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의 논의에 따라 탕춘대에 축성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다
탕춘대(蕩春臺)에 성(城)을 쌓는 일을 정신(廷臣)들에게 명하여 며칠에 걸쳐 헌의(獻議)하도록 하였는데, 이날 3품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궐중(闕中)에 나아갔다. 대사성(大司成) 홍치중(洪致中)이 의논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이미 완축(完築)하였고 양식의 저장도 대략 갖추었으니, 하루 아침에 폐기(廢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한 군문(軍門)에 소속시켜 그들로 하여금 구관(句管)하여 수즙(修葺)하게 한다면, 도성(都城)의 사민(士民)이 난리에 임하여 진병(進兵)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경리(經理)하는 관청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정파(停罷)하여 국력(國力)을 쉬게 하고, 백성의 곤고(困苦)함을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사직(司直) 어유귀(魚有龜)는 말하기를,
"북한(北漢)은 천험(天險)으로서 난리에 임하여 의뢰[依歸]할 수 있는 장소가 될만하고,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대개 군향(軍餉)을 저장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여 위급한 경우에 믿을 수 있을 것이므로 점차 쌓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사과(司果) 홍계적(洪啓迪)과 전(前) 병사(兵使) 이수민(李壽民) 등 15인은 모두 말하기를,
"이것을 쌓는 것은 불편(不便)하니, 빨리 정파(停罷)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공조 참의(工曹參議) 유숭(兪崇)과 전(前) 병사(兵使) 이한규(李漢珪) 등 4인은 말하기를,
"계속해서 탕춘대를 쌓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병오090) 에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회의(會議)하였는데, 사직(司直)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도성(都城)과 탕춘대(蕩春臺) 두 곳은 결단코 아울러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만약 탕춘대에 성을 쌓으려면 도성(都城)을 버려야 되고, 만약 도성(都城)을 지키려면 탕춘대에 성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楺)는 말하기를,
"반드시 지킬 수 있겠다고 보장하는 것으로는 도성을 수축(修築)하는 것만 못한데, 성상께서 매번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신 까닭에 감히 억지로 다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출수(出狩)091) 하여 온 성이 황폐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깝게 탕춘대를 쌓아 위급한 때에 임하여 입보(入保)092) 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이나, 탕춘대를 버리고서 북한(北漢)의 고한(孤寒)한 땅에 나아가는 것은 신의 보잘것 없는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잇달아 세 성(城)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고금(古今)에 들어보지 못한 말이니, 신이 본 바로는 옳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평양(平壤)에는 옛날에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이 있어 서로 연접(連接)한 모양이 호로병(葫蘆甁)의 모양과 같았으나, 옛사람은 꺼리는 바가 없었는데, 더욱이 이 성은 평양성(平壤城)처럼 평평하고 넓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반드시 도성을 지킬 것인지 지키지 않을 것인지를 먼저 정한 후에야 탕춘대를 쌓을 것인지 쌓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대계(大計)로 삼는다면, 북한 산성은 좁고 험하여 도성 백성들을 수용(受容)할 수 없으니, 그 형편상 장차 종사(宗社)는 북한 산성에 들어가더라도 자녀(子女)와 옥백(玉帛)093) 은 모두 도성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탕춘대를 쌓지 않는다면 두 성 사이가 반드시 다투어야 할 곳이 될 것인데, 만약 적(賊)이 탕춘대를 먼저 점거하고 북한산에서 엿본다면 도성이 위태로와질 것이고, 도성 백성을 몰아서 북한 산성을 지키게 한다면 북한 산성이 위태로와질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탕춘대가 북한 산성보다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역사(役事)는 이미 해를 넘겼는데, 애초에 반복해서 상론(商論)하였으나 한 가지로 계획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공역(功役)과 비용이 반을 넘은 후에야 비로소 논란하여 비난하고 반박하며 중도에 정지하고자 하니, 국사(國事)가 또한 전도(顚倒)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훈련 도정(訓鍊都正) 이우항(李宇恒)은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은 안의 지세(地勢)가 바깥보다 도리어 험하므로 이것이 이미 지리적으로 마땅함을 잃은 것이고, 한 성의 안에 말과 군사를 수용해 둘 곳이 없으니 이것이 또 장점(長點)과 단점(短點)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탕춘대는 두 성(城)의 사이에 있는데다가 지세(地勢)가 낮아서 쉽사리 적(敵)을 받게 되고 강도(江都)는 바다를 건너야 하는 근심이 있으며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근심이 있으므로, 모두 도성으로 보장(保障)을 삼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는 말하기를,
