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의 폐단 전 정언 성진령의 상소 등에 대한 장령 박치원이 상소하다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이 상서(上書)하기를,
"연분(年分)237) 을 각도(各道)에서 조사하여 구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묘당(廟堂)에서 재결(災結)238) 을 참작하여 결정하므로, 도리어 오리(汚吏)에게 빌미를 주어 이를 빙자하여 가렴주구[掊克]하고 있어서 한갓 잔약한 백성으로 하여금 백지(白地)239) 에서 세금을 물게 하니, 이것을 금년에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군정(軍政)의 폐단은 실로 교생(校生)·원생(院生)으로 모록(冒錄)한 자 및 각영(各營)·각청(各廳)의 공장(工匠)·군관(軍官)으로 소속된 이가 매우 많은 데에 연유되는데, 호민(豪民)240) 들이 거의 모두 투입(投入)되어 군정(軍丁)을 얻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역시 엄격히 심사하여 추려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포(錢布)로 대내(大內)에서 가져다 쓰는 것은 단지 내수(內竪)241) 의 구전(口傳)에 의거하는데,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가져다 쓰는 것을 명백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각사(各司) 서리(胥吏)의 간두(奸蠧)242) 함도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수단은 더욱 교활해졌는데, 이른바 관원은 다만 앉아서 서명(署名)만 하니, 오직 정액(定額) 밖에 증가한 수량은 한꺼번에 도태시키도록 삼가 청해야 합니다. 혜민서(惠民署)의 약물(藥物)은 원래 뿌리 하나, 잎 하나도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없고, 한갓 제조(提調)와 예당(禮堂)243) 을 위하여 편안하게 사용되니, 그 소비되는 것을 따지면 몇 백 곡(斛)의 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관서를 혁파하여 진휼하는 밑천으로 보충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 【조태채(趙泰采)를 말한다.】 이 삭출(削黜)244) 된 여러 사람을 용서하도록 청하면서 주달(奏達)할 적에 처음에는 단지 홍(洪) 【홍우행(洪禹行)이다.】 ·황(黃) 【황초(黃草)이다.】 두 사람을 지명하여 아뢰었고, 그가 나와서 당후관(堂后官)245) 과 오가는 데 이르러서는 두 사람이 증가하여 다섯 사람이 되었으며, 이튿날 차자(箚子)로 진달하는 가운데서는 다섯 사람에다 또 보태어 여섯 사람이 되었으니, 연주(筵奏)에서 열거한 조목과 아뢴 것이 각각 달라 두 사람 여섯 사람으로 보태거나 줄이기를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또 그것을 청대(請對)하는 일이 갑자기 옥체(玉體)에 침(鍼)을 맞던 날 나왔으니, 외부에 있던 신료(臣僚)들은 시급하고 긴절한 업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연설(筵說)이 전파됨에 이르러서는 바로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헐지 말자는 것과 이형수(李衡秀)를 6품(品)으로 승진시키자는 일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놀라고 분하게 여겼으며, 사론(士論)도 불안하게 여겼습니다. 지난번 당차(堂箚)246) 에 설령 공격하거나 핍박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이 맞아서 공격할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전(前) 정언(正言) 조영세(趙榮世)가 도리어 방자한 생각으로 추잡하게 욕하며 공격하여 제거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의 일을 가로맡아 사주를 받는 무리가 되기를 달갑게 여기고, 기력(氣力)을 진작하고 성색(聲色)을 분발하여 한결같이 남을 위해 그런 일을 서슴없이 하기를 바랐으나, 그것이 스스로 간사하게 협잡하는 데 빠뜨려진다는 것을 돌아다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전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의 글이 비록 과격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성조(聖朝)의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는 장려할 만하며 저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김만주(金萬胄)가 타당한 것을 무릅쓰고 처치(處置)한 것은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었는데, 다만 마음대로 아첨하려 하니, 이미 지극히 해연(駭然)합니다. 