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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윤8월 3일 무신 1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정언 유복명이 상소하여, 경리청의 요를 판비하는 폐단 등 시폐 20여 조목을 아뢰다

정언(正言) 유복명(柳復明)이 상서(上書)하였는데, 이르기를,

"요즈음 삼사(三司)에서 사주(使嗾)를 받았느니 원한을 푼다느니 하는 말은 크게 뒷날의 한없는 폐단에 관계됩니다. 피차(彼此)가 추잡하게 헐뜯은 것이 전후(前後)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일찍이 이러한 말로 상대편에게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처음으로 발설하여 대각(臺閣)에서 한 마디 하면 사주받았다고 말하고, 옥당(玉堂)에서 한 마디하면 원한을 갚는다고 하며, 기타 서로 헐뜯는 습관과 도로 꾸짖는 기풍이 또 따라서 잇따라 일어나니, 이제부터 삼사(三司)에 있는 사람들이 혐오(嫌惡)하고 원망하는 지목을 두려워하여 피하려고 해서 모두가 앞으로는 입을 닫고 있어야 할 뿐입니다. 선진(先進)과 후진(後進)이 유인(誘引)하여 농락(籠絡)한다는 말과 같은 것은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곧바로 진달하지 않고 이러한 애매한 말을 만들어 의심하고 어지럽히는 곳으로 몰아넣으려 합니까?"

하고, 【이는 조관빈(趙觀彬) 등의 일을 지목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며칠 전 이상성(李相成)이 상서하여 성진령(成震齡)을 배척할 때에 그가 추잡하게 욕을 한 것은 곧 한 편의 탄핵하는 글이었으며, 심지어 비오는 밤에 구걸(求乞) 하였다고 말하여 마치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밥을 구걸하다가 얻지 못하자 도리어 화를 낸 것처럼 은연중 원한을 갚으려는 투(套)로 돌리니 이미 지극히 해괴(駭怪)합니다. 추조(秋曹)342) 에 뇌물을 주고 청탁하였다는 지척(指斥)에 이르러서는 분변하여 드러낼 것이 없으면서도 도리어 혼돈(混沌)시켜 위협하는 말로써 함께 말한 자를 꾸짖으려고 하였고, 또 흉당(凶黨)의 남은 부류라는 죄목(罪目)으로써 공연히 억지로 덮어씌워 오로지 남의 오멸(汚衊)을 일삼고 있으니, 논박받은 자가 도리어 말한자를 공격하는 경우가 이와 같이 참혹하고 각박함은 전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견책(譴責)하는 형벌을 실시하여 다른 사람을 면려(勉勵)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요즈음의 시폐(時弊) 20여 조목을 언급하였었는데, 그 첫째는 경리청(經理廳)의 요(料)를 판비(辦備)하는 폐단에 대해 이르기를,

"근본 없는 사내가 1만 냥(兩)에 가까운 은화(銀貨)를 청하여 얻고서 아직까지 수납(收納)하지 않았고, 무뢰(無賴)한 사람이 9백 포(包)의 미곡(米穀)을 맡았다가 모두 화소(花消)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더러 덕통미(德筒米) 4천 석(石)을 주었는데 태반(太半)도 징수하지 않았고, 더러 환곡(還穀)을 사대부(士大夫)에게 널리 지급하여 그 수량이 과다(過多)해졌습니다. 연분(年分)과 호적(戶籍)에 쓰이는 지지(紙地)의 값과 전세(田稅)·대동(大同)의 선운가(船運價)는 얼마나 잗단 일인데, 당당한 국가에서 소민(小民)들의 조그마한 이익을 빼앗는 데 이르러서는 그들과 다투어 겨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있는 중의 무리[僧徒]는 바로 모두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이 모인 소굴인데, 팔도(八道)에 두루 돌아다니며 폐혜를 일으키는 일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공물연조(貢物年條)343) 를 싼값으로 미리 사들이는데 그것을 싸게 사들이는 때를 당하여 중간에서 강제로 빼앗으니, 그 폐해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빚으로 주는 재물도 갑리(甲利)344) 로 서울과 지방에 두루 지급하였다가, 징수(徵收)를 독촉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전토(田土)의 문권(文券)도 빼앗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도의 의승(義僧)345) 이 많은 경우에는 3백 50명에 이르는데, 번(番)을 면제해 준 돈을 징수하고 있습니다. 누암 별장(樓巖別將)은 명목 없는 선세(船稅)를 바치게 하였고, 양서(兩西)346)교동(喬桐)에서는 강제로 지지(紙地)를 방납(防納)347) 하도록 정하였습니다. 기타 공명첩(空名帖)348) 과 품사는 것을 방지하는 일들이 더러 잇따라 소란스러움이 많기도 하며, 더러 자질구레한 데 관계되기도 합니다. 대저 일을 맡은 무리들이 빙자하여 침학(侵虐)하는데, 비록 그들이 빚을 주어 늘리거나 후한 이익을 널리 차지한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공가(公家)에 돌리지 아니하여 절반이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가난하던 자가 오늘날에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으며, 옛날에 집이 없던 자가 지금은 큰 집을 가졌으니, 통탄(痛歎)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둘째는 탕춘대(蕩春臺)에다 성(城)을 쌓는 폐단인데, 이르기를,