"탕춘대는 성(城)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산기슭이 서로 어긋나는 곳에 나아가 대략 양마장(羊馬墻)094) 의 제도를 본떠서 작은 성을 설축(設築)하고 상평창(常平倉) 등의 여러 창고(倉庫)를 옮겨 설치하여 북한 산성(北漢山城)이 위급할 때에 드는 비용을 공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택현(沈宅賢)·호조 참판(戶曹參判) 김덕기(金德基)·호군(護軍) 이홍조(李弘肇)는 모두 말하기를,
"북한산성은 버릴 수가 없으니 탕춘대는 쌓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 호군(護軍) 유성추(柳星樞)·윤헌주(尹憲柱)·장붕익(張鵬翼) 등은 도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우항(李宇恒)의 의논과 대략 같았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 송상기(宋相琦)·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부사직(副司直) 허윤(許玧)·호군 신한장(申漢章)·조이중(趙爾重)은 김유(金楺)의 의논과 대략 같았다. 무신095) 에는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회의(會議)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 이택(李澤)은 오로지 도성에만 마음을 쓰도록 청하였고, 부교리(副校理) 박사익(朴師益)·수찬(修撰) 김상옥(金相玉)·사간(司諫) 윤석래(尹錫來)·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 등은 모두 말하기를,
"탕춘대는 쌓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正言) 신절(申晢)은 말하기를,
"빨리 경리청(經理廳)을 혁파(革罷)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은 말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役事)는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령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인 창성(昌城)의 완항(緩項)과 선천(宣川)의 좌현(左峴) 등과 같은 곳에는 모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경보(警報)에만 마음을 쓰게 하되, 과연 그 경보가 병자년096) 과 같이 허술하지 않다면, 먼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달(到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헌의(獻議)하기를 마쳤으므로 묘당(廟堂)에서 마땅히 품처(稟處)해야 하는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조하기(曹夏奇)를 구원한 일로 인하여 발론(發論)한 대관(臺官) 박필정(朴弼正)에게 침저(侵詆)를 받아 인입(引入)한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다른 대신(大臣)들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수상(首相)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려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후 4월 1일 계묘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비로소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우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모두 말하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이 비록 만전(萬全)이 못된다고는 하나, 또한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할 수 있는데, 이미 쌓은 것을 도로 버린다면, 의거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우선 탕춘대의 역사를 정지하고,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이 소식(蘇息)되기를 조금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여 도모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북한산성을 쌓은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어서 대계(大計)가 이미 정해졌는데 곧 또 이를 버리는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으니,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탕춘대의 역사에 이르러서는 여러 신하들이 헌의(獻議)하면서 대부분 그것이 불편(不便)하여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성 쌓는 역사(役事)가 마침내 정지되었으나, 대개 형편(形便)이 나은 것은 탕춘대가 제일이었다. 이미 도성과 이어져 있어서 서로 표리(表裏)가 될 것이니, 먼저 탕춘대를 쌓았다면 도성은 믿을 바가 있게 되어 더욱 견고(堅固)해질 것이고, 북한산성은 비록 쌓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적(賊)이 웅거할 수가 없으므로 저절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유(李濡)가 계획한 것은 선후(先後)를 잃어 갑자기 별성(別城)을 쌓아서 하나의 별성이 되었으나, 도성(都城)과 중간이 단절되어 진퇴(進退)에 의뢰할 바가 없게 되었다. 곧 계책(計策)을 잘못 썼음을 깨달았으나, 마침내 재력(財力)을 이미 탕진하게 되었고, 중의(衆議)가 떼 지어 일어난 후에 다시 탕춘대를 경영(經營)하려고 하니, 세 성이 가로로 연접(連接)한다는 비난만 초래(招來)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북한산성을 쌓은 것이 실책(失策)임을 구명(究明)하지 않고, 다만 그 일의 역사(役事)를 이미 마쳤다 하여 아직 그대로 둔 채 모두 힘껏 탕춘대의 결점을 들어 비난하면서 오로지 큰 역사가 정파(停罷)된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나은 곳을 가리는 방도를 살피지 못하였으니, 식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6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 [註 090]병오 : 3일.
