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송준길·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유생 윤수준 등이 올린 상소문
경기·황해도·충청도 3도의 유생(儒生) 윤수준(尹壽俊) 등이 상서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정공 송준길(宋浚吉)·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송시열은 산하(山河)의 간기(間氣)063) 를 타고났고 천지(天地)의 순강(純剛)함을 지녔으며, 연원(淵源)의 정맥(正脈)은 멀리 고정(考亭)064) 에 접하였으므로 그 규모가 정대(正大)하여 광명한 경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태산(泰山)·교악(喬嶽)같이 사방이 모두 우러릅니다. 그는 평생 스스로 기약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聖人)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소성(小成)하는 데에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경전(經傳)의 심오한 뜻을 거의 모두 함양하고 꿰뚫어서 이것을 체득하여 여러 가지 일에 반영하였기 때문에 그의 언론과 저술은 남보다 뛰어나고 적확(的確)하였습니다. 의리(義理)와 왕도(王道)·패도(霸道)의 구별에 있어 털끝만큼도 착오되는 것이 없었으며, 행장(行藏)과 진퇴(進退)에는 각각 사의에 알맞게 행하였고 이론과 실행을 함께 갖추었으므로 얼굴과 온 몸에 학덕(學德)이 넘쳐흐르기에 이르렀는데, 더욱 올바른 학문[正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에 엄하였습니다. 성조(聖祖)065) 를 만나서는 은밀히 대의(大義)를 도왔으니, 그가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배척한 공은 족히 천하 후세에 칭송받을 만합니다. 이분이야말로 정말 이른바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송준길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마음속은 쇄락(洒落)하여 빙호(氷壺)·옥수(玉樹) 같고 화풍(和風)·경운(慶雲) 같았습니다. 스승의 말씀을 돈독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였으므로 행동과 언어에 있어 한결같이 법도를 존중하였으며, 지조를 굳게 지킨 근엄함은 ‘혼자 처해 있을 적에도 부끄러운 짓을 않는다’는 데에 부끄럽지 않았으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하였습니다. 평생 학업을 닦음에 있어 의리와 욕심의 구분, 선과 악의 분별에 더욱 뜻을 기울였으므로 일찍이 순(舜)임금처럼 착한 사람과 도척(盜跖)066) 같은 악한 무리를 논할 적에 전석(前席)에서 털끝만한 의리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의 기미(幾微)를 분석한 것이 더없이 정밀하였습니다. 위미 정일(危微精一)067) 의 학문을 가지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임금에게 책임지우기를 마지않았으나, 선한 말을 아뢰고 어려운 일을 행하도록 권한 뜻이 아!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였으므로 효종께서 일찍이 면대해서 유시하기를, ‘세자가 학문에 진력하는 것은 경의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몸소 좨주(祭酒)의 직임을 맡아서 많은 선비를 인도하여 경전(經典)의 뜻을 설명하여 선비의 기풍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사변(事變)에 임하여는 의리로 결단하여 확연히 동요되지 않았으며, 권간(權奸)이 멋대로 방자하게 굴던 때를 당하여는 화복(禍福)이 목전에 있었으나 올바른 말로 막바로 배척하였는데, 그 뒤 증험하여 보면 모두가 명확하게 맞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평생의 학문에서 유출된 것이니 진실로 재주가 뛰어난 훌륭한 유사(儒士)요 석덕(碩德)이요 대현(大賢)이라고 이를 말합니다.
