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부사 윤지완의 독대에 관한 상소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시골에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서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병상(病狀)에 누워 숨이 장차 끊어지려는 가운데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연석(筵席)에서 이러저러한 분부를 춘궁(春宮)에 언급하셨는데 온 조정(朝廷)이 두려워 떨고 있으며 여러 사람의 마음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못하다고 하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노신(老臣)이 죽지 않은 탓으로 이런 소식을 듣게 되니 심담(心膽)이 떨려 단지(丹墀)288) 에 나아가 머리를 부수고 죽고만 싶으나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예질(睿質)이 자연히 성취되어 영문(令聞)이 일찍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성후(聖后)를 받들어 섬김에 있어 지극한 효성으로 간단(間斷)이 없었으며, 무릇 기뻐하도록 모시고 슬픈 마음으로 거상(居喪)하는 의절에 있어 신료들이 이를 눈으로 직접 보고 감읍(感泣)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중간에 변고(變故)를 만났을 적에는 지극히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만, 털끝만큼도 그러한 기미(幾微)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덕을 배양하여 온 30년 동안 전혀 한 가지의 잘못도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온 나라의 모든 백성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세자(世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종사(宗社) 억만년의 큰 복이므로 바야흐로 전하를 위해 두 손을 모아잡고서 묵묵히 축하드리려 하고 있었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했겠습니까? 왕언(王言)이 한번 전파되자 온 나라가 의혹에 젖어 있으니, 아!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어찌하여 이러한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예로부터 쇠망(衰亡)하는 세상에서는 항상 음사(陰邪)한 마음을 품은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 움터서 남의 집과 나라를 패망시켜 왔습니다. 지난 갑술년289) 초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시기를, ‘강신(强臣)·흉얼(凶孽)로서 감히 국본(國本)290) 을 동요(動搖)시키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논죄하겠다.’ 하였는데, 신이 등대(登對)하는 날 우러러 진달하기를, ‘국본을 동요시키면 이것은 곧 역적인 것이니, 따로 금령(禁令)을 제정하는 것은 매우 사체(事體)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감히 환수(還收)할 것을 청합니다.’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의 대신(大臣) 남구만(南九萬)이 기미(幾微)에 대한 마음으로 먼 장래를 우려한 것은 한덩어리 애타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매양 위구(危懼)스런 때를 당할 적마다 곡진한 마음으로 막아 지켰고 정성을 다하여 조호(調護)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에 대한 기미가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구만(南九萬)은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당시의 구신(舊臣) 가운데 단지 늙어빠져 거의 죽어가는 하찮은 신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성의가 천박(淺薄)하여 천의(天意)291) 를 감동시켜 돌리기를 바라기가 어렵겠으며 지망(地望)이 가벼워 또 인심도 진복(鎭服)시킬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심골(心骨)이 함께 떨립니다. 아! 시사(時事)가 변천되어 세도(世道)가 누차 바뀌었는데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이미 명릉(明陵)292) 의 보살펴 주시는 자애(慈愛)를 잃었고 계속해서 신사년293) 에 뼈를 깎는 아픔을 당하였으니,294) 감싸주고 조호해 주기를 우러러 의지할 데는 다만 우리 전하에게 있을 뿐입니다. 설령 춘궁(春宮)에게 미세한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반드시 성자(聖慈)의 너그러운 포용력에 의해 아침이나 낮에 시측(侍側)하였을 적에 계도(啓導)하여 주셔야 되는 것이요, 마땅히 기꺼워하지 않는 안색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이제 갑자기 사지(辭旨)에 드러내어 마침내 연석(筵席)에서 발론하시었으니, 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군주의 부자(父子)사이에 처하여 속마음을 다 드러내어 말하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남김없이 논한 경우는 이필(李泌)이 당(唐)나라 덕종(德宗)에게 고(告)한 것295) 과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기미(幾微)를 막고 은의(恩義)를 보존시킨 것은 실로 ‘이런 뜻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계한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이는 군주 측근의 근습(近習)296) 들 사이에 간혹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있어 상황을 엿보아 화단(禍端)을 순치(馴致)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니,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대해 신밀(愼密)을 기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이에 