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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 9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약방에서 입진하다. 진후를 마치고 우의정 이건명과 정사를 논의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도 함께 들어왔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민진원(閔鎭遠)전주(全州)건지산(乾止山)을 진휼청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었는데,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장계(狀啓)하기를, ‘옛날부터 금양(禁養)429) 하는 지역은 절수(折受)430) 할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도로 정지시키기를 극력 청하였습니다. 그 뒤에 민진원이 다시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여 그전처럼 절수하기를 청하였고, 홍석보도 지금 또 상소하여 다투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 산은 바로 풍패(豊沛)431) 의 주맥(主脈)으로 북방(北方)을 가리고 있는데, 전주(全州)진전(眞殿)432) 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영부(營府)433) 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저절로 대도회(大都會)가 되었으니, 이 산은 금양(禁養)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휼청에서 그것의 절수를 청하는 것은 그 의도가 산의 높은 곳은 금지시킬 만하지만, 평지(平地)는 경작을 금지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진휼청의 저축을 죄다 써버렸으므로, 진휼청에 소속시켜 세금을 거둬 들이는 바탕으로 삼는다면 그 곡식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건지산(乾止山)은 본고을의 사용(私用)으로 삼는 데 불과하고, 그 평지의 개간할 만한 곳에는 간사한 백성으로서 함부로 경작하는 자가 영원히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 하니, 비록 진휼청에 돌리지 않더라도 귀속시키는 곳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만약 타량(打量)하여 경계를 정해서 경작할 만한 곳은 원장(元帳)에서 떼어내어 호조(戶曹)에다 붙이되, 영남(嶺南)의 화전(火田) 사례(事例)에 의거한다면, 민전(民田)에 비하여 그 세금을 갑절로 징수할 수 있으니, 백성들이 간혹 세금이 많은 것을 싫어하여 묵히고 버려두는 데 이르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진달한 바가 참으로 옳다. 금지시킬 만한 곳은 금지시키고, 금지시키기에 마땅하지 않은 곳은 경작하도록 허락하되, 지부(地府)에 돌려서 영남(嶺南)의 화전(火田) 사례에 의거하여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지금 우려할 만한 단서는 많고 인재(人才)는 모자라서 위저(位著)434) 가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대신(大臣)의 거취(去就)와 같은 데 이르러서는 다른 일과 저절로 다르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비록 직사(職事)가 없다 하나, 만약 경련(京輦)에 있으면 국가에서 의지하고 믿을 수 있으며, 온갖 업무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는 별로 편안치 못한 단서가 없는데, 오래도록 도성(都城) 밖에 살고 있으며,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는 정승에 임명[爰立]된 지 오래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도성 밖으로 나가 그대로 고향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서 끝까지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이 두 대신에게 돈소(敦召)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 판중추부사(徐判中樞府事)는 원래 대단하게 인혐(引嫌)할 일도 없었으며, 조 판중추부사(趙判中樞府事) 또한 대관(臺官)의 말로 인하여 물러갈 뜻을 결정하고 끝내 들어 오지 않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근래에 부유한 백성들의 이식(利殖)을 늘리는 방법이 갑리(甲利)에 이르러서 지극합니다. 이식을 늘리는 것이 한정과 절제가 없어 더러 달마다 그 이식(利殖)을 받아들여 한 해가 되지 않아 갑절에 이르게 되는데, 심지어 곡식이 귀(貴)할 때에는 한 말[斗]의 쌀이 돈으로 환산하여 한 냥(兩)인데, 가을에 이르러 두 냥을 돌려받아 쌀로 계산하면 거의 5, 6갑절이 되니, 소민(小民)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제도를 정하여 관화(官貨)인 경우에는 은전(銀錢)을 논할 것 없이 경외(京外)의 각 아문(衙門)에서 일체로 환상(還上)의 예(例)를 따라 10분의 1로 이식(利殖)을 늘리게 하고, 민간(民間)의 경우에 미곡(米穀)은 10분의 5를 적용하고, 은전(銀錢)과 포(布)는 10분의 2를 적용하여 이식을 늘리도록 하소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관리(官吏)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435) 로 논죄(論罪)하고 사가(私家)는 장(杖) 1백 대의 율(律)을 시행하게 하여 갚을 자로 하여금 관(官)에 나아가 스스로 신고하도록 한다면, 가난한 백성이 거의 지탱하며 보전할 수 있을 것이고, 법령(法令)은 균등하고 공평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인사-관리(管理) / 금융-식리(殖利)

  • [註 429]
    금양(禁養) : 특정 지역의 산림에 수목의 벌채, 분묘의 설치, 농지의 개간, 토석(土石)의 채취 등을 금하고 수목 특히 소나무의 재식(栽植)과 육성(育成)에 힘쓰는 일.