"역사(役事)에 소용되는 식량이 비록 쓰기에 넉넉하다고 말하나, 이것이 어찌 공중에서 떨어진 물건이겠습니까? 기내(畿內) 또한 진황지(陳荒地)가 많은데 이것을 어찌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가을철의 일이 바야흐로 바쁘고 일조(日照) 시간은 짧은데 어찌 봄철의 일조 시간이 긴 때와 같겠습니까? 양군문(兩軍門)349) 에서 청하여 빌린 포(布)가 4백 동(同)에 이르니, 필경에는 도로 갚아야 할 터인데, 또한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지부(地部)350) 에서는 경상비용(經常費用)의 늘 지탱하기 어려움을 걱정해야 하고, 기조(騎曹)351) 에서는 전포(錢布)가 아주 부족하며, 진휼청(賑恤廳)에서는 원곡(元穀)이 11만 석(石)인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겨우 2만 석에 이르고 있습니다. 태창(太倉)352) 에서는 모든 관리들의 녹봉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도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군자감(軍資監)에서는 해마다 누적된 포흠(逋欠)이 역시 1만 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에서는 행용(行用)하는 포(布)가 겨우 수백(數百) 동(同)인데, 1백 50동을 빌려 주고 그 나머지는 거의 없습니다. 백성들의 재력이 곤궁하고 소모된 것이 저와 같고, 국가에서의 저축도 다 떨어진 것이 이와 같은데, 이러한 시기가 어떻게 성(城) 쌓는 역사를 해야 할 때이겠습니까?"

하고, 세째 군영(軍營)을 옮기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을 서울 안에 설치한 전배(前輩)들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옮겨서 세우는 것이 아무리 편리하고 물력(物力)이 아무리 넉넉하다 하더라도 일을 도모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염려해야 합니다. 더구나 편리하다 편리하지 않다는 의논이 벌써 갈래가 지고 간섭하여 제지하는 일이 도리어 많은데, 지금 어떻게 다시 깊이 헤아려보지 않고 반드시 경솔하게 옮기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네 번째 돈 만드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대체로 전화(錢貨)가 행해지면서부터 풍속이 날로 경박해지고 물가가 날마다 뛰어올라 심지어 나물 캐는 할미와 소금 굽는 아이도 모두 곡식을 버리고 돈을 구하려 합니다. 농민(農民)은 곡식이 있어도 교역(交易)을 통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곡물이 값이 천해지고 돈이 유통되는 길이 행해져 한 필(疋)의 포(布)를 바꾸려면 이미 몇 석(石)의 곡식을 소비해야 하니, 돈 없는 농민들이 어떻게 거듭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잣집에서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는데, 춘궁기(春窮期)에는 1백 전(錢)의 빚을 내어야 겨우 쌀 한 말의 식량을 얻을 수 있지만, 가을에 이르러서는 몇 말의 쌀을 가져야 겨우 1백 전의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 갑리(甲利)까지 논한다면 빌려 준 것은 한 말인데 갚는 것은 여섯 일곱말에 이릅니다. 만약 곡식으로 빌려 주고 곡식으로 갚게 한다면, 이식(利息)이 갑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혁파하도록 원합니다. 지금 비록 이미 만든 돈을 녹여 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까닭없이 더 만들어 그 무궁한 폐단을 더 보태려 합니까?"

