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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 7월 21일 무진 2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관동의 세공삼을 감하였다가 지금 갑자기 이전대로 회복시키다

관동(關東)의 세공삼(歲貢蔘)264) 을 감하도록 명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전대로 환원시켰다. 관동은 모두 산(山)이어서 삼(蔘)이 생산되는 것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났으며, 봄·가을 및 납약재(臘藥材)로 바쳐지는 인삼(人蔘)의 합계가 60근(斤)이나 되었다. 중세(中世)로 내려오면서 화전(火田)을 경작하는 일이 점차로 성해졌는데, 태우고 난 지역에는 인삼이 문득 나지 않아 묘종(苗種)이 점점 드물게 되어 채취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여러 군(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밭에서 수확되는 값을 계산하여 상인(商人)에게 부탁하여 사다가 바치게 되니, 인삼 값은 날마다 오르게 되고 백성들의 세금은 해마다 증가되어 한 도(道)의 큰 폐단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무자년265) 에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봄·가을에 바칠 인삼 합계 15근(斤)을 감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관동의 백성들은 그래도 명령(命令)을 감당하지 못했었다. 내의원 제조(內衣院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그 상황을 갖추 진달하여 먼저 납약재인 인삼 10근을 감하게 하고, 뒤에 또다시 5근을 감하도록 청하자, 단지 봄·가을로 각기 15근만 남겨두게 하였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억지로 청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얼마 있다가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어약(御藥)으로 쓰이는 다소(多小)는 미리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동의 인삼은 감해 준 그 수량이 이미 적지 않은데, 제조(提調)가 또 감해 주기를 청하니, 일이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그대의 거조(擧條)266)효주(爻周)267) 하도록 하라. 또 침(鍼)을 맞은 뒤에 생맥산(生脈散)268) 을 달여서 들인 지 오래 되었다. 제조(提調)를 지낸 사람이 몇 사람이었지만 감해 준 적이 없었는데, 지난해에 제조의 말로 인해서 감해 주었으니, 역시 온당(穩當)하지 못하였다. 이 뒤로는 그전대로 달여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민진후(閔鎭厚)가 침법(鍼法)은 경락(經絡)269) 을 소통(疏通)시키는데, 생맥산(生脈散)은 인삼(人蔘)이 들어가서 주로 〈원기(元氣)를〉 보충하므로, 의학(醫學)의 이론상 어긋남이 있다고 여겨, 그 규정을 제거하도록 청하여 없앤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인삼을 감하는 일로 인하여 갑자기 옛날대로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내국(內局)에서 약재(藥材)를 내주거나 받아들이는 일이 단지 장의(掌醫)와 서리(胥吏)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용도(用度)가 지나치게 잡다하여 제한과 절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제조(都提調) 이하가 그 수량을 물어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납약재인 인삼은 아예 창고에 들이지도 않은 채 곧장 수의(首醫)270) 의 개인 주머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가 되었으며, 만약 국용(國用)이 부족하면 번번이 상례로 바치는 외에 더 징수하도록 했던 것이다. 민진후가 그 폐단을 깊이 알고 맨 먼저 납약재로 바치는 인삼을 없애도록 하고, 새로운 규정을 정하여 인삼·우황(牛黃) 등속은 사용하는 대로 회계(會計)하여 매월 그믐에 임금에게 아뢰도록 하니, 의원과 서리의 무리가 그들의 간사함을 용납할 데가 없어 원망과 비방이 대단히 시끄러웠는데, 액정(掖庭)271) 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망하는 내용의 전지(傳旨)를 받고 오래되지 않아 제조에서 해임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었다. 그 뒤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백성이 화합하지 못함은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허물을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미 임시로 감하여 준다는 뜻을 본도(本道)에 행회(行會)272)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이미 감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갑자기 그전대로 회복시킨다면 실신(失信)을 면하지 못하니, 금년에는 지난번의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감하도록 허락하고, 예전대로 회복하는 것은 천천히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9면
  • 【분류】
    재정-공물(貢物)

  • [註 264]
    세공삼(歲貢蔘) : 연말에 공물로 바치는 인삼.
  • [註 265]
    무자년 : 1708 숙종 34년.
  • [註 266]
    거조(擧條) : 임금에게 아뢰는 조항.
  • [註 267]
    효주(爻周) : ×표를 그어 지워버림.
  • [註 268]
    생맥산(生脈散) : 원기 쇠약(元氣衰弱)과 번조(煩燥)에 쓰는 탕약(湯藥). 인삼(人蔘)·맥문동(麥門冬)·오미자(吳味子)가 주재(主材)인데, 여름에 숭늉 대신으로 먹기도 함.
  • [註 269]
    경락(經絡) : 기혈(氣血)이 인체(人體) 내부에 돌아다니는 맥관(脈管).
  • [註 270]
    수의(首醫) : 내의원 소속의 우두머리 의관.
  • [註 271]
    액정(掖庭) : 대궐안.
  • [註 272]
    행회(行會) : 정부(政府)의 지시·명령을 각 관사의 장이 그 부하에게 알리고 실행 방법을 논정(論定)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 또 그 모임.

○命減關東歲貢參, 未幾還仍。 關東, 皆山也。 以産蔘, 名於國中。 春秋及臘藥材, 所貢人蔘, 合爲六十斤。 中世以來, 火耕寢盡, 經燒之地, 蔘輒不生, 以致苗種漸稀, 採取絶艱。 諸郡不得已算田收價, 付商貿貢, 而蔘價日聳, 民賦歲增, 爲一道巨弊。 戊子, 因御史書啓, 許減春秋蔘合十五斤, 東民猶不堪命。 內醫提調閔鎭厚, 嘗於筵中, 備陳其狀, 先減臘蔘十斤, 後又請更減五斤, 只存春秋各十五斤, 上初難之, 强請而後始許。 旣而下特敎曰:

御藥所用多少, 不可預定。 而東蔘所減, 厥數已自不少, 提調又請減, 事涉未安。 其時擧條爻周。 且受鍼後, 煎入生脈散, 厥惟舊哉, 經提調幾人, 而莫之減去, 上年因提調言減之, 亦未穩當。 今後依前煎入。

鎭厚以爲鍼法爲疏通經絡, 而生脈散, 入人蔘主補, 有乖醫理, 請除其規, 罷之有年, 因減蔘之事, 遽命復舊。 蓋內局藥材出入, 只在掌醫與胥吏之手, 用度濫屑, 無有限節, 而都提調以下, 不問其數, 甚至臘蔘, 初不入庫, 直歸首醫之私橐, 歲以爲常。 若國用匱乏, 則輒又加徵於例貢之外。 鎭厚深知其弊, 首罷臘封, 創立新規, 人蔘、牛黃之屬, 隨用會計, 以月晦上聞, 醫吏輩, 無所容其奸, 怨謗頗騰, 流聞掖庭。 至是被責旨, 未久解提調, 物情多爲聖朝惜之。 其後都提調李頣命從容白上曰: "詩云: ‘民之失德, 乾糇以愆。’ 旣以權減之意, 行會本道, 民皆認爲已減矣。 今遽復舊, 未免失信, 今年則依前下敎許減, 徐議復舊亦未晩矣。" 上不從。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9면
  • 【분류】
    재정-공물(貢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