  • [註 430]
    절수(折受) : 임금에게서 자기 몫으로 땅이나 결세(結稅)를 떼어 받음.
  • [註 431]
    풍패(豊沛) :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군사를 일으킨 곳으로, 천자(天子)의 자리에 즉위하자 그 곳 백성의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인하여 임금의 고향으로 가리키게 되었음. 여기서는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의 고향을 말함.
  • [註 432]
    진전(眞殿) : 경기전(慶基殿)을 가리킴.
  • [註 433]
    영부(營府) : 감영(監營)과 부(府).
  • [註 434]
    위저(位著) : 군신(群臣)의 열위(列位).
  • [註 435]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 임금의 교지(敎旨)와 세자(世子)의 영지(令旨)를 위반하는 자를 다스리는 율.

○庚寅/藥房入診, 右議政李健命同入。 診候畢, 健命言: "頃者賑廳堂上閔鎭遠, 以全州 乾止山, 請屬賑廳, 全羅監司洪錫輔狀奏以爲: ‘自古禁養之地, 不可折受’, 力請還寢。 厥後鎭遠復陳白於筵中, 請依前折受, 而錫輔今又陳疏爭之矣。 大抵此山, 乃是豐沛主脈, 而蔽遮北方。 全州不但眞殿所在, 營府人民之居, 自是大都會, 則此山不可不禁養矣。 然今自賑廳, 請其折受者, 其意以爲山之高處則可禁, 而平地則不必禁耕。 近來賑儲蕩然, 屬之賑廳, 以爲收稅之地, 則其在聚穀之道, 不爲無益故也。 卽今乾止山, 不過爲本官之私用, 而其平地可墾處, 奸民冒耕者, 永作己物, 雖不歸賑廳, 不可無屬處。 今若打量定界, 可耕處出付元帳付, 自戶曹依嶺南火田例, 比民田倍徵其稅, 則民或厭其稅重, 至於陳棄, 亦無所害矣。" 上曰: "大臣所達誠是。 可禁處禁之, 不當禁處許耕, 而歸之地府, 依嶺南火田例, 收稅宜矣。" 健命又曰: "卽今憂虞多端, 人才眇然, 而位著不備。 至如大臣去就, 與他自別。 原任大臣, 雖無職事, 若在京輦, 則國家可以倚仗, 而庶務亦可咨詢矣。 判府事徐宗泰, 別無難安之端, 久處城外, 判府事趙泰采, 爰立未久, 去位出城, 仍住鄕庄, 終不上來。 此兩大臣, 宜有敦召之擧矣。" 上曰: "徐判府事, 元無大段引嫌之事, 趙判府事, 又因臺言, 決意退去, 終不入來, 豈不過乎? 大臣所達是矣。" 健命又言: "近來富民生殖之道, 至於甲利而極矣。 生殖無有限節, 或有月捧其殖, 歲未周而至倍者, 至於穀貴之時, 一斗米折錢一兩, 至秋索二兩。 以米計之, 殆過五六倍, 小民安得不困耶? 自今定制, 官貨則勿論銀錢, 京外各衙門一從還上例, 什一生殖, 民間則米穀則用什五, 銀錢、布用什二生殖, 如有違越者, 官吏則論以制書有違, 私家則施以杖一百之律, 而使報償者, 詣官自告, 則貧民庶可支保, 而法令均平矣。"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인사-관리(管理) / 금융-식리(殖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