하고, 기타 논한 바에 이르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를 돌려가며 대각(臺閣)에 임명하는 것은 언론(言論)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며, 내한(內翰)353) 의 직임을 빨리 옮기도록 허락하지 않음은 사국(史局)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인(中人)과 서얼(庶孽) 출신이 담당하는 잡기(雜岐)354) 의 종류는 당연히 그 인원을 줄여 어지럽히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관(醫官)에 대하여 노고를 갚는 은전(恩典)은 마땅히 미(米)·포(布)로써 주어야 할 것이며, 현(縣)·읍(邑)에 차임(差任)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직(官職)에는 크고 작은 구분없이 반드시 직임에 구임(久任)시켜야 성과를 책임지울 수 있으며, 관리의 청렴과 탐욕스러움은 반드시 그 기용하고 버리는 것을 신중하게 해야 권면하고 징계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이 두려워하여 불법을 그치는 방법은 어사(御史)를 〈파견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팔도(八道) 가운데 한두 고을을 뽑아 적당한 사람을 가려서 위임시키고 몰래 다니면서 염찰(廉察)하되, 장오(贓汚)한 사실이 낭자(狼藉)하고 범(犯)한 것이 중대한 자는 영원토록 금고(禁錮)시키는 명부에다 기재해 두고 일체 다시 죄를 용서해 주지 말 것이며, 군기(軍器)를 특별히 준비하거나 진곡(賑穀)을 많이 모은 자에게 자급(資級)을 번번이 올려 주지 말아서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조짐을 안정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선비를 시험하는 문체(文體)는 표문(表文)으로 우선을 삼기 때문에, 표절(剽竊)하며 성편(成篇)355) 하고서도 요행히 뽑히기도 하니, 문득 과장(科場) 가운데서 지름길로 삼습니다. 근년(近年) 이래로 과거 시험이 너무 잦아 나이가 젊고 학식이 없는 부류들이 어지럽게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과거 베풀기를 드물게 하고 표문(表文)으로 시험하는 방법을 정지시킨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단의빈(端懿嬪)356) 의 상환(喪患) 때 행동한 일이 잘못되어 너무나 모양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전례(前例)의 예서(禮書)로 원용(援用)하여 증거 삼을 만한 것이 없는 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는 바로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명하여 편찬한 책인데, 성종(成宗)을미년357) 에야 완성을 알리게 되었으니, 당연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을미년 이후의 국조(國朝)의 의문(儀文) 및 고실(故實)358) 을 널리 상고하도록 하고, 청(廳)을 설치하여 찬수(纂修)하되, 참고하고 헤아려 보충하여 우러러 성상의 교지를 받아 한시대의 완전한 책으로 정하여 뒷날의 전칙(典則)으로 만드소서."

하고, 또 역관(譯官)이 바친 어필(御筆)을 받아들인 일로써 승정원의 관원을 추국하고 인해서 상(賞)주는 은전을 정지하도록 청했다. 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성조(李聖肇)가 여색(女色)에 빠져서 비방받은 것이 많다고 논하고, 그의 직임을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또 호서(湖西)의 공도회(公都會)359) 고시(考試)에 사정(私情)을 쓴 일을 논하고, 도사(都事)와 참고관(參考官)을 죄주도록 청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자신이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시사(時事)를 근심하여 진언(進言)한 바가 대단히 가상(嘉賞)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북한 산성을 쌓는 것은 큰 계책이 이미 결정이 되어 청(廳)을 설치하여 주관(主管)하고 있으니, 그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혁파해야 한다는 의논은 실로 뜻밖이다. 명을 받은 대신(大臣)들이 정성을 다하여 구획(區劃)하고 있는데, 말이 침해하여 핍박함이 많다. 그리고 미리 주무(綢繆)360) 하는 계책은 마땅히 한가할 적에 해야 하므로, 탕춘대(蕩春臺)를 잇따라 쌓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또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모두가 매우 미편(未便)하다. 그리고 군영(軍營)을 옮기는 것은 이미 매우 편리하다고 하였으며, 돈을 만드는 일도 불가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이상성(李相成)의 일은 상서한 내용이 옳으니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그리고 기타 조건은 묘당(廟堂)과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유복명(柳復明)이 또 휘비(徽批)361) 에 자못 미안(未安)한 뜻을 보이고, 말한 것이 채용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하여 인피(引避) 하였는데,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3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금융-화폐(貨幣)