낙과(落科)에 두려고 하였으나 말로 배척할 것이 없으니, 제목 밖의 말을 끄집어 내어 곧바로 틈바구니를 얼버무리려는 방향으로 돌리려 하니, 이것이 간신(諫臣) 【홍계적(洪啓迪)이다.】 이 인심이 함닉(陷溺)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을 염려하여 그 직임을 파면하도록 청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임형(任泂)이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出仕)하여 서둘러서 멋대로 정지하게 한 것은 【임형(任泂)이 조영세(趙榮世)의 파직(罷職)을 정지하도록 아뢰었다.】 마치 승부(勝負)를 계교하고 사업(事業)을 갖추려는 듯하기는 하나, 무슨 큰 이해(利害)가 그 사이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관빈(趙觀彬)은 당초에 신록(新錄)247) 되었을 때 여러 동료들에게 의당 일일이 나아가 의논하여 그 말을 따르겠다고 생각하였는데, 끝내는 도모한 바와 같지 않으니, 업신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기고 갑자기 화를 내었던 것이며, 이른바 협잡(挾雜) 등의 말은 신록(新錄)을 저지시키고 방해하여 한때의 분노를 통쾌하게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한두 명의 신하와 의심하여 저지한 후에 이르러서는 먼저 조영세(趙榮世)의 무리를 시켜서 치고 깨물며 공격하여 쫓도록 하고, 자가(自家)의 글 내용에는 일부러 칼날을 몰래 감춘 채 모호(糢糊)하게 말하였으니, 마치 처음에는 지척(指斥)함이 있는 듯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드러내 놓고 말하는 듯함이 있으니, 그 기구(崎嶇)하게 핍박하고 편파적으로 위험하게 기우는 뜻이 실로 명백하고 정대(正大)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의 참독(慘毒)한 의논을 도와 우규(右揆)248) 부자(父子) 【조태채(趙泰采)·조관빈(趙觀彬)이다.】 를 자못 여지없이 극력 헐뜯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다른 나머지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박치원(朴致遠)이 마침내 인피(引避)하고, 조태채(趙泰采)를 무엄(無嚴)하다고 배척하였다. 또 말하기를,
"유신(儒臣) 【조관빈(趙觀彬)을 가리킨다.】 이 부귀(富貴)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일찍이 청관 현직(淸官顯職)의 반열에 드날렸으니, 그가 교만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한 번 두 번 올린 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아 사람마다 몰래 비난하며 일마다 의심을 품고서 표독하고 참혹한 칼날로 핍박하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 권력이 있는 요직은 의당 대신의 지위보다 나은 것이 없고, 추시 부세(趨時附勢)하는 것은 오늘날 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영세(趙榮世)의 무리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면서 도리어 남을 능멸하려고 당여(黨與)를 체결하였습니다. 유신(儒臣)이 이미 말하기를, ‘부끄러움을 안다.’고 하였으나, 도리어 지금 사리에 어긋나고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그의 집안에 모았으며, 명기(名器)를 삼가고 아낀다고 유신이 이미 스스로 힘쓸 것을 허여(許與)하고서도 채권자의 총수격인 무리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오니, 그가 부끄럽게 여기고 힘쓰겠다는 바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하고, 마침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정론-간쟁(諫諍) / 농업-농작(農作) / 군사-군역(軍役)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행형(行刑)
- [註 237]연분(年分) : 조세(租稅) 제도의 하나. 그 해의 농사의 풍흉(豊凶)에 따라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아홉 등급으로 나누던 제도로서, 10분실(十分實)이면 상상년(上上年)으로 하여 전지 1결(結)에 대하여 20두(斗)를 징수하고, 9분실이면 상중년으로 하여 18두를 징수하고, 8분실이면 상하년으로 하여 16두를 징수하는 등 차례로 등급을 매겨 등급에 따라 징수하되, 1분실이면 면세(免稅)하였음.
