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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1월 27일 경자 1번째기사 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기로소 입록과 관련해서 선생안의 봉안처 수리 새 책자의 마련 등을 허락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일은 유전(流傳)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실록(實錄)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성명(成命)을 정지하시기에 이르렀으므로 왕세자(王世子)께서 억울(抑鬱)해 하시는 마음과 군하(群下)의 결망(缺望)된 마음이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두 왕자(王子)와 여러 종신(宗臣)들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다시 거행하도록 허락하셨으니, 신민(臣民)의 경행(慶幸)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영장(靈長)하신 성수(聖壽)에 지미(趾美)063) 의 성사(盛事)는 진실로 3백 년 이래로 없던 성대한 일이니, 펼쳐서 크게 경축(慶祝)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 일은 비단 우리 조정(朝廷)에서 3백 년 이래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고(前古)의 사적(史籍)에도 없던 일이니, 기뻐하는 마음에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다만 절목(節目) 사이에 상고하여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나, 기로소(耆老所)의 선생안(先生案)을 봉안(奉安)할 곳을 먼저 수리(修理)하고, 책자(冊子)를 새로 만들어 정교하게 장황(粧潢)064) 을 가하고, 특별히 길일(吉日)을 가려서 승지(承旨)와 본소(本所)의 당상관(堂上官) 1원으로 하여금 받들어 나아가 바치게 한 다음 마땅히 어필(御筆)로 존호(尊號)를 쓰셔야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몇년 몇월 며칠에 들어가셨다고 쓰셔야 하는데, 성상께서 바야흐로 눈병을 앓고 계셔서 친히 쓰시기가 어려울 듯하니, 대신 쓸 사람도 잘 쓰는 조사(朝士)로 계하(啓下)하소서. 그리고 이미 쓰신 후에는 의장(儀仗)을 갖추어 본소(本所)에 봉안(奉安)하시고, 또 길일(吉日)을 가려서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해야 합니다. 과거(科擧)를 베푸는 것이 또 다음 차례의 일인데, 무릇 경과(慶科)는 혹 증광시(增廣試)를 베풀거나 혹은 별시(別試)를 베풀어야 할 것이니, 이번에는 무슨 과거로써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진연(進宴)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만둘 수가 없으니, 또한 길일을 가려서 다시 계품(啓稟)하게 하소서.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주는 것은 진연(進宴)하기 전에 마땅히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선생안(先生案)은 태조조(太祖朝)에 어필(御筆)로 친히 제명(題名)하신 원본(原本)인데, 이미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었고, 그후 추후로 써서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지금 새로 만드는 책자(冊子)에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묘호(廟號)를 쓰고 그 아래에 삼가 존호(尊號)를 쓰신다면 어찌 우리 조정의 아름다운 사적(史蹟)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는 한때의 일이 아니므로 수장(首張)에 잇따라 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삼가 태조(太祖)의 존호(尊號)를 쓰고, 제2장에 당저(當宁)065) 의 존호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봉안(奉安)하는 곳을 수리하는 일과 새 책에 쓰는 일 및 의장(儀仗)을 갖추어 봉안하는 일은 진실로 마땅하나, 나의 눈병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친히 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춘궁(春宮)께서 대신 쓰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는데, 민진후가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는 마땅히 성상 앞에서 쓰셔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또,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는 등의 일도 거행하도록 하고, 과거(科擧)는 별과(別科)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즉위(即位)하신 지 30년이 되었다 하여 경사(慶事)를 기뻐하면서도 오히려 증광시(增廣試)를 베풀었는데, 더욱이 오늘날의 경사는 그때에 비하여 중대(重大)할 뿐이겠습니까? 별시(別試)는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하고, 민진후도 잇따라 이를 말하자, 임금이 증광시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나, 백성들의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이 이와 같은데,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겠는가? 또 안질(眼疾)을 앓아 고통스럽고 물건을 볼 수도 없는데, 비록 잔치를 베푼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다만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서로(西路)의 백성들이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으로 시달리는 가운데 또 객사(客使)를 만나게 되어 보존(保存)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진청(賑廳)의 곡식 5천석을 관서(關西)에 획급(劃給)하여 고휼(顧恤)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기로소(耆老所)에는 으레 절일(節日)의 식물(食物)이 있고 매달 약값·토세(土稅)·어선(魚鮮)을 나누어 쓰는 규례(規例)가 있는데, 이는 외람되고 잗달아서 감히 진상(進上)하지 못하겠으나 낙죽(酪粥)·전약(煎藥)·제호탕(醍醐湯)은 마땅히 봉진(封進)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구휼(救恤) / 재정-진상(進上)

  • [註 063]
    지미(趾美) : 《시경(詩經)》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를 인용한 말로서, 본래 이 시는 임금의 집안에 훌륭한 자손들이 많음을 기린 것임.