  • [註 342]
    추조(秋曹) : 형조(刑曹).
  • [註 343]
    공물연조(貢物年條) : 조선조 때 나라에서 해마다 각 지방에서 받아들이기로 정한 일정한 액수의 공물(貢物).
  • [註 344]
    갑리(甲利) : 고리 대금업자들이 곱으로 쳐서 받는 금리.
  • [註 345]
    의승(義僧) : 북한 산성을 수비하는 중.
  • [註 346]
    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 [註 347]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농민이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인(納貢人)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배나 불려서 받던 일.
  • [註 348]
    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 관아(官衙)에서 부유층(富裕層)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官職)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성명은 기입하지 않음. 이에 의하여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됨.
  • [註 349]
    양군문(兩軍門) :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 [註 350]
    지부(地部) : 호조(戶曹)의 별칭.
  • [註 351]
    기조(騎曹) : 병조(兵曹)의 별칭.
  • [註 352]
    태창(太倉) : 광흥창(廣興倉)의 별칭.
  • [註 353]
    내한(內翰) : 예문관(藝文館).
  • [註 354]
    잡기(雜岐) : 기술직(技術職).
  • [註 355]
    성편(成篇) : 지어놓은 시문을 완전한 편으로 구성함.
  • [註 356]
    단의빈(端懿嬪) : 세자빈(世子嬪) 심씨(沈氏).
  • [註 357]
    을미년 : 1475 성종 6년.
  • [註 358]
    고실(故實) : 전고(典故).
  • [註 359]
    공도회(公都會) : 조선조 때 과거의 하나. 관찰사(觀察使)·유수(留守)가 해마다 자기 지방의 유생(儒生)들에게 보이는 소과(小科) 초시(初試). 제술(製述)·고강(考講)의 두 가지를 시험하였는데, 이에 합격한 사람은 다음 해에 보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복시(覆試)에 응할 수 있었음.
  • [註 360]
    주무(綢繆) : 미리 주밀하게 준비함.
  • [註 361]
    휘비(徽批) : 세자(世子)의 비답(批答).

○戊申/正言柳復明上書, 有曰:

近來三司受嗾、逞憾之說, 大關日後無窮之弊。 彼此醜詆, 前後何限, 而未嘗以此等說加之。 今乃猝然創發, 臺閣出一言, 則謂之受嗾, 玉堂出一言, 則謂之逞憾, 其他交詆之習、反詈之風, 又從而繼起。 從今居三司之人, 畏避嫌憾之目, 擧將緘結而已。 若夫先進、後進誘引籠絡之說, 誠有其人, 則何不直陳, 而作此囫圇之言, 驅之於疑亂之域哉? 【此指趙觀彬等事也。】

又曰:

日昨李相成之書斥成震齡也, 其所醜辱, 便一彈文, 而至以雨夜求乞爲辭, 有若行丐之人, 乞食不得, 反以致慍者然, 隱然歸之於逞憾之套, 已極駭怪, 而至若秋曹賄賂請托之斥, 則無所辨暴, 而反欲以混圇脅勒之說, 讓與言者, 又以凶黨殘孽之目, 公然勒加, 專事汚衊。 被論者之反攻言者, 若是憯刻, 殆未前聞。 宜施責罰, 以勵他人。

仍及近日時弊二十餘條。 其一, 經理廳料辦之弊也。 有曰:

無根之漢, 請得近萬兩銀貨, 而尙未收納, 無賴之人, 逢授九百包米穀, 而盡歸花消。 或給德筒米四千石, 而太半未徵, 或廣給還穀於士夫, 而其數過多。 年分、戶籍紙地之價, 田稅、大同船運之價, 何等瑣屑, 而堂堂國家, 至乃奪小民之小利, 與之爭較? 北漢僧徒, 卽一逋逃之藪, 而遍行八路, 作弊無算。 貢物年條, 以輕價而預爲買得, 當其輕買之際, 從中勒取, 不無其弊。 諸般債物, 以甲利而遍給京外, 及其督徵之時, 田土文券, 亦多見奪。 諸道義僧, 多至三百五十名, 而徵以除番之錢。 樓巖別將, 濫捧無名之船稅, 兩西、喬桐, 勒定紙地之防納。 其他空名之帖、防雇之事, 或多繹騷, 或涉零碎。 大抵任事之輩, 憑藉侵虐, 雖其多辦債殖, 廣占厚利, 而不歸公家, 半入私橐, 昔之貧乏者, 今則暴富, 昔之無家者, 今則廣室, 可勝痛哉?