도리에 어긋난 분부가 있었고 이것이 이미 원근(遠近)에 전파되었으니, 지금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할 걱정은 다만 이필(李泌)이 우려(憂慮)한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성명(聖明)께서 이 점에 대해 더욱 유념이 있을 줄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노신(老臣)의 지나치게 우려하는 정성에 있어 또한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성상의 환후(患侯)가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고 안질(眼疾)까지 더 겹쳐지게 되니, 신민(臣民)들의 마음은 주야로 초조하게 애태우고 있는데, 국사(國事)를 생각하는 걱정과 같은 것은 단연코 신충(宸衷)으로부터 이극(貳極)297) 에게 참여하여 결단하게 함으로써 수고로움을 대신할 것을 명하셨으니, 이는 온당한 처분(處分)이었습니다. 대저 무슨 이의(異義)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미안(未安)한 분부가 내리자마자 계속해서 청정(聽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오늘날 세자의 심정과 처지는 생각건대 반드시 떨리고 송구스러워 편안하지 못하여 갑자기 명령을 받들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殿下)의 자애스런 마음으로써 말하더라도 어찌 간곡히 개도(開導)하여 위로하는 도리에 불만족스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노신(老臣)의 천박한 소견에는, 우선 억지로 하기 어려운 명을 천천히 하도록 하고 세자로 하여금 항상 측근에 모시게 하여 문안하고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한 다음 큰 일은 품정(稟定)하게 하고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게 하신다면 성궁(聖躬)께서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고 국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위안(慰安)하는 방도와 훈도(訓導)하는 의리가 둘 다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는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삼가 가슴속에 개연(慨然)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날 등대(登對)했던 대신은 진실로 이치에 의거하여 간쟁(諫爭)함으로써 기어이 명령을 환수하게 했어야 하는데도 계획은 이에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참여하여 결단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명초(命招)를 어긴 것은 진실로 사기(事機)와 경중(輕重)을 알아야 한다는 원칙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대(獨對)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상국(相國)298) 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가 있으며 대신(大臣)도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를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의혹하고 국언(國言)이 떠들썩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신이 병을 치료하느라 돌아다니는 즈음에 삼가 계속해서 내린 비망기(備妄記)에 특별히 성의(聖意)의 소재를 보여 연석(筵席)에서의 분부에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보고서야 신은 비로소 처음에 우려한 것이 지나친 망상(妄想)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사지(辭旨)에 그래도 미진한 뜻이 있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세자의 생각을 유념하시어 다시 명명(明命)을 내려 크게 뉘우치고 있다는 뜻을 신속히 보임으로써 온나라의 신서(臣庶)로 하여금 더욱 성심(聖心)에 의심이 없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여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경(卿)이 진달한 내용은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내가 보기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아! 나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변통(變通)시키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이미 마음속에 정하고 있던 것으로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겠다는 분부를 내가 먼저 발론하고 대신들이 봉승(奉承)하였으니,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와 자연히 부합된 처사였다. 그때 수교(手敎)를 내릴 적에도 간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제와서 간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신을 책망하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의 안질(眼疾)이 이미 십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 조금도 수응(酬應)할 수 있는 가망이 없으니, 세자에게 노고를 대신시키는 것은 한 시각이 시급한 일인데도, 경(卿)은 우선 청정(聽政)을 천천히 하자고 말을 하니, 그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독대(獨對)에 이르러서는 지금에 새로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닌데도 경이 좌규(左揆)299) 를 지척한 것은 어의(語意)가 심상(尋常)하지 않았고, 특별히 비망기(備妄記)를 내려 명백하게 풀어주었는데도 경은 다시 명령을 내리라고 청하였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6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註 288]단지(丹墀) : 임금이 있는 궁정(宮庭)을 가리킴.
