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7월 1일 무신 1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약방에서 입진하다. 제조 민진후와 역병·차왜·군포 등의 일을 논의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도성(都城)의 백성으로 전염병에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강시(殭屍)218) 가 도로에 서로 잇대어 있습니다. 그 시체의 주인이 없는 경우는 모름지기 말할 필요가 없지만, 비록 주인이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집안 사람들이 바야흐로 모두 전염되어 앓고 있으므로, 시체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아주 내버려 두거나 더러는 짚으로 덮어둔 것이 반쯤 드러나기도 하여 더러운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므로, 다니는 길이 거의 막히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한 사람의 낭관(郞官) 및 부장(部將)을 정하여 전담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일일이 금지 표지 밖에다 묻게 하되, 비록 각기 무덤 모양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한 곳의 큰 구덩이에다 함께 묻는 것도 불가함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매예 감관(埋瘞監官) 및 군인을 각별히 모집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요포(料布)219) 를 제급(題給)하도록 하고, 자주 단속과 경계를 가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참으로 매우 슬프다. 특별히 거듭 타일러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영복(趙榮福)이 장계(狀啓)하기를, ‘장기(長鬐)의 표류 한 사람을 데리고 온 차왜(差倭)220) 의 정상(情狀)이 놀랄 만한데, 접대하지 말고 단지 과해량(過海粮)221) 만 지급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이로써 훈별(訓別)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차왜를 책유(責諭)하도록 하였더니, 차왜가 병신년222) 남해(南海)의 표류민을 데리고 왔을 적에 접대한 예를 인용하며 억지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칼을 빼어 표독하게 굴며 문을 굳게 닫은 채 훈별(訓別)을 붙잡아 두었다가, 닭이 운 뒤에야 비로소 내보냈습니다. 대체로 왜인은 교활하여 일마다 오로지 억지로 다투는 것을 주무(主務)로 삼는데, 조정에서는 대체(大體)를 보존하려고 힘써 매번 굽혀서 따라주었기 때문에 왜인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이번에 바다를 건너가는 역관(譯官)이 들어갈 때에 따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임술년223) 의 약조(約條)를 거듭 환기시켜 다투는 단서를 그치게 해야 합니다. 비록 이들이 당연히 접대할 차왜라 하더라도 감히 조정의 차관(差官)을 붙잡아 두고 칼을 뽑아 협박하였다면, 결단코 전례대로 접대하기 어렵다는 뜻을 각별히 서계 내용 가운데 적어 넣어 조정의 위령(威令)을 보이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통신사(通信使)224) 가 떠날 때에 별도로 서계를 만들어 거듭 약속을 설명하도록 하되, 그 전에는 결단코 차왜를 접대할 수 없다는 뜻을 다시 책유(責諭)하고, 단지 과해량(過海粮)만 지급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大臣)들의 뜻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이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에 기근(飢饉)이 든 참혹한 정상을 진달하고, 군포(軍布)225) 를 바치지 못한 사람에게 독촉하여 거두게 하는 일을 정지시켜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농삿일을 다스리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몇 달 사이의 일에 불과하니, 신포(身布)226)신공(身貢)227) 을 모두 기한을 물려서 바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7면
  • 【분류】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왕실-국왕(國王) / 보건(保健) / 풍속-예속(禮俗) / 외교-왜(倭) / 구휼(救恤)

  • [註 218]
    강시(殭屍) : 썩지 않은 변사체.
  • [註 219]
    요포(料布) : 급료로 주는 베.
  • [註 220]
    차왜(差倭) : 일본 관백(關白)의 명령을 받아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우리 나라에 보내던 사자(使者).
  • [註 221]
    과해량(過海粮) : 왜사(倭使)가 포소(浦所)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날수와 인원수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식량.
  • [註 222]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 [註 223]
    임술년 : 1682 숙종 8년.
  • [註 224]
    통신사(通信使) : 우리 나라에서 일본에 보내는 사신.
  • [註 225]
    군포(軍布) : 군보(軍保)에게서 받아들이는 삼베나 무명.
  • [註 226]
    신포(身布) : 평민이 신역 대신 바치는 베.
  • [註 227]
    신공(身貢) : 노비(奴婢)가 신역 대신 바치는 공물.

○朔戊申/藥房入診。 診候畢, 提調閔鎭厚言: "都城民人, 死於癘疫者, 不可數計, 殭屍相屬於道路。 其無主者, 固不須言, 而雖有主者, 家人方皆染痛, 不能收屍。 或全然委棄, 或藁殯半露, 穢氣逼人, 行路幾不通。 宜令漢城府, 定一郞官及部將專管, 一一埋於禁標外, 雖不能各成墳形, 同埋一大坎, 亦無不可。 所謂埋瘞監官及軍人, 各別募得, 自賑廳, 題給料布, 頻加檢飭, 似爲得宜。" 上曰: "聞來誠極慘然。 另加申飭, 着實擧行。" 鎭厚又言, "東萊府使趙榮福狀言, ‘長鬐漂人領來差倭, 情狀可駭, 請勿爲接待, 只給過海糧, 故以此傳令訓別, 使之責諭差倭, 則差倭引丙申年南海漂民領來接待例, 强爭不已, 至於拔劍肆毒, 牢閉門戶, 挽執訓別, 鷄鳴後始出送。 大槪倭人狡黠, 每事專以强爭爲主, 而朝家務存大體, 每每曲從, 故情日以益驕。 今此渡海譯官入去時, 別爲書契, 更申壬戌約條, 俾息爭鬧之端, 而雖是應爲接待之差倭, 敢有拘執朝廷差官, 發劍脅迫, 則決難依例接待之意, 各別措辭於書契中, 以示朝廷威令, 實合事宜。’ 云。 前頭通信使行時, 別爲書契, 申講約束, 而其前則決不可接待差倭之意, 更加責諭, 只給過海糧入送爲宜。 大臣之意, 亦然矣。" 上可之。 鎭厚又言: "黃海監司李德英, 狀陳道內飢饉之慘, 乞停軍布未捧者徵督之擧, 使得專心治農云。 此不過數月間事, 身布、身貢, 宜竝許退捧。" 上許之。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7면
  • 【분류】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왕실-국왕(國王) / 보건(保健) / 풍속-예속(禮俗) / 외교-왜(倭)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