曰: "頃日領相箚中, 論軍門變通事矣。 近來良役之弊, 旣不能猝變, 則救急之道, 惟有革罷一軍門, 以充逃故。 曾前欲罷禁衛營, 議論不一, 纔罷旋復, 此非造次可決之事。 邸下於侍湯之暇, 仰稟大朝, 俯詢諸臣, 從容講究, 以爲變通之地, 恐爲得宜。" 世子曰: "唯。" 吏曹判書權尙游曰: "近來守令要譽之弊, 誠如首相頃日之箚。 京各司應上納各樣米布, 或蠲或退, 以沽民譽, 未及收拾, 徑圖遞歸, 越等定式, 欲防此弊, 而曾前以四孟朔爲一等時, 則守令惕念擧行矣。 一自近年頒料之後, 越等者逐朔準等, 故人皆輕犯。 自今以後, 依前四孟朔計等, 則必有懲畏之道矣。" 昌集健命皆稱尙游言是, 世子不從, 仍令依前以月計等。 健命又言: "獻納李鳳翼上書, 以經理廳革罷, 任事人論罪爲請矣。 北漢設築時, 三軍門分授, 不相統攝, 故置經理廳, 以大臣兼帶矣。 衙門不尊, 則不可號令三軍門。 經理廳名號, 似難革罷, 而至於料辦一節, 任事之人不善奉行, 斂怨耗財, 人言喧藉。 固當一切停罷, 而任事人, 若遽囚治, 則已散之財, 無以收拾。 自本廳, 定限督捧, 恐或無妨。" 世子曰: "經理廳勿罷, 而差人料辦等事, 一倂停罷。" 健命又言領相箚中, 以臺諫出入無常, 下直守令, 屢往不遇, 行期屢退, 請加申飭, 許令留剌赴任, 而臺諫若見此箚, 必有警飭之道, 不必別爲定式矣。" 領議政金昌集曰: "守令下直, 意有所在, 而屢往不遇, 其弊不貲。 三司若知此弊, 勿復督過, 則好矣。" 世子曰: "唯。" 昌集曰: "近來守令, 要譽成習, 應捧之物, 一切不捧, 甚至大同田稅, 亦不以時捧納, 或自官防納, 以此沽名, 而民俗日渝, 御史廉問書啓褒奬之語, 反以此爲先, 其流之弊不少。 今後守令治績, 只論七事, 其他干譽之政, 俾勿擧論於書啓, 實爲合宜。" 世子可之。 健命言: "量田都監堂上, 始以閔鎭遠權尙游差下, 而二人分管三道, 未免苟簡。 請戶曹判書宋相琦, 亦差量田堂上。" 世子許之。 健命曰: "領相箚中, 以武科用情差備官、擧子事, 有所論列矣。 近來降定水軍之類, 許令赴試, 得參則頉下, 故奸弊難防。 依領相言, 擧子本罪外, 永爲停擧, 差備官, 本罪外, 永勿付職, 誠爲合當矣。" 入侍諸臣, 皆以爲是, 世子可之。 健命又言: "領相箚中, 又論: ‘京各司褒貶, 只歸文具, 殊無嚴明之意’ 云。 自今以後, 京中錢穀、詞訟衙門褒貶等第, 一依外方例, 以爲黜陟之地宜矣。" 工曹判書兪集一曰: "依外方例, 竝爲題目似好矣。" 世子可之。 持平金鎭商申前達, 世子不從。 正言魚有龍申前達, 又言: "軍威縣監朴泰鎭, 終日酩酊, 處事顚妄, 至與嬖妓對舞, 遂爲隣邑笑囮, 請罷職。" 世子不從。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2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양전(量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