其二, 蕩春臺築城之弊也。 有曰:

役糧雖曰足用, 而此豈空中之物乎? 畿內亦多陳荒, 則此豈稍豐之謂乎? 秋務方殷日晷且短, 則豈若春和日長之時乎? 兩軍門請貸布, 至於四百同, 則畢竟還報, 亦豈容易事乎? 地部經用, 常患難支, 騎曹錢布, 全然見乏, 賑廳元穀十一萬石, 卽今所餘, 僅至二萬。 太倉則百官頒料, 無以成樣, 軍監則積年逋欠, 亦近萬石。 禁衛營行用布, 僅爲數百同, 而又貸其百五十同, 其餘無幾矣。 民力之困耗如彼, 國儲之罄竭如此, 此豈城役之時乎?

其三, 論移營之弊則曰:

畿營之設置京中, 前輩之意, 夫豈偶然, 而移建雖便, 物力雖優, 其在謀事之道, 宜念擧羸之誚。 況便否之議旣岐, 掣肘之事反多, 則今何可不復深量, 必欲輕移乎?

其四, 論鑄錢之弊則曰:

自夫錢貨之行, 風俗日渝, 物價日湧, 甚至菜嫗鹽竪, 亦皆棄穀而索錢。 農民有穀, 交易莫通, 故不得已賤穀價而售錢路, 欲換一疋之布, 已費數石之穀, 無錢農民, 安得不重困乎? 富家積錢如山, 而假貸貧民, 窮春出百錢之債, 纔得斗米之糧, 至秋用數斗之米, 僅償百錢之債。 竝其甲利而論之, 則所貸一斗, 所償至於六七斗。 若令貸之以穀, 償之以穀, 則息不過一倍而已, 中外民庶, 皆願其罷。 今雖不能銷已鑄之錢, 何可無端加鑄, 以益其無窮之弊乎?

其他所論則有曰:

經幄之臣, 輪除臺閣, 以責言論也; 內翰之職, 勿許速遷, 以重史局也; 中庶雜岐之類, 宜減其員數, 俾不淆濫也; 醫官酬勞之典, 宜施以米布, 毋差縣邑也; 官無大小, 必久於職任, 可以責成也; 吏之廉貪, 必愼其用舍, 可以勸懲也。

又曰:

守令之畏戢, 莫過於御史。 八道之中, 抽栍其一二邑, 擇人委寄, 暗行廉察, 而贓汚狼藉, 負犯重大者, 永置錮籍, 切勿甄滌。 軍器別備賑穀多聚者, 毋輒陞資, 以靖躁競焉。

又曰:

試士之文, 以表爲先, 故剽竊成篇, 僥倖被選, 便爲科場中捷徑, 而近年以來, 科試太數, 年少學蔑之類, 莫不紛然而應擧。 今若罕設科而寢試表, 則可以矯其弊矣。

又曰:

端懿嬪喪患時, 觸事差誤, 殆不成樣, 蓋由於前例、禮書之無可援證也。 《五禮儀》, 卽我世宗大王命纂之書, 而告成於成廟乙未。 宜令大臣、儒臣, 博考乙未以後國朝儀文及故實, 設廳纂修, 參量塡補, 仰取上旨, 定爲一代之完書, 俾作後來之典則焉。

又以譯官所納御筆之捧入, 請推喉司, 仍寢賞典; 又論義州府尹李聖肇之耽色多謗, 請罷其職; 又論湖西公都會之考試行私, 請罪都事及參考官, 世子答曰: "身居言地, 憂時進言, 深用嘉賞, 可不留心? 今玆北城, 大計已定, 設廳主管, 其事不得不爾, 則革罷之論, 實是意外。 受命大臣, 竭誠區畫, 而語多侵逼。 綢繆之策, 宜及閒暇, 則蕩春繼築, 不容少緩, 而又請寢止, 俱極未便。 移營旣甚便好, 鑄錢亦無不可, 不必更議也。 李相成事, 書語是矣, 罷職。 其他條件, 令廟堂、春秋館稟處。" 復明, 又以徽批頗示未安, 而所言多不見用引避, 處置出仕。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3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금융-화폐(貨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