- [註 091]
출수(出狩) : 파천(播遷)의 뜻.- [註 092]
입보(入保) : 보(堡) 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 [註 093]
옥백(玉帛) : 옥(玉)과 비단.- [註 094]
○以蕩春臺築城事, 命廷臣, 分日獻議。 是日, 三品諸臣, 皆詣闕中。 大司成洪致中議以爲: "北漢旣已完築, 糧儲略備, 似難一朝廢棄。 屬之一軍門, 使之句管修葺, 則足爲都城士民臨亂進兵之所, 而至於蕩春之築, 經理之廳, 不可不劃卽停罷, 以紓國力, 以解民困。" 司直魚有龜以爲: "北漢天險, 足爲臨亂依歸之所。 至於蕩春築城, 蓋爲儲軍餉而備不虞, 則表裏相依, 緩急可恃, 漸次完築, 恐爲得宜。" 司果洪啓迪、前兵使李壽民等十五人皆言: "築之不便, 亟宜停罷。" 工曹參議兪崇、前兵使李漢珪等四人以爲: "繼築蕩春, 有不可已。" 丙午二品以上會議。 司直閔鎭遠以爲: "都城、蕩春兩處, 決不可竝守。 若城蕩春, 則都城可棄, 若守都城, 則蕩春不必築。" 吏曹參判金楺以爲: "保必可守者, 莫如修築都城, 而聖上每以爲難守, 有不敢强爭。 與其倉卒出狩, 滿城糜爛, 無寧所築蕩春, 以爲臨急入保之所。 捨蕩春而就北漢孤寒之地, 非臣賤慮之所反及至於連築三城, 古今未聞之說。 以臣所覩, 有不然者。 平壤舊有內城、中城、外城, 相連如胡蘆形, 而古人無所忌焉。 況玆城不至如平壤之平闊乎? 今必先定都城之守、不守, 然後蕩春之築、不築可決矣。 倘以北漢爲大計, 則北漢狹隘, 無以容都民, 其勢將宗社入北漢, 子女、玉帛, 皆在都城, 而不築蕩春, 則兩城之間, 當爲必爭之地。 賊若先據蕩春, 從北山以窺, 則都城傾矣, 驅都民以臨北漢, 則北漢危矣。 由玆而言, 則蕩春之重於北漢, 可見矣。 且斯役之擧, 旣已經歲矣。 初不能反覆商論, 定計于一, 到今功費過半之後, 始欲駁難而中輟, 則國事不亦顚倒乎?" 訓鍊都正李宇恒以爲: "北漢內勢, 反險於外, 此已地理之失宜者, 而一城之內, 無馬軍容置之所, 此又長短之技不具者也。 蕩春處於兩城之間, 地勢低下, 易於受敵。 江都有越海之憂, 南漢有孤絶之憂, 俱不若都城之爲保障也。" 吏曹判書權尙游以爲: "蕩春不必築城。 就山麓交互處, 略倣羊馬墻之制, 設築小城, 而移置常平等諸庫舍, 以給北漢緩急之需, 恐爲得宜。" 江華留守沈宅賢、戶曹參判金德基、護軍李弘肇皆言: "北漢不可棄, 蕩春不可築。" 右參贊申銋、訓鍊大將李弘述、護軍柳星樞ㆍ尹憲柱ㆍ張鵬翼等, 主都城與李宇恒議略同, 工曹判書宋相琦、兵曹判書趙道彬、副司直許玧、護軍申漢章ㆍ趙爾重與金楺議略同。 戊申三司諸臣會議。 副提學李澤請專意都城, 副校理朴師益、修撰金相玉、司諫尹錫來、正言魚有龍等皆言: "蕩春不可築。" 正言申晢言: "亟宜革罷經理廳。" 副校理金雲澤言: "宜停築役。 就賊路要害處, 如昌城之緩項、宣川之左峴等處, 皆設關置帥, 使之專意報警, 果其警報不如丙子之虛踈, 則足以先期得達於南漢。" 諸臣獻議旣訖, 廟堂當稟裁, 而領議政金昌集, 因箚救曺夏奇事, 爲發論臺官朴弼正所侵詆, 引入不出, 他大臣亦多不進。 右議政李健命上箚請待首相出仕擧行, 上可之。 是後四月癸卯, 諸大臣始集議朝堂。 領議政金昌集、判府事李頣命、右議政李健命等, 皆以爲: "北漢雖曰非萬全, 亦可爲不虞之備。 旣築還棄, 恐無所據。 姑停蕩春之役, 稍待饑疫之蘇息, 徐議圖之, 恐合事宜。" 上下敎曰: "北漢之築, 意固有在。 大計旣定, 旋又棄之, 有同兒戲, 寧有是哉? 至於蕩春之役, 諸臣獻議, 多言其不便, 停止爲宜。" 於是, 城事遂寢。 蓋形便之勝, 蕩春爲最。 旣連都城, 相爲表裏, 先築蕩春, 則都城有所恃而益固, 北漢雖無築, 賊不得據, 自可爲我有, 而李濡之爲謀也, 失於先後, 遽築別城, 爲一別城, 與都城中絶, 進退無所據。 旋覺其失計, 遂於財力旣殫, 衆議叢起之後, 更欲營蕩春, 以致橫連三城之譏。 衆不究始築北漢之失計, 只以其事役之旣畢, 而姑且仍存, 竝力詆蕩春, 惟幸大役之寢罷, 而不審於擇勝之道, 識者惜之。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6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 [註 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