  • [註 064]
    장황(粧潢) : 종이나 비단으로 발라서 꾸미어 만듬.
  • [註 065]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庚子/領議政金昌集、禮曹判書閔鎭厚請對, 上召見。 昌集曰: "太祖大王入耆所之事, 流傳已久, 而以實錄不載之故, 至寢成命, 王世子抑鬱之懷、群下缺望之情極矣。 玆因兩王子及諸宗臣上疏, 復許擧行, 臣民慶幸, 當復如何? 聖算靈長, 趾美盛事, 此實三百年來所未有之盛擧。 鋪張稱慶之擧, 斷不可已也。" 鎭厚曰: "玆事非但我朝三百年所未覩, 前古史籍亦未有之, 喜忭之心, 曷有其極? 但節目之間, 無可考據, 耆老所先生案奉安處, 爲先修理, 新造冊子, 精加粧䌙, 另擇吉日, 承旨及本所堂上一員, 奉詣上進, 當以御筆, 書以尊號。 殿下某年月日入云云, 而自上方有眼患, 似難親寫, 代書之人, 亦以善寫朝士啓下。 旣寫之後, 具儀代奉安於本所, 又擇日告廟陳賀, 而設科又是次第事也。 凡慶科, 或設增廣, 或設別試, 今番以何科擧行乎? 至於進宴, 尤不可已, 亦當擇日更稟。 耆老諸臣錫宴, 當行於進宴前乎?" 昌集曰: "先生案, 太祖朝御筆親題之本, 旣失於兵燹, 其後追書奉安矣。 今玆新造冊子, 則書太祖大王廟號, 其下謹書尊號, 則豈不爲我朝美蹟乎?" 鎭厚曰: "此非一時事, 似不當連書首張。 謹書太祖尊號, 第二張書當宁尊號, 恐爲得宜。" 上曰: "然矣。 奉安處修理及書於新冊、具儀仗奉安事, 固爲合宜, 而予之眼患如此, 豈能親寫耶?" 昌集曰: "若春宮代寫, 則豈非美事? 而自下不敢請耳。" 上曰: "當使春宮代寫耳。" 鎭厚曰: "世子當於上前書之耶?" 上曰: "然矣。 且告廟陳賀等事, 亦令擧行, 而科擧則設別科宜矣。" 昌集曰: "年前以卽位三十年稱慶, 猶設增廣。 況今日之慶, 較重於其時乎? 別試似太輕矣。" 鎭厚又繼言, 上命設增廣。 昌集又請進宴, 上曰: "予入耆老所, 誠是好事, 然生民之飢癘如此, 何心受宴? 眼患且苦, 不能視物, 雖設宴有何益乎? 只行耆老諸臣錫宴可也。" 昌集又言: "西路生民飢癘之中, 又値客使, 無以保存。 請以賑廳殼五千石, 劃給關西, 以示顧恤之意。" 上從之。 昌集又言: "耆所, 例有節日食物, 逐朔藥價, 土稅、魚鮮分用之規。 此則猥屑不敢進上, 而至於酪粥、煎藥、醍糊湯, 似當封進。"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5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구휼(救恤) / 재정-진상(進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