박세채는 천품(天稟)이 매우 훌륭하고 재덕(才德)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통명(通明)하고 쇄락(洒落)하고 충후스럽고 낙이(樂易)하고, 학덕이 얼굴과 온 몸에 넘쳐흐르고 의리에 통철하여 하자가 없었으므로 그를 바라보면 상서로운 구름이 일고 상서로운 해가 돋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약관(弱冠) 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학업을 포기하고 용기 있게 사학(斯學)으로 귀의하여 생각을 정밀하게 깊이 연구하면서 진실을 알아 실천하였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학문의 큰 근본을 통찰하여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정자(程子)의 가르침인 ‘경(敬)’자를 공부하는 것을 제일의 뜻으로 삼아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의 오묘함과 공사(公私)·의리(義利)의 구분과 왕도(王道)·패도(霸道), 성실·거짓의 구분과 고금의 상례(常禮)·변례(變禮)를 모두 원류를 따져 밝혔는데, 드러난 데에서 은미한 데로 이르게 했습니다. 예학(禮學)이 향방(向方)을 모르는 것을 민망히 여겨 《교법요지(敎法要旨)》를 저술하였고, 기성(箕聖)068) 이 남긴 학문이 인멸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범학전편(範學全編)》을 저술하였고, 동방의 도통(道統)이 혹시라도 문란해질까 염려하여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지었고, 후세의 사도(師道)가 크게 무너질까 걱정하여 《사도고증(師道考證)》을 지었고, 《심학지결(心學至訣)》과 《육례의집(六禮疑輯)》과 같은 책은 규모가 이미 방대하고 조목 또한 세밀하였으므로, 서산(西山)069) 의 《심경(心經)》과 주자(朱子)의 《통해(通解)》 같은 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합니다. 그 밖에 《이서요해(二書要解)》·《가어외편(家語外編)》·《춘추보편(春秋補編)》·《성현유모(聖賢遺模)》·《연원속록(淵源續錄)》·《계치록(稽治錄)》·《논경요지(論敬要旨)》 등과 같은 책은 경전의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문(斯文)을 옹호하기도 하고 학문하는 차례를 논하기도 하고 지치(至治)를 이루는 데에 중요한 일을 말하기도 하는 등 지난 자취를 잇고 앞길을 열어놓은 공적은 실로 우리 동방의 제유(諸儒)로서는 하지 못했던 점입니다. 임술년070) 에 한 번 나온 것이 실로 조정에 벼슬하게 된 시작이었는데, 하나의 수차(袖箚)071) 는 주실(周室)을 높이는 대의(大義)를 게시한 것이었습니다. 만년에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발탁되어 삼사(三事)072) 의 자리에 올랐는데,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조정의 여론이 두 가지로 갈라질 때를 당하여서도 성색(聲色)이 동요되지 않았고 앉아서 조정을 진정시켰는데, 거조가 사의에 맞았습니다. 그리하여 시비가 비로소 정하여졌고 그에 따라 선비의 추향이 의지할 데를 알게 되었으며 인심이 함닉(陷溺)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니, 가히 백세(百世)의 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언소(萬言疏)에 이르러서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이 잘 갖추어졌고 다스리는 방법이 상세히 구비되어 있었으며, 대고서(大誥書)에 이르러서는 무편무당(無偏無黨)하여 황극(皇極)이 다시 밝아졌으니, 또한 조치를 베푼 대략을 볼 수가 있는 것은 물론 진실로 성대(聖代)의 순후한 유자(儒者)입니다.
아아! 지금 이 세 현신(賢臣)의 언행과 사적을 보건대, 기미(氣味)와 지업(志業)이 서로 같아서 마치 송조(宋朝)의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가 동시대에 아울러 살면서 함께 사문(斯文)의 종주(宗主)가 되어 후학들이 존경하고 추앙한 것과 같으니, 어찌 앞뒤와 피차의 구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종묘에 배향하는 전례를 거행하여 같이 성무(聖廡)에서 조두(俎豆)를 흠향하게 하는 것은 백세(百世) 뒤에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호남(湖南)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와서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때는 두 사람의 선정(先正)만을 거론하고 문순공(文純公)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북방의 유생[章甫]들이 주자를 존중하는 것이 남방의 유생들이 주자를 존중하는 것만 못했던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멀리 외방에 있는 유생(儒生)들이 자기가 사는 고을이 조금 외져서 친자(親炙)하는 훈도(薰陶)의 덕택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세 현인(賢人)을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줄을 알겠다. 이러한 일은 사체가 중하니 준허(準許)할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63]간기(間氣) : 여러 세대를 통하여 드물게 있는 기품.
