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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 4월 14일 임진 2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약방에서 입진하다. 고 판중추원사 권전을 부원군으로 증직시키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고 감사 김홍욱(金弘郁)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을 말하다가 원통한 죽음을 당하는 데에 이르렀기 때문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특별히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빈(姜嬪)을 복위(復位)시킨 뒤에도 포상하고 추증(追贈)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에게 하문하였는데, 이이명이 아뢰기를,

"효종께서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미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허락하셨으니, 지금 이 일을 신원(伸冤)시키는 때에도 증직(贈職)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 2품의 관직에 추증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강빈(姜嬪)을 장사지낸 산이 금천(衿川)에 있는데, 당시 일이 창졸한 가운데에서 나왔으므로 미처 좋은 땅을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지가 안온(安穩)한지의 여부를 이미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 혈(穴)의 앞이 매우 짧아 상석(象石)을 설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자손들의 말을 들으니 ‘비록 소현 세자의 무덤에 합장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쌍분(雙墳)으로 만든다면 신도(神道)를 위안할 수가 있고 따라서 나라의 힘을 감하여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합부(合祔)한다면 신리(神理)에 있어 진실로 편안할 것이지만, 폐단을 줄이는 방도도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는가? 다만 세월이 73년이나 오래 되어 지하의 일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망설였었다.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두 무덤을 봉심(奉審)한 뒤에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권전(權專)은 곧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비입니다. 장릉(莊陵)141) 이 복위된 뒤에 특별히 권전의 관직도 회복하였는데, 그 묘표(墓表)에 판 중추원사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비석에 쓴 것에 따라서 관직을 회복시켰습니다. 소릉(昭陵)을 복위시킨 뒤에는 마땅히 부원군(府院君)으로 증직하여야 하는데, 그 자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선조들의 사직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비에 새긴 것에 따를 뿐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증직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성진령(成震齡)이 우상(右相)을 배척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매복(枚卜)142) 할 때에 물정(物情)이 이를 해괴하게 여겼습니다.’고 하였는데, 신도 당초 매복할 때 참여하였으니, 대간의 말이 이와 같다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이 평일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정성을 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 중간에 낙복(落卜)143) 한 것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매복(枚卜)에 합당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성진령이 너무도 여지없이 능멸하였으니, 사체에 있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경에게는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작년에 신이 창졸한 가운데 명을 받든 죄를 신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소장을 올려 논열하였는데, 이것은 행적만 보았을 뿐 본심을 헤아리지 못한 소치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우상이 월름(月廩)을 수송(輸送)하자고 청하였으나 준청(準請)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윤지완은 나이 80세가 넘었습니다. 조정에서 은혜롭게 돌봐줄 남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를 대우하는 것을 마땅히 박절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상께서 명하여 월름을 지급하게 하면 실로 성덕(聖德)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여러 신하들 가운데 소장을 올린 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자들이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도 없겠으나, 영부사는 백발이 성성한 대신으로서 곧 조정을 괴란시킬 계책을 가졌었다. 사신(私臣)이라고 배척한데 이르러서는 더욱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므로 나도 옳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월름을 수송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註 141]
    장릉(莊陵) : 단종 대왕의 능.
  • [註 142]
    매복(枚卜) : 정승을 뽑음.
  • [註 143]
    낙복(落卜) : 복상(卜相)에서 누락됨.

○藥房入診。 提調閔鎭厚言: "故監司金弘郁, 言人所難, 而致於冤死, 故孝宗大王, 特復其官爵矣。 今當姜嬪復位之後, 似當有褒贈之典矣。" 上以問都提調李頤命, 頤命曰: "孝廟愍其冤死, 旣許復官, 則今於本事伸理之時, 宜有贈職之道矣。" 上命贈正二品職。 頤命又言: "姜嬪葬山, 在衿川矣, 當時事出倉卒, 未及擇兆, 故安穩與否, 旣未可知。 且其穴前甚短, 難容象設。 聞其子孫言, 雖未合葬於昭顯墓, 而若爲雙墳, 則可以慰安神道, 而減省國力云矣。" 上曰: "若得合祔, 則神理固爲妥安, 而省弊之道, 亦豈不便好? 第七十三年之久, 地中事未可知, 故以此趑趄矣。 令都監奉審兩墓後稟處。" 頤命曰: "故判中樞院事權專, 卽顯德王后之考也。 莊陵復位後, 特復官, 而其墓表, 書以判中樞院事, 故從其碑石所題, 而復官矣。 旣復昭陵之後, 則當贈府院君, 而子孫零替, 祖先事蹟, 未能詳知, 故只遵碑刻云矣。" 上命贈府院君。 頤命又曰: "成震齡侵斥右相之書, 以爲枚卜之時, 物情爲駭。 臣亦參於當初枚卜之時。 臺言如此, 安得晏然乎?" 上曰: "右相平日體國之誠, 予所詳知。 中間落卜, 予以爲不是矣。 寧有不合於枚卜之理乎? 成震齡之凌踏, 殆無餘地, 事體豈容如是? 於卿少無不安之端矣。" 頤命曰: "昨年臣之倉卒承命之罪, 臣亦自知。 領府事尹趾完抗章論列, 此不過見其迹, 而不諒本心之致。 頃日筵中, 右相有月廩輸送之請, 而未得準請云。 趾完年過八十, 朝家惠養, 餘日無幾。 待之不宜迫切。 命給月廩, 實有光於聖德矣。" 上曰: "伊時諸臣上章者, 不爲不多。 年少過激之言, 固無足怪, 而領府事, 以白首大臣, 乃有壞亂朝廷之計, 至於私臣之斥, 尤不擇發, 予深以爲非矣。 大臣之言如此, 月廩輸送宜矣。"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