- [註 238]
재결(災結) : 재해(災害)를 당한 전답.- [註 239]
백지(白地) :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거두어 들일 것이 없는 땅.- [註 240]
호민(豪民) :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는 백성.- [註 241]
내수(內竪) : 내시(內侍).- [註 242]
간두(奸蠧) : 간악(奸惡).- [註 243]
예당(禮堂) : 예조의 당상관.- [註 244]
삭출(削黜) :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내쫓음.- [註 245]
당후관(堂后官) :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가리킴.- [註 246]
당차(堂箚) : 옥당(玉堂:홍문관)의 차자(箚子).- [註 247]
신록(新錄) : 조선조 때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에 새로 뽑힌 사람을 이르는 말.- [註 248]
우규(右揆) : 우의정(右議政).○乙卯/掌令朴致遠上書言:
年分不待各道檢覈區別, 先自廟堂, 酌定災結, 反資汚吏, 憑藉掊克, 而徒使殘氓, 白地應稅, 不可以此, 仍行於今年。 軍政之弊, 實由於校生、院生冒錄者及各營、各廳, 工匠、軍官之屬, 甚多, 豪民率皆投入, 以致軍丁之難得, 亦宜嚴査汰定。 戶、兵曹錢布之自內取用者, 只憑內竪之口傳, 宜分付該曹, 明白取用。 各司胥吏之奸蠧漸廣, 手段益巧, 所謂官員, 但坐而署惟謹。 請額外增加之數, 一倂沙汰。 惠民署藥物, 元無一根一草之救民, 徒爲提調、禮堂之帖用。 計其所費, 不知爲幾百斛米。 宜罷其署, 以補賑資。
又言:
向者大臣, 【謂趙泰采。】 以削黜諸人請宥事奏達也, 初只以洪、 【洪禹行。】 黃 【黃爾章】 兩人指名陳白, 及其出而與堂后往復, 則二人增爲五人, 翌日陳箚之中, 五人又添爲六人。 筵奏擧條, 所達各異, 二人六人, 增減任意。 又其請對之擧, 遽出於玉體受鍼之日, 在外臣僚, 意謂有急時切務, 及其筵說之傳播, 乃尹宣擧書院勿毁及李衡秀陞六事也。 群情駭憤, 士論拂鬱。 向來堂箚, 設有挨逼之語, 此豈臺臣所可迎擊者, 而前正言趙榮世, 乃反恣意醜辱, 擊去後已者, 何哉? 橫擔他人之事, 甘爲受嗾之輩, 作氣力奮聲色, 要一爲人快意底事, 而不暇顧其自陷於回譎挾雜。 前正言成震齡之書, 雖不無過激者, 在聖朝恢言路之道, 可奬而不可沮也。 金萬胄之冒當處置, 顚倒是非, 惟意取阿, 已極駭然, 而欲置落科, 無辭可斥, 則拈出題外之言, 直歸修隙之科, 此諫臣 【洪啓迪】 所以痛人心之陷溺, 慮言路之杜塞, 請罷其職者也。 任泂之冒沒出仕, 急急擅停, 【任泂停趙榮世罷職之啓。】 有若較勝負辦事業者, 未知有何大利害於其間耶? 趙觀彬於當初新錄時, 意謂諸僚, 當一一就議, 而惟其言是從, 末乃不如所圖, 則意其見輕, 猝生慍怒, 所謂挾雜等語, 不過欲沮戲新錄, 以快一時之憤而已。 及其與一二臣疑阻之後, 先使榮世之徒, 搏噬擊逐, 而自家書辭, 則故爲潛鋒匿刃, 糢糊說去, 有若初有指斥, 今已顯言者然, 其崎嶇偪側, 偏陂傾險之意, 實非明白正大樣子也。
世子答以扶植喜事輩慘毒之論, 力詆右揆父子, 【趙泰采、觀彬。】 殆無餘地, 是誠何心? 他餘事, 令廟堂稟處。 致遠遂引避, 斥泰采爲無嚴。 又曰:
儒臣, 【指觀彬。】 生長富貴之家, 早敭淸顯之班, 其所驕傲, 宜無足怪, 而一書再書, 語意非常, 人人而暗剌, 事事而懷疑, 毒刃憯鋒, 無所不逼。 噫! 權要宜莫如大臣地位, 趨附亦莫如今日。 榮世之徒, 不暇自顧, 反欲加人, 締結黨與。 儒臣旣曰知恥, 而顧今乖亂之類, 坌集其庭。 愼惜名器, 儒臣旣許自勉, 而債帥之徒, 竝出其門, 其所以恥之勉之者, 固如是乎?
遂退待。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정론-간쟁(諫諍) / 농업-농작(農作) / 군사-군역(軍役)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행형(行刑)
- [註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