- [註 064]
고정(考亭) : 주자(朱子)를 가리킴.- [註 065]
성조(聖祖) : 효종을 가리킴.- [註 066]
도척(盜跖) : 고대(古代)의 큰 도적(盜賊)의 이름.- [註 067]
위미 정일(危微精一) : 유교(儒敎)의 정통법(正統法)으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것이므로 오직 정미롭고 오직 순일하게 해야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면서 계칙한 말임.- [註 068]
기성(箕聖) : 기자(箕子).- [註 069]
서산(西山) : 진덕수(眞德壽).- [註 070]
○乙巳/京畿、黃海、忠淸三道儒生尹壽俊等上書, 請以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文純公 朴世采, 從祀文廟。 其略曰:
竊惟宋時烈, 稟山河之間氣, 得天地之純剛, 淵源正脈, 遠接考亭, 規模正大, 樹立光明。 如靑天白日, 萬目咸覩, 如泰山喬嶽, 四方皆仰。 平生自期以爲: "寧學聖人而未至, 不肯自安於小成。" 天人性命之妙, 經傳徵奧之旨, 擧皆涵淹貫穿, 體之身而措諸事, 故其言論著述超詣的確義理王覇之辨不差毫忽, 行藏進退之際, 各適其宜, 以至於(巧)〔功〕 力俱到, 面背粹盎, 尤嚴於明正學斥異端。 得遇聖祖, 密贊大義, 其尊周室攘夷狄之功, 足以有辭於天下後世。 此眞所謂百世可師者也。 宋浚吉, 姿稟粹美, 胸次灑落, 如氷壼玉樹, 如和風慶雲。 篤信師說, 好學力行, 作止語默, 一遵繩墨, 操守之嚴, 不愧幽獨, 孝悌之行, 可通神明。 平生用功, 尤爲致意於理欲之分、善惡之幾, 嘗論舜、跖利善, 間不容髮之義於前席, 剖柝幾微, 極其精密。 又以危微精一之學, 責於上躬, 眷眷不已, 其陳善責難之意, 吁亦至矣。 且出入書筵, 輔導東宮, 孝廟嘗面諭曰: "世子進學之勤, 卿之力也。" 身任祭酒, 誘掖多士, 開說經義, 丕變士風。 至於臨莅事變之際, 裁以義理, 確然不動, 當權奸顓恣之日, 禍福在前, 而正言直斥, 其後驗之鑿鑿。 此皆自平生學問中流出, 眞可謂通才高儒, 碩德大賢也。 朴世采, 天稟甚高, 才德全備, 通明灑落, 忠厚樂易, 粹面盎背, 洞徹無瑕, 望之如祥雲瑞日。 自弱冠時, 厭棄擧業, 勇返斯學, 精思潛究, 眞知實踐, 不待師承, 洞見大原。 以程門敬字爲工夫第一義, 理氣之妙, 心性之奧, 公私義利之分, 王覇誠僞之辨, 古今常變之禮, 率皆沿流溯源, 由著至微。 閔禮學之不知向方, 則爲著《敎法要旨》; 懼箕聖之遺學堙沒, 則爲著《範學全編》; 慮東方道統之或紊, 而《東儒師友錄》成; 憂後世師道之大壞, 而《師道考證》作。 至若《心學至訣》、《六禮疑輯》, 規模旣大, 條目且密, 方以西山 《心經》、朱子 《通解》, 未見其多讓。 其他如《二書要解》、《家語外編》、《春秋補編》、《聖賢遺模》、《淵源續錄》、《稽治錄》、《論敬要旨》等書, 或發揮經旨, 或羽翼斯文, 或論爲學次第, 或言致治要務, 其繼往開來之功, 實吾東方諸儒所未有也。 壬戌一出, 實爲造朝之始, 而袖中一箚, 爲揭尊周大義。 晩膺寵擢, 位躋三事, 慨然以挽回世道, 經濟時艱爲己任。 當朝論携貳之際, 不動聲色, 坐鎭巖廊, 擧措得宜, 是非始定。 使士趨知所依歸, 人心得免陷溺, 可以爲百世之功。 至於萬言一疏, 綱擧目張, 治道詳備, 大誥一書, 無偏無黨, 皇極復明, 亦可見其施措之大略, 眞聖代之醇儒也。 噫! 今以三賢臣言行事蹟觀之, 氣味志業相同, 譬如宋朝之明道、伊川、橫渠, 同時竝生, 共爲斯文之宗主, 後學之尊慕景仰, 豈有先後彼此之殊哉? 竝擧躋祔之典, 同享俎豆於聖廡, 可謂竢百世而不惑。 頃日湖南多士之來請從祀也, 只擧兩先正, 而不及於文純公。 豈北方章甫之尊朱子, 不如南方章甫之尊朱子故歟? 此不過遠外儒生, 所居稍左, 未蒙親炙、薰陶之澤而然也。
世子答曰: "三賢從祀之請, 固知出於公議, 而玆事體重, 不得準許矣。"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7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