- [註 289]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290]
국본(國本) : 세자를 가리킴.- [註 291]
천의(天意) : 임금의 뜻.- [註 292]
명릉(明陵) :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가리킴.- [註 293]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註 294]
뼈를 깎는 아픔을 당하였으니, : 숙종 27년(1701) 10월에 세자의 생모(生母)인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처벌되어 죽은 일을 가리킴.- [註 295]
이필(李泌)이 당(唐)나라 덕종(德宗)에게 고(告)한 것 : 이필(李泌)은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덕종(德宗)을 두루 섬겼음. 덕종이 태자(太子)를 폐하려 할 적에 이필이 사례를 들어 간절하게 간하자, 덕종이 감동되어 이를 중지하였음.- [註 296]
근습(近習) : 근신(近臣).- [註 297]
○領中樞府事尹趾完, 自鄕入城上疏曰:
臣於床簀奄奄中, 伏聞聖上, 於筵席有云云之敎及於春宮者, 擧朝震恐, 衆心波蕩。 是誠何事? 是誠何事? 老臣不死, 乃聞此報, 心膽戰掉, 只欲碎首丹墀而不可得也。 惟我春宮, 睿質天成, 令聞夙彰, 承事聖后, 至孝無間, 凡於歡侍服喪之節, 臣僚多有目擊而感泣者。 中遭變故, 至難處也, 而無一毫幾微形於外者。 毓德三十年, 了無一失之可言者, 一國含生之類, 莫不延頸, 願爲太子死者, 宗社萬年之洪休, 方爲殿下攅手而默賀, 豈意今日, 乃有此事乎? 王言一播, 擧國惶惑。 噫! 以殿下聖明, 何爲而發此敎也? 自古衰末之世, 常有陰邪不逞之徒, 孽芽其間, 敗人家國。 昔在甲戌初, 特下備忘, 若曰: "强臣、凶孽, 敢有動搖國本者, 論以逆律。" 臣於登對之日, 仰陳以爲: "動搖國本, 便是逆也。 別立禁令, 大爲失體," 敢請還收而蒙允。 伏想聖上, 亦必記有之矣。 其時大臣南九萬, 微意長慮, 出於一段苦心, 每當危懼之際, 曲意堤防, 竭誠調護, 誠以社稷安危之幾, 稟在於此也。 今則九萬, 已矣難作, 同時舊臣, 只有篤老垂死之一微臣, 而誠意淺薄, 旣難望感回天意, 地望輕微, 又不能鎭服人心。 言念及此, 心骨俱寒。 噫! 時移事往, 世道屢變, 而惟我春宮, 旣失明陵顧復之慈, 繼遭辛巳震剝之境, 顧其依仰覆燾之地, 只在我殿下。 設令春宮, 有纖微過差, 必蒙聖慈涵容, 導迪於朝晝燕侍之間, 不宜示以不豫之色。 今忽遽形於辭旨, 卒發於筵席, 臣不敢知, 何以致此耶? 從古以來, 處人君父子之間, 畢露衷赤, 深言竭論, 無如李泌之告唐宗, 而其所以防遏幾微, 保全恩義者, 實在於勿露此意之戒。 蓋慮左右近習之間, 或有不逞之徒, 窺測淺深, 馴致禍階。 其愼密於危疑之際者如此, 而今殿下, 乃有差失之敎, 旣播遠邇, 卽今先事之憂, 不特李泌之所慮而已。 固知聖明, 於此必將加意, 而老臣過慮之忱, 亦不能自已也。 見今聖疾彌久, 眼患又添, 臣民之情, 日夜焦灼, 而如其念國事之可憂, 而斷自宸衷, 爰命貳極, 參決代勞, 則處分得當。 夫豈有異辭, 而纔下未安之敎, 繼有聽政之命, 今日世子情地, 想必震惶不寧, 難於遽然承命。 且以殿下慈愛之心言之, 豈不有歉於委曲開慰之道乎? 老臣淺見以爲, 姑徐難强之命, 宜令世子, 恒侍左右, 問寢嘗藥之暇, 參視政事, 大則稟定, 小則裁決, 則聖躬省酬應之煩, 國事無曠滯之患, 而其於慰安之道, 訓迪之義, 兩得其宜。 至於聽政之擧, 徐議未晩也。 且臣竊有慨然於中者, 伊日登對大臣, 固當據理爭執, 期於收回, 而計不出此, 反請參決, 臣竊惜之。 原任大臣之違召, 固有歉於識事機知輕重之義, 而至於獨對之擧, 未免爲上下交失。 殿下, 安可以相國爲私人, 大臣亦何可以具瞻之位, 爲人主私臣也? 宜其中外驚惑, 國言喧譁也。 臣於治疏之際, 伏見繼下備忘, 特示聖意所在, 以明筵敎無他, 臣始覺始慮之過妄, 第其辭旨之間, 猶有未盡底意。 伏乞益軫睿思, 復下明命, 夬示大悔悟之意, 使一國臣庶, 曉然益知聖心無間, 不勝萬幸。
上答曰: "今卿所陳, 雖出憂愛之忱, 以予觀之, 多有不稱停者矣。 噫! 予病至此, 變通之外, 無他道理。 此固已定於心, 使世子聽政之敎, 予先發於口, 而大臣奉承, 則與世宗朝故事, 自然相符矣。 其時手敎之下, 未聞有爭之者。 今以不爭, 責大臣, 此予之所未曉也。 今予目疾, 已至十分地頭, 實無一毫酬應之望, 世子代勞, 一刻爲急, 而卿乃以姑徐聽政爲言, 亦所未解者也。 至於獨對, 非今創行, 而卿指斥左揆, 語意非常, 特下備忘, 明白開釋, 而卿至有復下之請, 尤所未解也。"
-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6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註 289]